보스톤 필그림교회 KOREAN PILGRIM CHURCH OF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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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힘든 시대에 괜찮게 살기

10/16/2016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과히 살기 좋은 시대라기 보다는 점점 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 속에는 바깥 세상은 점점 편하고 살기 좋아 보이는데 왠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힘들어 보이는 그런 괴리속에 살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를 좌우하는 몇가지 단어를 내 삶에 대비해 본다면 더욱 분명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제일 먼저 입에 담는 것은 역시 ‘돈’입니다. 빈부의 양극화가 쏟아낸 여러 현상들, 만년 인턴/비정규직 세대, 금수저/흙수저 논란, 그리고 이 잘사는 미국에서조차 늘 돈에 쪼들리거나 혹은 돈에 매여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참 살기 힘들어 보입니다. 또 다른 상황은 우리의 현재의 위치들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괜찮고 번듯한 것 같으나 그래도 확정되지 않는 앞으로의 삶 때문에, 그리고 안정된 그것을 찾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과정에 있는 스트레스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남과의 비교 때문에 생기는 우울함으로 더 힘들어 보입니다. 이런 현실과 과정을 넘어 하나님께 나와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볼 때 눈물이 나옵니다.

확실히 신앙적으로도 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예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망신주려고 작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의 비판이 건강하고 정당한 부분도 많으나, 상당 부분 세상의 기준으로 행하는 조롱일 때가 많습니다. 내적으로도 예전처럼 말씀의 감동이나 그 힘과 능력의 역사함이 적어졌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도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의로 가득차 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생활로 전환된 요즘의 신앙생활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마저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소망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 하나님이 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우리의 식과 방법대로 해 나가고 결과마저도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믿고 나아가는 삶, 하나님의 식과 방법을 따라 성도의 인내를 이루는 삶, 기도의 능력을 믿고 간구하는 삶, 여전히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순종함으로 그 다음을 믿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며 세상 기준을 넘어서 괜찮게 살고 있는 우리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소리들의 파장을 넘어

10/9/2016

 
이 시대의 혁신적인 생각들을 나누는 TED 강좌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열대 우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였는데, 뜻밖에도 정답은 우리가 흔히 쓰고 버리는 중고 셀폰이었습니다. 강사는 우선 청중들에게 인도네시아 열대 우림의 온갖 풍성한 동식물들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서 행해지고 있는 들릴듯 말듯 전기톱 소리를 비교하여 들려 줍니다. 수많은 소리에 묻히다 보면 바로 옆에서 행해지는 불법 벌목의 전기톱 소리를 잡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산림감시원이 바로 옆에 있다손 치더라도 무심코 지나칩니다. 자연의 소리에 묻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불법 벌목을 통한 비삼림화(deforestation)가 지구의 모든 교통수단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배기 가스보다 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열대 우림 지역에서도 셀폰이 기가 막히게 터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활용 중고 셀폰에 재활용 플라스틱을 이용한 태양광 패널을 부착하여 일정한 거리마다 나무 높은 곳에 설치하게 됩니다. 과연 곧바로 각 셀폰에서 보내오는 여러 소리의 파장을 분석하여 전기톱 파장을 잡아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직접 불법 벌목의 현장에 가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열대 우림의 훼손을 막는 굉장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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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좌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바로 여러 소리들 가운데 전기톱 소리를 분간해 내는 소리의 파장 분석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나서 선한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면 반드시 우선 세상의 여러 방해 소음들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정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의 파장을 감각할 수 있어야 믿음이 보다 더 쉽게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여러 소리들과 하나님의 음성을 구분할 수 있는 영적인 셀폰의 기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며 최소한 양심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들을 수 없었거나 그것을 무시하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소리를 하나님께 내 보내는 부분이 많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여 집중해서 듣는 묵상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들음의 확신은 믿음의 반응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가을 특새를 마치고

10/2/2016

 
가을을 시작하면서 마음 속에 강하게 특별새벽기도회(특새)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녹녹치 않는 여건이었습니다. 자칫 행사로 그쳐질수도 있고, 또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예상해 보니 너무 뻔한지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마음 가운데 부담감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9월 마지막 두 주간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가을 특새를 선포했습니다. 여전히 마음 가운데 있는 소극적 짐 때문에 여기 저기에 광고를 한다거나 혹은 강하게 밀어 붙이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번 특새기간 중에는 특별히 따로 전할 성경을 정하지 않았기에 다음날 전할 본문을 정하는 것이 제게는 삶의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오후까지만 해도 어떤 본문이 정해졌는데, 밤 사이에 혹은 새벽에 갑자기 성령이 마음을 주장하여 바뀌는 경우도 있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첫날 로마서 8장 11절 말씀을 필두로 하여 마지막날 베드로전서 5장 7-10절 말씀까지, 어떤 경우는 전혀 생소한 말씀을 주셨고, 어떤 경우는 아주 흔한 말씀이었는데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함께 참여하신 분들 중에는 전혀 예상치 않는 몇몇 분들이 있었습니다. 참여와 비참여로 신앙이 좋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기에 오히려 이 특새 기간에 그 분들을 왜 보내셨고 그들을 위한 기도제목이 무엇인지에 더 집중 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볼 때 입에서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사실 두주간 특새를 했다고 별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기도제목들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마지막 날까지 유예된 기도제목도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를 하면서 우리 교회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식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당에서 마음껏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확신과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새벽 예배에 나오신 분들을 라이드하면서 그들의 중심을 위한 기도를 더 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특새 기간에도 교회 안팎으로 기도하는 분들이 상당히 있구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았구나!’ 기도하는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특새 이후 이 가을이 우리 모두 기도로 다시 시작하여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평생 특새의 시발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연합의 힘

9/25/2016

 
가끔 ‘동물의 탐험’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아! 하는 감탄이 나올 때가 있다. 확실히 인간과는 달리 동물의 세계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사회이다. 먹이 사슬의 연계가 확실하다는 말이다. 사슴이나 말 보다는 표범이나 사자가 먹이 사슬에 우위에 있고, 개미나 벌 보다는 코끼리나 코뿔소가 우위에 있다. 그런데 그런 먹이 사슬도, 약육강식의 법칙도 적용되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라이언 킹(Lion King)에 나오는 것처럼 무언간에 성난 동물들이 한꺼번에 떼지어서 덮치게 되면, 아니 일단 거침없이 엄청난 수가 밀어버리면 아무리 강한 사자라도 속수무책이다. 아무리 약한 개미라도 한꺼번에 수만 마리가 떼지어서 큰 짐승을 덮치게 되면 삽시간에 그 큰 짐승은 뼈만 남곤 한다. 그래서 약한 동물들이 군집으로 모여있으면 강한 동물도 함부로  못 건드는 법이다. 그리고 큰 동물들도 이런 낌새를 미리 감지하고 피하기도 한다.

그렇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가지 목적을 위해서 뭉친 다수라면 대단한 힘을 갖는다. 교회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연합된 힘이다. 아무리 유능한 일군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절대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의 힘이 낫고, 둘 보다는 세 사람의 힘이 낫다. 그래서 성경도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12)고 말하고 있다.

​연약한 교회일수록 한 사람이 여러가지 일을 맡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자원했다가도 홀로 맡는 시간이 늘어나면 부담감이 늘어가고 쉽게 탈진되는 이유가 된다. 때론 종종 그들의 곁에서 방관자적 자세로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핑계를 찾아 마음을 힘드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구경군이 아니다. 사역의 장에서 연약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는 조력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기도와 연합을 통해 같은 목적과 같은 방향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관심과 배려의 마음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며, 함께 무거운 짐들을 져 주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각 지체 지체가 주님의 몸을 세워나가는 것이 교회이다. 세겹줄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주님의 마음처럼 더 낮춰야 하고, 때론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연합을 깨뜨릴려고 우리를 의심과 무기력의 상태로 몰아가고 때론 미움과 오해를 심는다. 우리는 이런 마귀의 계획에 말씀으로 대적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야 한다. 

목적에 붙들린 사람

9/18/2016

 
목적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뉴튼에 사는 딸 아이의 친구 중에 날 때부터 다운 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난 브라이언 (Brian) 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의 최고의 목적은 자기와 같은 사람도 한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여름마다  뉴튼에서 하는 Echo Bridge Camp에 참여합니다. 그곳은 자기처럼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많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캠프를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캠프 카운셀러로 활동을 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때때로 각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돌면서 많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면서 편견을 버리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피력합니다. 이 목적 하나를 가지고 자신을 초청하는 곳은 먼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불편함도 그리고 남들의 따가운 시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자신과 같은 아이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사회적인 제도들의 개선점도 주창합니다. 물론 함께 하는 부모의 도움도 크지만 말입니다. 늘 브라이언을 볼 때마다 참 건강하게 자랐고, 올바른 가치관을 실제로 삶 속에서 보여주며 실천해 가는 좋은 청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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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적에 붙들려 산다라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시간을 아끼고 사역을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최고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평생의 길을 회고 하면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복음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절박하고도 갈급하게 전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소망과 확신과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경험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길 원했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서 지중해를 거쳐, 로마에까지 그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어떤 선한 목적에 붙들린 바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무엇이 중요합니까?

9/11/2016

 
때론 우리의 삶속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주말을 맞아 노틀담 대학교 풋볼 경기를 보기로 한 학생이 공항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이곳 보스톤 칼리지 학생이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열렬한 노틀담 대학교 팬이었기에 이번에 함께 주말 경기를 보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셀폰이 울리더니 누군가와 대화를 진지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 공항 못 갈 것 같아요. 방금 의사선생님께 전화를 받았는데, 제가 엊그제 받은 피검사에 이상이 있데요. 어제 가슴이 좀 답답하고 아팠는데 좀 염려가 되서요. 엄마에게도 전화 드렸더니 놀라시면서 빨리 병원으로 가라네요. 목사님, 저 좀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데려다 주세요.”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다가 바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응급실로 직행한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그 형제가 한 선택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형제를 데려다 주면서  갑자기 머리속에 2년 전 즈음 일이 생각났습니다. 평소에는 너무도 건강한 이웃 교회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가을 부흥회 기간인데 첫날부터 보이지 않으시더니 주일 예배 마저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는 부고를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아픈데, 몸은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그냥 무시하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소천하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의료비에 대한 부담감, 가게 일을 비워야 하는 부담감 등이 머리를 짓눌러 평소처럼 기우로 지나쳤겠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삶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직면할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는 여유 만만함으로 위장된 교만과 웬지 부풀려진 것 같아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손해나지 않을 것 같은 겸손함이 대치를 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우선순위를 엿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선택과 행동이 뒤따르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으로서 믿음의 우선 순위를 꼭 선택해야 할 결정의 순간이 온다면 우리도 동일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겸손의 긴장이 빚어내는 갈등을 이겨내고 후회없는 선택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육체의 질병은 눈에 보이고 당장의 결과가 나타나지만, 영적인 문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장의 결과도 나타나지 않기에 많은 사람이 그대로 무시하고 유예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방향을 돌렸으면 합니다. 십자가의 짐 같지만 끝내는 부활과 승리를 가져다 주는 그 길로 말입니다. 

성령의 단비를 기다리며

9/4/2016

 
누렇게 뜬 잔디밭, 축 처진 채소들과 시들어버린 꽃들, 그리고 바닥을 드러낸 채 말라버린 호수들. 올 여름엔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예외가 아니듯 무더위와 더불어 지독히 가뭄이 찾아왔다.  그토록 많이 내리던 비는 자취를 감춰 버렸고, 퇴색한 나뭇잎들과 잡풀들이 거리를 날리며 뜨거운 태양과 더불어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여전히 무성한 푸른 나뭇잎을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큰 나무들에서와 매일 돈을 들여가며 겨우 녹색의 체취를 유지하고 있는 이웃집 잔디밭으로부터이다.

문득 엘리야를 통하여 3년 6개월 동안 비와 이슬마저 내리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의 상황이 떠올랐다. (열왕기상 17장과 18장을 보라.) 하늘로부터 오는 비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에게 이 무슨 청천벽력이랴! 시냇가도 마르고, 농사도 지을 수 없어 밀가루도 기름도 떨어져가는 상황, 그것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온 나라 전체의 문제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가뭄, 지진, 해일, 쓰나미 등 천재지변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천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분히 자연재해일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런 재해 속에는 분명 악인도 고난을 받지만 의인도 동시에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 시대의 가뭄을 묵상해 보면 이 기간동안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부재라는 사실이다. 물이 없어 갈함도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 중에 처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아모스 8:11)의 처지인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오래 경험하다 보면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현실의 괴로움과 슬픔이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마저도 마르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우리의 이웃들에게 메마른 감정과 무관심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런 비영적인 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는 말씀의 단비가 필요하다. 그 갈급함이 필요하다. 개개인에게 주님의 성령이 임하고, 그 마음 가운데 부어주시는 생수 같은 말씀의 시원함을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인한 외로움마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수의 말씀을 먹고 살 때가 제일 행복하다. 9월을 시작하면서 맨 먼저 들려오는 비소식처럼, 각자의 심령마다 은혜의 비를 머금은 손구름이 일어나고 곧 이어 부흥의 큰 비가 내렸으면 한다.

작은 이민교회의 여름

8/28/2016

 
작은 이민교회의 여름은 지독한 엔트로피의 징후를 보여준다. 교회와는 느슨한 끈을 유지하지만 공동체 모임을 소홀히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모임 자체도 해이해진다. (물론 휴가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일을 넘겨 뛰어 가면서 주변 사람들과 같이 휴가에 집중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한국도 가고 멀리 해외 여행도 가는데 휴가로 몇주일 빠진다고 뭐가 대수롭냐는듯 오히려 자신들을 정당화한다. 평상시에 집중하던 말씀에 대한 관심도, 그리고 삶을 지탱해 오던 기도도 약해지고, 결국 신앙이 무질서하게 떨어지는 것을 본다. 더운 여름만큼이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도 습하고 늘어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런 삶이 매년마다 반복되면서 더욱 굳건히 습관화되는 것을 본다. 여름만 되면 몸과 마음이 마치 권리인냥 외쳐댄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무질서,부정, 추락, 파괴, 소멸, 죽음으로 가는 심각한 병이다. 평신도들 뿐만 아니라 목회자 자신도 그런 징후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게 된다. 마치 전체가 전염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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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우리는 멈춰야한다. 다시 한번 반전을 이뤄야한다. 여름에 익숙해진 사람일수록 가을이 힘든 법이다. 그러나 세상  어떤 일에도 반드시 해결책은 있듯이 이런 현상들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엔트로피(entropy:추락/소멸의 과정)’에서 ‘네트로피(netropy: 상승/창조의 과정)’로의 반전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고맙게도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것을 해낼 방법들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의 출발점은 다시 하나님께로 가까이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돌아간 거리만큼이나 돌아올 길이 힘들긴 하지만 그 길은 의외로 가까울 수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그 누구라도 반가이 맞아들여주실 뿐만 아니라 그곳에 풍성한 잔치를 배설해 놓으신다. 돌아온 탕자의 잔치와 모압에서 돌아온 나오미의 경우를 보라! 하나님께로 가까이 돌아온 그들은 하나님과의 향연을 누릴 수 있었고, 그들의 영적인 침체도 회복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예배를 회복한다는 의미이며, 그동안 떠나 있었던 말씀과 기도를  통해 믿음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다시 사랑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 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는 말씀처럼, 믿음의 공동체를 다시 견고히  일으켜 세워야 한다. 믿음의 날개짓으로 다시 부상해야 한다.

배려의 힘

8/20/2016

 
교역자 수련회를 마치고 난 다음날 보스톤 지역에 있는 교단 목사님 가족들끼리 모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몇 분은 오래 간만에 봐서 더욱 반가웠고, 몇몇 자녀들도 함께 해서 더욱 의의가 있었습니다. 지방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저녁 식사비에 한계가 있었기에 다들 비싼 것은 못먹고 그냥 간단하게 한 가지씩 시키기로 했습니다. 음식이 나오고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비싼 음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두들 의아한 눈초리로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여종업원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여기에 우리 담임목사님과 여러 목사님들이 오셨는데 이것은 제가 섬기는 것입니다. 부담감 갖지 말고 드세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우리를 서빙하는 분이 함께 한 모교회의 집사님이셨던 것입니다. 보통은 식당에 가면 아는 사람이 일할 경우 애퍼타이저나 간단한 음식 정도가 덤으로 나오는 경우를 보았지만, 가장 값비싼 메뉴를 대접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던 터라 적잖이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찌됐든 예상치 않게 과한 음식을 대접받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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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음식을 다먹고 계산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계산서를 받아든 다른 이웃교회 목사님이 전체를 훑어보시더니 계산을 위해 신용카드와 팁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팁으로 내놓은 돈이 무려 백불이나 되었습니다. 원래 줄 팁은 그 절반에도 훨씬 못미치는 적은 돈이지만 그렇게 내놓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나 같으면 딱 15%만 내놓고 올텐데…’ 그런데 순간 무릎을 탁 치면서 계산하시는 목사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담임목사님을 대접하고 싶은 성도의 아름다운 마음을 아시고 다들 즐겁게 먹고 나서는, 그래도 지출하는 자의 부담이 되지만 팁으로나마 섬기시는 집사님의 재정적 부담을 덜어 드릴려고 하는 배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서로의 명분을 세워주는 그래서 서로가 윈윈(win-win)할 수 있는 실생활의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일을 보면서 우리 시대에 이런 배려의 힘이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지독한 이기주의에 마음 상해 하거나 혹은 함부로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상대방을 헤아리지 못하고 전체를 바라보지 못한채 한가지만 생각했던 제 자신이 쫀쫀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신앙의 갈림길에서

8/13/2016

 
400여년의 역사는 미국을 확연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라고 찾는 곳는 여전히 메이플라워가 도착한 플리머스이다. 우연찮게 연달아 세번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아마도 이곳을 찾던 사람들은 초기에는 거의 백인들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음을 보게된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우리 같은 아시아인들이 이곳을 많이 방문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본다. 물론 그들을 관광객과 내국인으로서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가족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찾는 것을 보면 관광객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의 의미 심장함이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유적지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이 신앙적이다라는 것이다. 그것도 오늘날 타종교를 용납하면서 더이상 기독교만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함부로 마음껏 쓸수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플리머스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뿌리깊은 신앙을 고백한다. 무엇이 그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표현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증거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맨처음 도착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들 손안에 들려져 읽혀지고 있는 그 오래된 성경들, 그들의 조상들과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앉아  예배하는 그 오래된 예배당들, 그리고 날마다 많은 관광객들 앞에서 입술로 재연하는 신앙의 고백들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더 굳건하게 하고 신앙의 재창조를 이뤄내는 좋은 기제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그들과 대비되게 ‘우리는 왜 이리 믿음이 힘이 없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어찌보면 우리의 위치가 부흥과 성장이 멈춘 유지maintenance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떠나고 교회 건물만 남는 박물관museum의 시대로 접어드는 신앙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반문하게 된다. 아마도 그 대답은 믿음(신앙)의 추상성과 세상과의 타협으로 인한 통제력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머리속 지식은 신앙으로 절대로 자랄 수 없다.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세상과 타협하기 쉽고, 오히려 우리의 힘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세파에 흔들리는 나무 조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위해 고백의 훈련과 헌신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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