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의 역사는 미국을 확연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라고 찾는 곳는 여전히 메이플라워가 도착한 플리머스이다. 우연찮게 연달아 세번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아마도 이곳을 찾던 사람들은 초기에는 거의 백인들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음을 보게된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우리 같은 아시아인들이 이곳을 많이 방문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본다. 물론 그들을 관광객과 내국인으로서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가족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찾는 것을 보면 관광객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의 의미 심장함이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유적지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이 신앙적이다라는 것이다. 그것도 오늘날 타종교를 용납하면서 더이상 기독교만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함부로 마음껏 쓸수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플리머스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뿌리깊은 신앙을 고백한다. 무엇이 그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표현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증거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맨처음 도착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들 손안에 들려져 읽혀지고 있는 그 오래된 성경들, 그들의 조상들과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앉아 예배하는 그 오래된 예배당들, 그리고 날마다 많은 관광객들 앞에서 입술로 재연하는 신앙의 고백들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더 굳건하게 하고 신앙의 재창조를 이뤄내는 좋은 기제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그들과 대비되게 ‘우리는 왜 이리 믿음이 힘이 없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어찌보면 우리의 위치가 부흥과 성장이 멈춘 유지maintenance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떠나고 교회 건물만 남는 박물관museum의 시대로 접어드는 신앙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반문하게 된다. 아마도 그 대답은 믿음(신앙)의 추상성과 세상과의 타협으로 인한 통제력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머리속 지식은 신앙으로 절대로 자랄 수 없다.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세상과 타협하기 쉽고, 오히려 우리의 힘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세파에 흔들리는 나무 조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위해 고백의 훈련과 헌신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유적지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이 신앙적이다라는 것이다. 그것도 오늘날 타종교를 용납하면서 더이상 기독교만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함부로 마음껏 쓸수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플리머스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뿌리깊은 신앙을 고백한다. 무엇이 그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표현하도록 용기를 주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증거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맨처음 도착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들 손안에 들려져 읽혀지고 있는 그 오래된 성경들, 그들의 조상들과 그리고 여전히 그들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앉아 예배하는 그 오래된 예배당들, 그리고 날마다 많은 관광객들 앞에서 입술로 재연하는 신앙의 고백들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더 굳건하게 하고 신앙의 재창조를 이뤄내는 좋은 기제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그들과 대비되게 ‘우리는 왜 이리 믿음이 힘이 없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어찌보면 우리의 위치가 부흥과 성장이 멈춘 유지maintenance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떠나고 교회 건물만 남는 박물관museum의 시대로 접어드는 신앙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반문하게 된다. 아마도 그 대답은 믿음(신앙)의 추상성과 세상과의 타협으로 인한 통제력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머리속 지식은 신앙으로 절대로 자랄 수 없다.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세상과 타협하기 쉽고, 오히려 우리의 힘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세파에 흔들리는 나무 조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위해 고백의 훈련과 헌신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