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 필그림교회 KOREAN PILGRIM CHURCH OF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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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9/3/2017

 
지난 주간 미국은 허리케인 하비로 인해 큰 몸살을 앓았습니다. 해당 피해지역인 휴스턴과 그 주변 지역은 유례없는 홍수와 침수 그리고 수많은 이재민을 낳았고, 그동안 일구었던 삶의 터전을 순식간에 잃게 되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보스턴에 사는 우리들도 역시 그것의 간접 피해로 갑자기 치솟은 기름 값에 아연 실색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평온함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된셈이지요.
CNN뉴스는 계속해서 허리케인과 이어지는 폭우로 인해 피해을 입은 지역과 대피와 인명구조를 하고 있는 해당 지역을 생방송 했습니다. 절박한 구조가 필요한 사람의 주소를 곧바로 올리는 가 하면, 물이 가득찬 Port Harbor 시장의 집부터 거동이 불편한 양로원의 노인들을 구조하여 옮기는 장면까지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생방송을 하지만 뉴스 중간에 광고를 위해 잠깐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리케인이 오기 전과 후의 미국의 모습을 대비시켜 주는 장면이 제 눈길을 사로 잡았습니다. 허리케인 전주까지만 해도 미국은 다른 것으로 인해서 몸살을 앓았습니다. 잠재된 인종 차별의 재현과 저마다 이기적인 모습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면서 감정의 폭발을 정당화하는 시위들과 그것과 맞불격으로 이성과 관용으로 우리의 다름을 인정하고 모두를 포용하며 다같이 살아보고자 하는 진지한 시위가 격돌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사람들의 마음의 금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더군다나 현 대통령의 애매모호한 발언이 그것에 더욱 불을 지르는 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허리케인 하비가 휴스턴 지역을 강타하고 나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분노 앞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위해, 원초적인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분열과 미움의 구호를 외쳤던 각각의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팽개쳐 놓고 그들을 돕겠다며 수많은 보트의 행렬을 만들었습니다. 이전에 샌디와 카트리나 허리케인 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도 팔을 걷어 붙였고, 이제는 인종과 상관없이 전 미국이 거의 한 마음으로 인간의 본연 안에 잠재되어 있는 동정심을 발휘하여 이 큰 재앙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내 안에 가장 악한 모습도 바로 나의 모습이고, 동시에 가장 사랑하고 동정심 많은 모습도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일상 속에 성령을 통해 사랑과 동정과 긍휼의 모습만이 나타났으면 합니다. 

믿음과 기적의 교회

12/18/2016

 
여러분은 기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짬을 내 어릴적 기억을 되살리면서 영화 ‘34번가의 기적’ (The Miracle on 34th Street, 1994년판)을 보았습니다.  뉴욕을 배경으로 실제 산타가 나타나 제도화된 세계속에서 산타 역할을 하면서 벌어지는 코믹하면서도 가족적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주는 도전은 산타 클로스에 대한 믿음과 현실적인 불신에 대한 괴리입니다. 영화는 미국 지폐에 새겨진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산타의 존재에 대한 실제적인 팩트나 역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산타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믿음의 영역은 점점 축소되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막연한 희망사항 정도라고, 그래서 실현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상상속에 이루어지는 그 즐거움으로 잠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일시적 정신적 도피상태를 믿음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겠느냐?’라고 반문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기적의 대부분은 믿음의 결과임을 보게 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노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등등. 그런데 예수님과 늘 함께 있고 그를 들으면서도 믿음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과 사람들은  입술로는 제자이고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음을 반증해 주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적이 아주 가까이서 일어났지만 그 수혜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 온 인류에게 부인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참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매년마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까닭은 바로 피상적이고 믿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예수님을 통해 믿음의 세계로 발을 내디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수많은 기적에 참여하라는 또 하나의 기회(second chance)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여러분! 기적을 바라십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요. 기적의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믿음의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12/11/2016

 
올 한해 전세계 이목을 끌었던 뉴스 중에 하나는 바로 시리아 난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실상을 알리는 몇몇 사진들은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반군과 이슬람 테러조직인 ISIS로 인해 평화로웠던 도시 알렙포(Aleppo)를 비롯하여 시리아는 전쟁의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폭격과 총성으로 인해 죽게 되고 급기야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 레바논으로 터키로 그리고 유럽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거대한 시리아 난민의 물결이 온 지중해와 유럽을 휩쓸게 되고, 그 와중에 또 다른 희생자들을 낳게 됩니다. 여전히 대다수 그들은  난민 캠프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인해 죽은 어린 아이들과 폐허가 된 도시를 등지고 떠나는 사람들의 슬픔은 전세계인의 짧은 동정을 이끌어 냈지만, 이내 곧 포용의 한계와 현실의 불편함에 부디친 각 나라의 자국 이기주의와 민족적 종교적 편견에 곧 묻혀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난민들이 무엇을 가장 원할까요? 아마도 전쟁이 없는 평화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두 다리 뻗고 식구들과 함께 편안한 잠을 자고 다음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꿈일 것입니다. 
​
미국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어쩌면 자신들과 가정들 조차도 현실에서 전쟁처럼 힘든 상황에 있기에 그들에 대한 관심과 상황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예수님은 평화의 왕(The Prince of Peace)으로 오셨습니다. 욕심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그 자리에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을 위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독히도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셨습니다. 마치 성 프란시스의 찬양시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까지 이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평화를 지식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우리와 우리 교회도 욕심과 교만과 분열의 이기심을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진정한 자아 죽음의 삶, 그래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사랑의 삶으로 한걸음씩 나갈 때 우리는 이 땅이 평화로 가득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대강절을 지나면서

12/4/2016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보스톤은 바로 크리스마스를 향한 빛과 소리의 축제로 바뀝니다. 화려한 장식의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패뉼 홀(Faneuil Hall)과 보스톤 컴먼(Boston Common)에 세워지고 보스톤, 캠브리지 그리고 주변 중요 도시의 거리마다 각각의 색깔을 담은 크리스마스 전구들로 가득찬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립니다. 역설적이게도 올해는 지난해와는 다르게 유독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와 크리스마스 장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쇼핑센터 정문이나 거리의 교차점에서 어김없이 볼 수 있는 구세군 냄비와 달랑거리는 그들의 종소리, 곳곳에 트리와 크리스마스 화환(Christmas Wreath)을 파는 곳에는 북적이는 사람들, 그리고 하루종일 앞다투어 크리스마스 캐롤과 크리스마스 영화나 시리즈 등을 내보내고 있는 라디오 음악 채널들과 TV 채널들. 이곳 사람들은 믿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이미 마음이 들떠 있고, 적어도 12월은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랑의 달이라는 것쯤은 TV 광고를 통해서 얼마든지 배우고 있습니다. 물론 그 교훈만이라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요? 대강절(영어로는 Advent라고 합니다)은 우리 크리스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통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이전의 4주간을 대강절로 지킵니다. 대강절의 의미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강단 앞에 있는 대강절 초입니다.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상징하는 크리스마스 화환 위에 5개의 초가 세워져 있습니다. 원래 바깥의 4개의 초는 모두 빨간색이었으나 요즘은 바뀌어 3개의 자주색 초와 1개의 핑크색 초, 그리고 가운데 하얀색의 제일 큰 초가 세워져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당일날 켜는 한 가운데 흰색 초가 의미하듯 대강절과 크리스마스의 초점은 바로 이 땅에 어두움을 이기시고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각각 3개의 자주빛 초가 의미하듯, 소망(Hope), 평화(Peace), 사랑(Love)이 되시며, 핑크빛 초가 의미하듯 기쁨(Joy)이 되십니다. 이 다섯개의 초가 하나씩 켜지면서 더 큰 빛을 발하듯 이 땅에 상실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크게 새겨지길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대강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참 빛 되심을 고백하고, 복음을 가지고 가족을 넘어서 이웃과 세상에게로 향하는 사랑의 메신저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설거지 타임

11/27/2016

 
가사 노동에 관하여 많은 부분 아내가 담당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담도 덜 느끼면서 즐겁게 맡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거지 입니다. 좁은 씽크대 안에 쌓여진 그릇들이 제법 위용을 자랑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숙달이 되서 그런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씩 느리다고 아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저를 밀어내기도 하지만 제가 시작하면 대개 제가 끝을 봅니다. 좋아 보일 것 같지도 않는데 설거지 타임이 제게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에 싫어하지 않고 맡는 것일까요?
한때 일본에서 늘그막한 나이에 아내와 따로 떨어져 상당 기간 홀로 지내야 했던 이어령 선생님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에서 자신의 설거지 타임을 이렇게 회술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지금껏 내가 남긴 것들 내가 먹다 만 그 음식들을 설거지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내가 그동안 벌여놓았던 것들을 먹어치울 시간, 설거지를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식칼에 묻은 양념 내를 깨끗이 씻어야만 사과껍질을 벗겨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설거지 타임은 다분히 개인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그 어느 순간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씻어내고 비워야 할 시간을 설거지 타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은 개인에게 정화의 시간, 다시 새롭게 함의 시간이 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서 설거지 타임은 가족들을 위한 시간입니다. 아내의 새로운 음식을 위한 준비 기간이며, 또한 가족들의 즐거운  식탁을 위한 예비 기간입니다. 부담스럽고 힘든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그 다음의 창조적인 활동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금만 뒤에서 도와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세례 요한이 생각납니다.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꼭 설거지 타임을 연상시킵니다. 본인은 이 설거지 타임이 정작 피곤하고 힘들었겠지만 후에 행복했을 예수님과 이스라엘이 그려집니다. 해마다 새롭게 일군들을 뽑을 때면 큰 설거지를 앞두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주님의 식탁을 위해 설거지 한번 다같이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오늘 하루 감사를 표현해 보세요

11/20/2016

 
몇해 전으로 기억이 됩니다. 페이스북에 낯선 메시지가 하나 떴습니다. ‘목사님, 저 ooo예요. 제가 주일학교 시절 그 때 전도사님 댁으로 가서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너무 감사해요!’ 처음에는 누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잊어버렸던 것 같은 그 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엄마하고만 교회에 나오던 그 초등학교 5학년, 그 아이였습니다. 몇 명의 아이들을 함께 모아 주말이면 집에서 성경경시대회를 준비했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너무 조용하고 평범했는데 어떻게 나를 찾고 이렇게 연락을 했을까?’ 그래도 계속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지 않고 작은 감사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그 마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사진을 보니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성숙한 청년이 되어버렸지만, 그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지 안봐도 알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큰 일에서 감사를 경험하기 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들에서 더 감사를 느끼곤 합니다. 잔잔한 시냇물처럼 감사의 파동은 우리 삶의 시원한 소리로 다가와 우리에게 생기와 감동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의 삶이 현대인들에게 많이 묻혀 버린 것 같아 내심 마음이 아픕니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 감사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측량하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감사에는 조건이 있다고 믿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감사의 삶에 대해서 어색하고 인색한 삶을 삽니다. 마음 속은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가지처럼 무미건조함이 자리잡고 있고, 원망과 불평이 입술 가운데 따라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방법도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감사를 생활화 하는 것입니다. 몇해전 ‘평생 감사’라는 책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매일 매일 감사 일기를 쓰고, 매순간 떠올려진 감사를 표현하고 그래서 평생을 감사로 살게 되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변에는 그때 그 영향을 받아서 교회 이름을 감사교회로 바꾸신 분도 있습니다.

​1621년 11월, 플리머스에서 있었던 첫 추수감사절, 청교도들과 그곳 원주민들이 나눈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칠면조, 옥수수, 감자, 대합조개 조금, … 그런데 그들은 작은 것들로 아주 큰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서로 간에 감사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많은 감사의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 감사를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군가에게 롤 모델입니다

11/13/2016

 
미국 대선이 끝나고 가뜩이나 마땅찮은 마당에 MIT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의 생일을 맞아 서부 오클랜드에서 방문하신 백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 말하기가 그래 그냥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역사란 늘 앞으로 나아가지만 곧장 나아가지만은 않고 때로는  한발자욱씩 뒤로 물러났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나 봅니다. 사실 이민자로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그분은 어차피 캘리포니아가 힐러리 지지 지역이기에 본인은 트럼프도 아닌 힐러리도 아닌 다른 후보를 투표했다고 밝히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습니다. “사실 많이 부끄럽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라나는 이 세대의 아이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이번 대선이 장차 아이들에게 나도 트럼프처럼 선생을 때려도 괜찮고, 인종 차별과 여자들을 함부러 대해도 괜찮으며, 세금을 안내도 그래도 얼마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라는 나쁜 롤 모델을 보여 주어서 걱정입니다.” 비록 한 사람의 견해이지만, 일자리나 혹은 그동안 소외되었던 백인 중산층 노동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녀를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을 토로한 그 마음이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는 다른 누군가에게 롤 모델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성격, 습관, 가치관, 그리고 인격과 문화 속에는 이런 롤 모델들의 영향이 잠재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 사회의 지도자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밝힐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은 우리가 세상을 비추기도 하지만, 우리가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세상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음을 내포합니다.   

​이번에 당선된 트럼프는 자신을 장로교인으로 밝혔고 여론 조사에 의하면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81%가 그를 지지했으며,  선거 내내 많은 목사들이 그에게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행보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함도, 포용성도, 그리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회개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트럼프 당선자를 보는 시각이 다르겠지만, 분명 과거의 롤 모델은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미래의 롤 모델도 염려가 되며, 미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반트럼프 데모에 공감합니다. 바라기는 대통령 취임후에는 그의 주변에 있는 여러 좋은 신앙인들의 진실된 조언을 듣고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하고 기도해 봅니다.

미 대선을 앞두고

11/6/2016

 
한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것은 한 나라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국민에게는 뽑는 자유도 있지만 그만큼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대통령을 잘 뽑으면 미래를 향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즐겁게 나아갈 수 있지만, 잘못된 대통령을 뽑으면 국민이 고생하며, 나라가 힘들어진다. 최근 들어 한국의 예가 이를 절실히 입증해 주고 있다. 거짓과 탐욕이 추악한 위선의 탈을 쓴 사악한 영과 더불어 나라를 망치고 있으며, 그 아래서 수많은 백성들이 아파하고 절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의 여전한 침묵과 수동적인 자세가 불편하기만 하다. 편리와 혜택만을 누리려고만 하고, 실질적인 희생은 지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과 부합한가 자문해 보게 된다. 신앙의 목소리로 진리의 말씀에 서서 작금의 현실에 일침을 가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득권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위해 함께 울고 기도에서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한국은 그렇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오는 화요일(8일)은 앞으로 4년을 책임질 미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날이다. (물론 상하원 의원과 각 주의 기타 중요의견들을 함께 묻는 투표가 진행된다.) 우리는 힐러리와 트럼프 두 후보 중에서 과연 미국의 미래를 잘 책임질 후보가 누구인가를 신앙의 눈으로 잘 선택해야 한다. 올해 대선의 경우 예전처럼 복음주의자들이나 기독교적인 영향력은 그리 강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표를 구애하기 위해서 두 후보가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고, 실현 불가능한 약속들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선거 끝나면 기독교와 관련된 그들의 공약에 대해서 온전하게 책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생명에 대한 존중, 이민자와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경제 정의, 그리고 사회적 기본 가치관에 대한 신뢰와 그것을 유지할려고 하는 노력들, 국제적인 위치에서 국가적인 겸손함이 누구에게 더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선택이 쉬워질 것 같다.

​아울러 투표권이 있는 교우들에게 당부 드리는 것은 주법에 의해 행해지는 주민투표 중에 반드시 비기독교적이고 공동체 파괴적인 카지노 증설과 마리화나 확대에 대해서는 반대표를 던져 주었으면 한다. 설령 투표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함께 미 대선을 위해 기도했으면 한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10/30/2016

 
한국은 지금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사태로 무척이나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무겁습니다. 어쩌다가 저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누가 국가의 지도자이고 누가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불안을 넘어 회의감이 듭니다. 그런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관대한 한국인들이기에 예전처럼 이번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어물쩡 넘어갈려나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더더욱 속상한 것은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수많은 유명하고 큰 교회 목사님들이 침묵하거나 여전히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채 감싸려 돈다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신학생들이 나서서 시국선언을 할까요?

오늘은 바로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마틴 루터가 당시 카톨릭 교회의 전횡에 항의하여95개조 논박문을 붙였을 때는 감히 개신교회의 탄생을 꿈꾸지 못했습니다. 루터는 성직자로서 교회의 잘못과 타락에 대해서, 그리고 침묵하고 있는 중세 제후들에 대해서 시대적 양심과 성서에 기초한 신앙을 일깨우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이것이 온 유럽에 개혁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가 태동했으며 국가와 신앙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개혁의 3대 정신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그리고 오직 은혜로(sola gratia)입니다. 이것은 혼돈의 시대에 교회가 그들의 권력과 신학을 지나치게 악용하고 있을 때 그러하지 말라고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소수의 양심있는 사제들과 제후들이 믿음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반 백성들과 함께 온갖 거짓과 타락과 불의에 대항합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 받은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경적 기준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나, 힘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아첨하기에 바쁜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삶 속에서 복음의 참된 자유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야 하건만, 세속적 가치와 야합하여 이권에 눈이 먼채 양심을 저버린 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하며 불의에 대한 침묵에 더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더 은혜 없는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는지 자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분명 교회는 깨어나야 합니다.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의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그릇된 교회의 편견과 잘못으로 수많은 영혼을 잃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다시 무너질 것입니다.
          

최고의 동행

10/23/2016

 
한때 이런 TV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공원에서 산책하는 젊은 두 연인 앞에서 저만치 노부부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사람 어깨 너비만큼 떨어져 말없이 어색하게 걷는 이 연인들에게 노부부의 느린 걸음이 눈에 들어 옵니다. 그리고 이어 손을 다소곤이 잡고 평화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젊은 연인들은 서로간의 거리감이 왠지 서글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떨어진 손을 마주 잡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무엇에 대한 광고인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이 광고가 머리 속에 강렬히 남는 까닭은 동행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 아닌가 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개인적입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가는 동행에 대해서 부끄러워 합니다. 신혼이 지나면 서서히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삽니다. 자녀들과의 손도 아이들이 자라면서 서서히 놓습니다. 외로이 홀로 걸어가는 길 속에서 자칫 우리는 많이도 넘어집니다. 위험해서 넘어질 때도 있고, 때론 어디로 가야할 찌 몰라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드는데 일어설 힘조차 없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칫 함께 동행하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그리고 자녀들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수 없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성경은 이런 외로운 우리에게 최고의 동행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의 주된 역할은 바로 동행입니다. 위로자로서, 상담자로서, 그리고 변호자로서 성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생의 동행이 되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고 복음을 이해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가 연약할 때 친히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히 담대히 위대한 일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은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8) 우리 안에 동행하시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우리가 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은 손을 더욱 꽉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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