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 필그림교회 KOREAN PILGRIM CHURCH OF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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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미루지 않는 신앙생활(Don't delay Doing the Good for God): 야고보서 4장 11-17절 (2022. 09.04.)

9/4/2022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할 때에는 늘 후회가 뒤따라 옵니다. 반대로 해야 할 것도 하지 않았을 때 후회가 따라 옵니다. 영적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또 자신을 유혹과 죄로부터 떨쳐 버릴 수 있는 좋은 훈련의 장이었는데 그것을 차버린 듯한 못남에 대해 후회를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야고보 사도가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권면하고 있는 믿음의 실천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번째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제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야고보서 4장 11-12절) 당시 흩어져 있던 초대교회 내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바로 다툼과 분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시기와 분열이 교회 내에 일어났지요. 분열의 모습은 교회 내에 분파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최고의 장애물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3장 1-2절에서 말에 실수가 많은 선생들(교회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한 좋은 대화를 하다가 혹은 토의를 진행하다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대화나 토의가 상대방을 위한 비방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메’라는 헬라어 금지동사를 앞에 붙임으로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11절은 ‘형제들아 절대로 서로 비방하지 말라!’ 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비방하다’로 사용된 단어의 원래 형테는 ‘카탈랄레오’입니다. 비방, 비난, 험담, 욕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하는 형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주 안좋은 말로 그를 깍아내리고 비난하고 잘못됐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이 일이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번은 Youtube를 통해 개그맨이자 MC인 신동엽씨의 작은 일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저랑 동갑인데다가 참 장수하는 개그맨이라 무언가 특별한게 있겠지 하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대화의 기준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웃기고 재미있어도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웃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남을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조차 멀리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직접 자신이 이런 것들의 폐해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비방과 판단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듣게 되고, 본의 아니게 하게 되고. 이상한 일은 그 모든 비방과 판단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저에게 다시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고 입술로 말하면서 또 입술의 실수가 나온 것이지요. 할 때는 정당하고 맞는 것 같았는데, 찝찝함이 남습니다. 영적으로 개운치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곳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장 2-3, 5절) 이것을 알면서도 말의 실수를 하고 그래서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참 아이러니이지요. 
 
야고보 사도는 비방하는 것, 곧 비난하고 험담하고 판단하는 그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 있는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아니라 준행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줄 수도, 영벌을 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오직 주님 만이 그 일의 판단자요 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선다는 말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비난하고 비방하고 판단함으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면서, 판단 기준을 자신에게로 옮기는 불경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야고보가 한번 더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를 비방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는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말을 아끼시면서 우리 입술 가운데서 남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도록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줄 아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2. 두번째로 하지 말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이란 무엇일까요? 13-16절까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야고보서 4장 13-16절) 말씀을 읽고나서 보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로마 제국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옮겨가면서 사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말로 볼 때, 그들에 대해서 좋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며,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기준에서는 이것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쉬운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만해져서 자랑을 하고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별로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당시의 계획과 정당한 경제생활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질타를 받는단 말입니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교묘히 피해갈려는 교만이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 했을 때는 늘 생명과 구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내일 우리가 다시금 호흡을 할지 장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일어나 우리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장 14절) 생명의 한계성과 연약성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먼저 엎드림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아무리 거창하고 잘 짜여진 계획일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민 온 우리들은 이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민 오기 전에 거창한 꿈들을 꾸었습니다. 이민오고 나서 여러가지 일들을 계획했습니다. 그 계획대로 성공하신 분들도 있고, 또 이루지 못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민생활을 제가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정직하게 한번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진행됐노라고 고백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평안과 힘듦이 늘 함께 존재하고 있었고, 고난과 기쁨이 교차해 오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겐 잠언의 말씀처럼  무릎을 치게 만드는 말씀도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 (잠언 16장 9절)
 
결국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 뜻대로 살아가면서 세상과 벗될려고 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교인들 중에 부유함을 자랑하던 상인들에게서 보여지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허탄한 자랑’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과 믿음으로 살아낸 것을 자랑하기 보다,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우리가 해낸 일들을 자랑하고 거기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대로 반석위에 세운 것들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무너질 허탄한 자랑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믿음의 자랑이 많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장 17절) 우리는 그동안 앞에서 다루었던 시기나 질투, 혹은 그 밑바탕이 되는 비방이나 험담 이런 것들이 되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을 벗하면서 드러낼려고 하는 허탄한 자랑만이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서 사도는 거의 결론적으로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읽고, 설교도 듣고, 성경공부도 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복음의 진리가 쌓이건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우리의 믿음을 따라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이거든 그것을 미루지 말고 당장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부정적인 삶에 혹은 악한 행동에 넘어지기 보다는 우리가 바로 실천해야 할 선한 행위를 하지 않고 그것을 지연시키는 믿음의 지연 행위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을 뒤에서 몰래 험담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형제들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것이 선하고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쑥스러워 하면서 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좋은 일을 지연시킵니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나쁨을 알기에 그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어려움을 보고 바로 도와주는 것이 선한 일임을 알면서도 지연시킵니다. 나중에 해도 되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비단 이런 예만 있을까요? 돌이켜 보면 우리가 배운 수많은 신앙의 원칙들 가운데, 아니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을 우리는 지연시킵니다. 영적인 procrastination이지요. 이런 모습은 우리의 영적인 체력을 상당히 고갈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우선 나부터 어느 정도 세워놓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 놓고,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고 나서 신앙적인 일들을 하겠습니다.” 나에 대해 기준을 맞춰놓고 나면 만족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훈련입니다. 거듭된 실천을 통해 영적인 체력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부터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하겠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위에 있는 허탄한 자랑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을 듣다가 아,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구나 생각이 드시면 바로 믿음을 따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부족함이 보입니다. 연약함도 보입니다. 한계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후회가 되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알고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비방이 그런 것입니다. 세상과 벗하면서 지혜 있는척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계획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이런 것들을 알았으니 우리 함께 지혜롭게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으니, 아니 지금도 만연한 이런 악한 행위들에서 자신을 지키고 말을 절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보다 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인 지연입니다. 선한 일을 보았거나 선한 일이라고 깨달아질 때에는 지체없이 그 일들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귀한 믿음의 지체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정욕을 이기는 영적생활(A Thriving Spiritual Life over Desires): 야고보서 4장 1-10절 (2022. 8. 28)

8/28/2022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 오늘은 이렇게 한번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밝히고, 그런 후에 야고보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올바른 영적생활 5가지가 무엇인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그 주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야고보서 3장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3장의 주요 내용이 교회 지도자들의 절제되지 못한 말 때문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지혜 때문에 초대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4장을 시작하면서 이런 현상의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봅니다.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냐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장 1절) 야고보 사도는 지금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과 다툼의 근원이 바로 정욕에서 부터 나온다고 밝힙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정욕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정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헤도논’이란 명사입니다. 헤도논의 원형인 ‘헤도네’는 1차적으로 우리의 원초적 본능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바를 가르켰습니다. 오감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반응입니다. 미각으로 치면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 정말 먹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어찌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주로 ‘탐욕, 욕심, 쾌락, 정욕’이란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입은 엄청 큰 데, 그것을 통해 담을 수 있는 자루의 끝이 터져 있는 모습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러니 아무리 입으로 먹어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정욕에 사로잡히면 바로 이런 지독한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2절의 결과가 나옵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야고보서 4장 2절)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요즘으로 치면 물질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추구하는 것 앞에 ‘더’라는 말을 붙입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명망… 사실 좋은 꿈을 위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한 댓가로 얻는 결과들은 의미가 있고 마땅히 칭찬받을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 중에 함께 하는 공동체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나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때론 멈출 줄 알고, 때론 배려할 줄 알고, 때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의 욕심 때문에 시기하고 다툽니다. 바로 이런 것들 속에는 심하면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나의 옳음이나 대의명분을 추구하기 보다 오히려 그 본질적인 바탕에는 교묘히 포장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욕심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우리를 그 자리에 엄청 주저앉게 만듭니다. 야고보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야고보서 4장 2-3절) 잠깐만요? 어딘가 익숙한 말씀이지요? 기도회를 할 때마다, 혹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내놓은 말씀이지요?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말씀 속에 어딘가 모순이 보입니다.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얻지 못했다구요? 사실 초대교회 만큼 기도에 간절했던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이 마가의 다락방 그 놀라운 기도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믿음이 위험에 처하고 그들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는 세상의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하지 아니하였다구요? 더 나아가 구했는데 받지 못함이 그들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였기 때문이라구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탐욕에서 나온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제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권사님들이 하는 기도가, 우리 집사님들이 하는 기도가 정욕으로 쓰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이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욕이라고 하는 말을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그 출발이 어디입니까? 바로 창세기에 나온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사탄의 대리자로 묘사된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뱀의 첫 유혹이 무엇입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라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장 4-5절)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생과 창조세계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었는데, 그 소관이 자신들에게로,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지대로 창조의 세계를 펼쳐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려해서 하나님이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세기 3장 6절) 뱀의 은밀한 유혹이 무엇과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그것이 오감에서 비롯된 탐욕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언약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작용을 해야 하는데, 그 열매를 보는 순간 그들 가운데 있는 정욕이 발동한 것입니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을 바라보니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약속의 말씀은 희미해지고, 오히려 나의 정욕이 그것을 누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타먹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줄 알았는데, 그 결과는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고생과 출산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 가운데 드리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정욕의 뿌리, 탐심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앉고자 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불편하여, 하나님 자리에 자신 말고 다른 것을 채워놓는 우상숭배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우리 교인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님들도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성도님들을 위한 기도가 저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대부분 사양치 않습니다. 한번은 어떤 집사님이 자녀들의 진학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다른 목사님께서 이 집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이렇게 응답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봅니다. ” 이 말을 듣고 나서 저에게 와서 고백하십니다. “목사님, 저는요 지금 상황에서 다른 목사님들이 이게 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하면 좋나요?” 저는 그분이 퍽 솔직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정욕으로 쓸려고 기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께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간다는 것이 때론 기약이 없고, 무척이나 추상적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소박한 정욕이라고 표현하면 경박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의 기도의 기대와 어긋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그래서 소박한 정욕이나마 뒤로하고 믿음의 인내를 경주하는 그런 믿음을 결단한다면 이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집사님, 그런 말씀을 듣고 나서 저도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제가 믿는 한가지는 기도하는 부모 밑에 있는 그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집사님의 자녀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벌어진 여러 다툼과 시기들이 실상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었지만, 그들 안에 교묘히 숨겨진 이기적인 동기들과, 내려놓지 못하는 자존심과, 끊임없이 욕망하는 그 탐욕 때문임을 야고보 사도는 밝히고 나서, 정욕으로 비롯된 신앙생활은 결국 영적인 간음과 같다라고 선포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4장 4절)  정욕의 가장 큰 특징이 세상과 벗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또 세상도 섬기고.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철저히 경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14절)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피었다지는 들의 풀꽃과 같음을 인정하면서 천국을 향해 영원한 소망을 두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언젠가 무너질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팬데믹 이후에 보고 있는 신앙의 무너짐이 바로 이런 결과들이겠지요.
 
이런 모습들을 하나님은 그냥 보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야고보서 4장 5절)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그냥 내버려둬도 될 그런 존재일텐데 그렇게까지 시기하고 질투하신단 말입니까? 바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해서 얻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피값주고 사셨으며, 진리 가운데 날마다 우리를 감찰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입술과 마음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길 원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 아래 서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은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할 때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금 손 내밀어 일으켜 주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야고보서 4장 6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예비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없고, 당신 자리에 끊임없이 앉으려는 이기적인 정욕에 쌓인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전보다 더욱 큰 은혜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요?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그리고 이것을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정욕을 이기고 번성하는 영적인 가르침 다섯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장 7절) ‘복종’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강한 단어입니다. 이유불문하고 명령을 내리는 주체에 대해서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는 오직 한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안에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어영부영 우리 안에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단호하게 그것들을 대적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장 8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씀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뭘 하지 말라는 말을 먼저 듣습니다. 뭘 하지 말라고 하면 자꾸 그것에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믿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정신을 쏟노라면 자동적으로 부정적인 것들이 밀려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 기도는 해도 해도 늘 언제나 모자라다라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습니다.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만나는 시간을, 하나님 가까이 하는 시간을 가장 먼저 두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 드립니다. 그렇게 했을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를 세밀히 보고 계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하심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세번째,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야고보서 4장 8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언제나 적용되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행한 모든 외적인 행동들과 우리 마음에 들어있는 내적 동기들과 소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정직히 섰을 때,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는 회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정욕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회개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네번째,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야고보서 4장 9절) 상한 심령으로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즐겁고, 세상 살이에 만족하는 한 하나님을 찾는 일이 희박해질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삶의 모든 과정들이 순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냈노라고 하면서 더 이상 갈급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장 24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애통해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고, 우리의 정욕대로 살았던,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곧 무너지게 될 우리의 연약한 신앙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이사야 42장 3절)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의 애통함이, 조국을 생각하며 비통함에 젖었던 다니엘의 눈물이 회복될 때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장 10절) 여기서 낮춘다는 말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 동양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겸양지덕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주 앞에서 낮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직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나는 오직 주님 한 분만 의지하고 나아가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듣고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애씁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시기하고 경쟁하고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교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아진 자리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겸손한 자를 주님이 높이십니다. 그렇기에 많은 하나님의 역사는 덜 배워도, 덜 가져도, 덜 강해도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낳았던 것입니다. 기준점이 분명합니다. 주 앞에서. 우리는 주님 때문에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주님 때문에 얼마든지 손해보고, 또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든 다툼과 시기와 혼란은 거의 대부분 정욕으로부터 왔습니다. 정욕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의 깊은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되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시기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무너졌다는 현실적 결과에 체념하지 마시고, 다시한번 우리를 잡아 이끄시는 우리 하나님의 손길을 꽉 잡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지금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 신실하심을 끝까지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영적인 삶은 분명 구별되어지고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요. 성결한 마음을 품고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잃어버렸던  주님의 평강과 만족과 감사가 다시 한번 회복되시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삭개오의 기쁨 (The Joy of Zacchaeus): 누가복음 19장 1-10절 (2014_0803)

8/3/2014

 
삭개오의  기쁨 (The Joy of Zacchaeus)

 성경본문: 누가복음  19장1-10절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행복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 경제적인 것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평과 사회 정의라는 것 보다는 바로 내 앞의 이익, 즉 내 밥 그릇의 크기를
불려준다는 말에 더 현혹되기 쉬운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오랫동안 축복, 특별히 물질적인 축복에 많은 강조를 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이 틀렸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축복이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축복의 유무가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는 자에게 따라오는 부산물의 하나이지 절대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잘 믿어서 물질적인 축복이 따라오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축복이 따라왔다고 해서 꼭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믿지 않고도 주체할 수 없는 부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부유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절제할 수 없는 탐욕을 보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느껴지는 결핍(모자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공허하지만 겉으로는 온갖
것들로 포장한 것 같은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중성에 노출된 자아가 자신 안에서 만족하고 기뻐할만한 일관성을 지니게 될 때 입니다. 그런 일관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변화는 우리의 생각의 변화로 우리가 바꿔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이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서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런 결핍과 이중성의 문제를 해결한 한 사람의 기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삭개오라는 사람을 통해 그가 어떤 기쁨을 누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기쁨을 누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함께 이런 교훈들을 우리 삶에 동일하게 적용해서 그가 누렸던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려보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동안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구약 성경 이사야
61장의 예언에서 잘 나타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3절) 그래서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셨고,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전하였습니다.
갈릴리에서 돌아와 이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바로 여리고를 거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리고 성이 상당히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여호수아를 통해 철저히 무너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저주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의 여리고 성에서 약간 떨어진, 헤롯의 별장인 Wadi Qult가 있던 오아시스 도시를 말합니다. 여러 개의 오아시스로 인해 풍부한 물이 있었기에 큰 도시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관문이었기에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큰 세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도시의 세리장이 삭개오였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면서 그 사이에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동족들의 희생을 통하여 부자가 된 셈이지요. 그래서 그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거리의 창기들처럼 죄인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취급에 대해서 삭개오는 별로 아랑곳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족할 것 없는 그가, 신경 쓸 것 없는 그가 어떻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걸까요?

 당시 여리고 성에는 얼마 전 일어났던 기적(누가복음 18:35-43)이 화제였습니다. 바로 성 밖에서 늘 구걸하며 살던 시각장애인인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입니다. 눈을 뜬 과정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선풍적으로 여리고 성안에 쫙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 또한 이런 소문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던 것 같습니다.3절에 보니까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보고자 하되’라는 말 앞에 한 단어를 덧붙입니다. “He wanted to see Jesus eagerly.” 정말 간절히 보고자 하는 욕구가 그의 마음 속에 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소문을  따라 예수님이 오신다는 길목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 발꿈치를 쳐들고 뛰면서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근처 길목 위로 쭉 뻗어 있는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 갔습니다. 바로 그 위로 예수님이 지나가게 됩니다. 대개가 구경 나온 사람은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즉 인간관계가 간접적인 관계에서 그치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삭개오도 이미 저만큼에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됐다’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으로 만족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돌무화과 나무 아래 오시더니 자기를 쳐다보면서 한 마디 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성경은 그 다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우리는 여기서 뜻밖의 큰 즐거움을 얻게 된 삭개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는 속히 내려와 예수님을 즐거워하며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을까요? 우리는 5절 말씀을 보면서 그 속에서 몇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삭개오야’라는 부름에 있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은 만난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로부터 유명한 세리장이라고 들은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여리고까지 오면서 그럴만한 힌트는 한군데서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번에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고 있으되 잘 알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밖으로 보여지는 키 작은 삭개오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중심을 알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셨고 당신의 계획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장 1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고 있었고, 그도 하나님의 선한 이미지를 따라 구원의 대상에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의 모든 자아가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가장 출발점은 우리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알고 부르셨을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거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우리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손님이 오히려 우리를 초대하는 격입니다. 사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를 예수님이 초대하십니다. 비록 장소가 삭개오 집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초대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신앙 사건의 가장 큰 순간은 바로 이런 주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늘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로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오직 마음을 열고 그 초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주변 사람들이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열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감격이 있기에 즐거움으로 그 초청에 응하여 당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삭개오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중심을 아는 예수님을 간접적인 관계가 아닌 직접적으로 만나는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이 여러분의 존재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삭개오의 집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장면은 바로 삭개오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돌무화과 나무에서 삭개오의 집까지는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가까우면 10분정도 걸었을 수도 있고, 혹은 도심 정반대편에 있었다면 꽤 걸었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 사이의 기록을 말하고 있지 않기에 우리는 모릅니다. 다분히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이 다음 장면입니다. 분주하게 하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겼을 것이고, 부자 집인 까닭에 좋은 음식들이 준비되어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보고 모여든 주변 사람들이 수근댑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말입니다. 거룩한 예수님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부정한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힐난하는 셈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이런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삭개오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 일종의 폭탄 선언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선언을 하게끔 만들었을까요? 삭개오는 부정한 자신의 집에 거룩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오신 순간부터 성(the sacred)과 속(the secular)의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레위기에 보면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거룩한 것에 부정한 것이 닿으면 그것이 부정해지든지  아니면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해서 거룩하게 되든지 하는 것이지 그 둘의 중간이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병이 묻은 옷이나 다른 부정한 것을 닿은 그릇은 바로 깨뜨려지거나 불살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성과 속의 갈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15절, 21-24절) 삭개오의 마음 속에서 죄의 짐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짐이 함께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짐이 결코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 앞에서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옛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힘들어도 새로운 결단을 한번 해볼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장 22-24절) 삭개오는 자신 앞에 놓인 결단의 순간의 죄의 문제를 과감히 주님께 맡기고 믿음을 따라 생명으로의 변화를 선택합니다. 비록 자신이 평생 쌓아 이룬 부와 관계가 손해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전에 살았던 삶과 반전을 이루는 두드러진 회개가 있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믿음의 과정에서 진정한 회개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편리함과 익숙함을 포기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실상 우리 한국교회의 잘못된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많이 듣는데 실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신뢰도가 매년마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아예 동네 개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 대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 지성인인 손봉호 교수님은 한국 사회가 경쟁위주의 사회로 급성장하였고 그것이 교회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경쟁은 그 결과가 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과 방법은 경쟁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쟁적으로 실천했더라면 오히려 한국 교회는 훨씬 투명하고 존경 받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 절박성을 잃어버리고 말씀의 능력과 삶의 성결성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안에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과 물신(物神)인 맘몬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타협한 결과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면 내가 손해 봐야 하고, 영광도 없고 고난만이 있기에 복음을 올바로 적용하기 보다 오해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손쉽게 믿을 수 있는 기독교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예수님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으로 바꿔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이 울리는 내적인 반향에 그가 공적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부정하고 탐욕스러운 부자에서 정직하고 거룩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니 더 이상 부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한 분 만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삭개오의 폭탄선언은 우리에게 세례 요한의 외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태복음 38-10절)

 이런 그를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장 9절) 구원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더 이상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회개를 보시고는 그에게 사죄의 은혜와 더불어 그와 그의 온 집에 구원의 선포를 이루신 것입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니!”죄인으로 취급 받고 있었던 삭개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쁨과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은혜는 죄가 많은 곳으로 흐르는 법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삶의 반전도 중요하지만, 존재의 반전을 삭개오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였고 궁극적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자신을 아는 예수님을 모심으로 회개의 기쁨과 사죄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의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 다가온 믿음의 사건에 오해하지 않고 올바르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밖에서 늘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계신 주님을 모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기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주신 마음의 소리를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회개에 합당한 참된 열매를 이룸으로 사죄의 기쁨에 참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새생명을 얻은 새사람으로서의 구원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베이직으로 돌아가라: 말라기 3장 7-12절 (2014_0629)

6/29/2014

 
베이직으로 돌아가라 Being Faithful to the Basic

성경본문: 말라기 3장 7-12절

요즘 모국인 한국을 보면서 많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지난 세월호 사고와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통해 국민에 대한 기본적인 안전이 무너졌고, 여러 현실적인 정치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우리 믿는 신앙인들의 양심과 도덕이 많이 무너진 것을 봅니다. 가장 최근에는 유럽과 전세계의 클럽 축구에서 개인기를 자랑하며 이제는 세계 무대에서 전혀 꿀릴 것 같지 않던 한국 축구가 브라질 월드컵에서 너무 어이없이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너진 안전성, 무너진 축구, 그리고 무너진 신앙 양심. 이것들의 결과는 우리 조국과 우리들의 마음이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항해하기 보다는 표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외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지금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센 풍랑과 물결로 인해 방향과 목적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풍랑이 세차게 일지만 배에는 아무 이상 없이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항해입니까? 아니면 표류하고 있습니까? 단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풍랑과 거친 물결만 바라보고 원망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표류가 아닌 항해를 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편 30절의 말씀처럼, 즉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라는 말씀이 여러분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의 인생이 도대체 어느 곳에 서 있는지 감을 못 잡고 방향과 목적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근본 원인에는 예외 없이 그 기본이 무너져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배를 예로 치자면, 키가 부서져 있고, 돛은 찢겨져 있으며, 엔진이 고장 나 있습니다. 원래의 제작된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분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건강의 기본에 충실했더라면 지금쯤 몸이 그리 아프진 않을 것입니다. 재정의 기본에 충실 했더라면 지금 물질적인 고생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베이직에 충실 했더라면 외로워 하거나 정말 중요할 때 사람들의 마음과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저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위해 주시는 시험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신앙의 베이직에 충실 했더라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 힘이 들고,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 기본에서 많이 달라져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고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표류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읽은 본문 말씀(말라기 3장 7-12절)을 통해 신앙생활의 베이직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삶에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앙의 베이직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식에 그친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그들 마음은 예배가 번거롭다고 느껴졌습니다(말라기 1장 13절). 그래서 드리는 희생제물도 대충대충 병들고 흠이 있는 것들과 심지어는 훔쳐다가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 꼭 드릴 봉헌물 마저 건성으로 드리거나 아니면 속였습니다. 그들 소유 중에서 가장 좋고 중요한 부분을 먼저 드린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은 것들 중에서 제일 좋지 않고 상한 것을 드렸으며, 혹은 그나마도 하나님의 명령을 좋지 않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삶에 거룩함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여인들과 결혼합니다. 하나님과 이방 신들을 겸하여 섬깁니다. 그들 삶에 다시금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바로 사회 속에 정의가 무너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 가운데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재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의심합니다. 예배가 아닌 종교생활에 그치고 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혹 우리 가운데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다면 빨리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양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Coram Deo) 생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 모든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순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이고, 가장 최선이라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장 1-3절)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에게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손길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심령에 닿을 때 치유되는 것이고, 내가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참으로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께 돌아감으로 우리의 예배 안에,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만큼 복된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시금 어디로 가야 할지 비전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심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같은 것을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버린다면 이런 것들이 오히려 큰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대천덕 신부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같은 제자인 브래드 롱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게도 볼 수 있는 눈을 주리라! 너도 꿈꾸는 자가 되게 하리라! 크고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길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꿈이 내게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조심해라. 내가 네게 준 꿈꾸는 능력은 큰 선이 될 수도 있지만 무서운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거라. 오직 나만 따르거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다음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앙생활의 베이직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의 우선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을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본문은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본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하실 것이고, 한편으로 여러분이 축복의 말씀으로 꼭 붙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십일조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한글 번역 대신에 영어 번역으로 나오는 한 문장에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영어 성경은 앞의 말씀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맺습니다. “Test me in this.” 번역하면 “이것들로 나를 시험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확신과 보증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하시겠다라는 분명한 선포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한다는데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절 한절을 사모합니다. 보통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고 꽉 붙듭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께서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그 약속의 말씀들을 시험해 보실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으면 합니다. 즉 여러분이 사모하는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믿음을 선포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앞의 말씀대로 인생의 풍랑을 만났다면 담대히 이사야 54장 7절에 의지하여 “너는 나를 무너 뜨릴 수 없어. 나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 없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121편에 의지하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그저 짜집기 형식으로 마법의 주문처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의 약속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직접 역사하실 수 있도록 온전히 내어 맡김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순풍이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과 현실의 상황을 바꾸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의 주변 사람이 뭐라 하건 상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에너지를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더욱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실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셨는데, 거친 풍랑이 잔잔해졌고, 백부장의 하인이 낳았으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영적인 능력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순종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전도와 선교, 그리고 봉사와 섬김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을 직접 시험해 보는 담대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베이직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말씀에 순전히 기초할 때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씀을 시험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부분적이고 단기적인 현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의 완전한 목표는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땅이 아름다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의 삶이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풍성한 삶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촉촉한 말씀의 단비로 말미암아 늘 부드러운 심령을 유지하는 것으로의 변화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에서의 목표가 단순히 아름다운 열매만 맺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이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열매는 반드시 좋은 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농경사회라 땅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아름다운 땅이라는 것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풍성하며, 그 열매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그 땅의 농산물이 잘 되어 창고에 풍성하게 거둬들일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우리 삶의 일부만 바뀐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삶의 전부가 바뀐 사람이 진짜 돌아간 사람입니다. 돌 밭이, 가시 밭이 완전히 옥토로 바뀐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룩(성결성)이 회복되고 은혜가 풍성함으로 인격이 부드러워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같이 있는 신자가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입술 가운데서, 즉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입술 속에서 인정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평안을, 성령의 확신과 충만함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고, 오히려 우리들의 아름다운 땅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따뜻한 바람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느 땅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기초가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여러분을 복되다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서있는 현실이 표류하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신앙 생활의 베이직이 무너졌기에 다시금 그 기본을 역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시금 신앙의 베이직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그토록 의지했던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고 시험을 주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만군의 주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니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장 3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두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신 약속의 말씀을 우리의 모든 부분에 시험해 볼 정도로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다지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과 삶의 모든 부분이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OO이 있는 가족: 예레미야 17장 7~8절 (2014_0525)

5/25/2014

 
OO 이  있는 가족 (The Heritage of Faith)

 성경본문: 예레미야  17장 7~8절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한번은 작은 아버님이 어린 저를 부르셨습니다. 두툼한 누런 족보 2권을 가져와서는 제 부모님의 이름과 제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보여주시면서 너는 이러이러한 가문의 몇 대

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족보라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뿌리를 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아버님께서 조상 중에 중요 관직에 있었던 몇몇 중요한 분들을 일러 주시면서 그들의 행적에 대해 말씀해 주실 때는 자연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별로 특이점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이름과 자녀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나올 뿐 그저 평범한 가문일 뿐이었습니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고,  어쩌다 공무원이나 소규모 사업을 하는 사람이 전부였습니다. 자라면서 저는 그 족보들을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나와 우리 가문은 어떤 가문이 될까 하고 많이 기도해 왔습니다. 그저 혈통에 의해 이름만 올리는 그런 가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가문이 되기를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현재의 삶에 여건에 힘들어 가문은
고사하고 현재의 가족 챙기기도 힘들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혹은 좋은 가문이야 늘 생각하지만,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처럼 부와 권력이 편중되고 세습되는 상황에서 좋은 환경과 좋은 여건을 만들 수 없는 현실 속에  더더욱 좋은 가문을 이루기가 힘들다고 고민하고는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러나 성경과 역사는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최고의 가문을 뽑으라면 각 분야 별로 많이 나옵니다. 정치적으로는 최근에 케네디 가문과 부시 가문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을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은 전반적으로 정치적인 요직에 많이 포진되어서 지금도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경제적으로는 록펠러, 맬런, 듀폰, 핍스 가문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재산과 영향력은 오늘날의 빌 게이츠나 얼마 전까지 생존했던 스티브 잡스를 능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외에 한 가문을 더 들고자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가문들이 대부분 한 분야에 국한된 영향력을 펼쳤다면 이 가문은 그의 사후 200년 동안에 미국 정신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바로 부흥회를 통해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 수도 있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가문입니다. 매세추세츠 서쪽 작은 마을인 Northampton에서 미국의 부흥 운동을 주도했으며, 후일에 프린스톤 대학교의 전신인 뉴저지 칼리지의 총장을 맡기도 한 그의 집안은 12명의 자녀와 그들의 4-5대에 걸친 후손들을 통해 부통령이 하나, 13명의 대학 총장, 3명의 주지사, 3명의 시장, 149명의 변호사,48명의 판검사, 116명의 목사, 75명의 사업가, 25명의 발명가, 66명의 교수, 82명의 차관급 공무원, 68명의 의사가 배출되었습니다. 참 대단하지요? 비록 그들은 작은 오두막 집에 살았지만, 비록 그들은 초라한 부부로 이름 없는 가문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자녀들과 자손들은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휼륭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아내인 사라의 믿음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충분히 이런 훌륭한 가문이 될 수 있습니다. 꼭 정치나 경제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이 아닐지라도 전세계의 역사와 정신적 가치를 드높일 귀한 인재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각자의 가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가족에게 독특하게 흐르는 혈통적 DNA가 있습니다. 사상과 문장을 잘하는 문사의 기질이 있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목소리와 창조적인 예술성을 가지고 있는 가족도 있습니다.  또 어떤 가족은 운동 신경이 뛰어나 스포츠에 두각을 드러내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렇듯 좋은 DNA 뿐만 아니라 안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DNA가 있는 가족도 있습니다. 할아버지부터 시작되어 술에 중독되어 사는 알코홀릭(alcoholic)도 한가지 예입니다. 도박에 중독되어 전 재산을 탕진하는 것도 나쁜 DNA입니다. 첩을 얻거나 바람을 피우는 것도 역시 핏속에 흐르는 독특한 DNA입니다. 우울증이 있거나 자살 증후군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병원을 방문해서 병력을 기록할 때, 조상 대대로 고혈압이나 심장 질환, 혹은 치매도 그런 혈통적 DNA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DNA이건 나쁜 DNA이건 운명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좋은 DNA가 몸 속에 흘러 도움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펼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나쁜 DNA에 대해서 운명이라고 그것에 순복한다면 우리는 결코 좋은 가문을 이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OO이 있는 가족”이라고 해 보았습니다. 우리 가족에 무엇이 있으면 가장 좋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 무엇의 자리에 사랑을 써 넣기도 하고, 돈을 써 넣기도 하고, 건강을 써 놓기도 하고, 화목을 써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여러분이 여러분
가족과 자녀들에게 최고의 유산을 남기시려거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이 무엇의 자리에 없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앞 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예레미야  17장 5절) 말씀을 읽으면서  ‘저주’라는 단어가 상당히 강한 반감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사람을 믿는다”라는 말과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다”, 그리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이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앞의 두 말은 우리 인간들이 가장 흔하게 행하는 형태입니다. 우리는 참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정이 깊은 가족이라든지, 살가운 가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여러 복잡한 인간관계를 맺어갑니다. 그것이 혈연일수도 있고,학연과 지연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이익에 따라 정치 경제적으로 여러 관계들을 맺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갑고 정이 가기도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는 완벽하지가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정말 친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 서로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아주 자그마한 일에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싸움이 나 서로가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인간관계를 잘 하지 못해 심히 외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원하지 못한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힘들게 합니다. 물론 믿는 사람이기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랴?”라는 속담 보다 발등을 찍혀 가면서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저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불완정성을 보완하기 위해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꼭 신체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지식 등 세상에서 우리의 안전을 위해 담보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의지하는 사람과 안전을 위해 쌓고 있는 육신이 우리의 마음을 여호와에게서 떠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붙잡고 있는 것들이 강할수록 더욱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저주라고
말하고 마치 건조한 사막에 사는 떨기나무 같다고 했습니다.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사그라지고 멸망할 결과를 가져다 주는 그런 사막의 메마른 나무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이런 것들을 남겨 주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젠가 다 없어지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남겨주어야 합니까? 우리는 7절에서 읽은 것처럼,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믿음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몇 가지를 그 빈 공간에 집어 넣어보았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는 가족, 믿음의 도전이 있는 가족, 사랑과 용서가  있는 가족… 여러 좋은 말씀은 그곳에 다 집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 하나님 한 분 만을 집어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가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신앙이 최고의 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7절) 여기서 의지(trust)하고 의뢰한다(confidence)는 말은 그냥 단순히 믿는다(believe)라는 말보다 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육체의 모든 것을 철저히 내어 맡기는 복종(surrender)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그리고 온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그 다음 8절에서 아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 말씀은 시편 1편 3절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두 말씀에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교하였습니다. 나무는 물과 햇빛이 절대 필수적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바로 뿌리를 강변에 뻗치는 행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필요조건이 바로 제공됩니다. 물이 끊임없이 제공된다는 말 가운데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구원에 대한 모든 조건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지혜와 어그러지고 부서진 모든 문제에서 우리가 회복되고 치유됨을 공급받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에 모든 것이 주어지니 그 다음은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잎이 푸르른 것뿐만 아니라 결실이 그치지 아니합니다. 즉 우리 가족의 당대뿐만 아니라 믿음의 후손들에게도 귀한 열매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우리의 기도와 상상 이상입니다. 만일 조나단 에드워즈 부부가 살아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의 후손은 그들이 꿈꿨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은 오늘 본문 말씀을 더욱 확증하는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시려고 하십니까? 아직도 현실의 상황과 여건을 원망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와 후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함이 없는 물댄 동산 같은 것입니다. 당장 보이지 않지만, 여러분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역사하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와 섭리를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 자녀들과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그 다음은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늘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기도를 통해 자녀들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의 가족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몇 백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세계와 역사 속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정말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귀한 믿음의 가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의심과 믿음: 요한복음 20장 24-29절 (2014_0427)

4/28/2014

 
의심과 믿음 (Doubt and Belief)

성경본문: 요한복음 20장 24~29절

오늘은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스트로벨은 미주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법학으로 석사학위를 땄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 자신의 적성과 관심을 따라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사실 위주로 파헤쳐 볼 수 있는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의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설명된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이런 확신은 그의 고등학생 시절에 한 화학 실험과도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지구의 원초적 상태에서 생물이 생성되는 과정에 관한 실험을 하게 됩니다. 질소와 탄소 및 산소가 전기장과 반응하여 초기 생명체의 근원이 되는 아미노산이 생성되는 것을 보고 그는 더 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결혼을 하고 동일하게 무신론자였던 아내가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집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정 생활과 자녀에 대한 이후의 일들이 자신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진행되자 마음 속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인가? 성경은 사실인가?’ 정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중립적인 견해에서 믿을 만한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심을 품고 1981년부터 약 2년간 과학 및 의학 분야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본인이 가졌던 의심을 검증해 나갑니다. 마침내 이 의심에 대한 검증이 끝났을 때 놀라우리만치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순전하게 모든 것이 믿어지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개는 한두 번은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의심하게 됩니다. 순전하게 믿어지는 신앙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의심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그런 의심에 대해서는 절대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 이런 신앙의 의심에 대해서 살펴 보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도마라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나게 됩니다. 갈릴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도마는 다른 제자들처럼 별로 두드러진 제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도마는 늘 상이한 태도를 보여주는 그의 이중적 성격을 의미하는 ‘디두모(쌍둥이)’라는 별칭처럼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한 제자입니다. 무조건 믿기보다 사리를 따져보고 본인이 이해해야만 믿는 그런 철저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그런 의구심이 풀리면 그 다음에는 다른 제자들 보다 용감하게 신앙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성경에 보여집니다. (참고, 요한복음 11:16) 이런 도마의 모습은 점점 과학과 이성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좀처럼 어떤 일이나 사실을 믿으려고 하기 보다는 증거와 객관적 자료들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한복음 20장 24절). 그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증거합니다. 엠마오로 갔다가 돌아온 두 제자가 증언합니다. 심지어는 부활절 새벽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제자들로 부터도 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런 그가 보인 반응은 한 마디로 ‘믿을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람이 죽었으면 끝났지 부활은 또 뭔가라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의 말에 짙은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면서 “나는 주님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네”(25절)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견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만약에 여러분이 도마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마도 도마처럼 많은 분들이 세상에 대한 상식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도마가 이런 정직한 의심을 하게 된 배경을 성경을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참고, 누가복음 24장 13~35절)은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과 한참 동안 동행을 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것을 자세히 설명 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져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부활이 실재이고 상식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아직 머물러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주님은 본인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지상 대명령의 사명까지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부인할 수 없는 실재로 나타나셨고 그들과 오랜 동안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도마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하다고 하면 묻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소외감을 포장한 채 믿어지지 않는 의구심을 덮어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표출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주님에 신앙 체험을 소원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신앙에 대한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오든지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형편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합리적인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경우들일 때가 많습니다. 정말 신앙 좋은 분들이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오는 결과들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실망스러운 것들이거나, 혹은 우리의 귀한 믿음과 정반대로 우리의 삶이 진행될 때 우리는 신앙의 회의를 품게 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부터 의심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서 신앙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의심의 안개 속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1장 19절) 이런 의심의 안개 속에 여러분들은 묻혀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마는 자신이 이해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의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곳이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다른 제자들과의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홀로 숨지 않고, 자신의 의심의 연약함을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드러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의심과 회의를 갖게 될 때, 그 때마다 우리도 또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찾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확대하면 자신의 신앙적 욕구에 대해서 반드시 표출하되 교회 안에서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보다 주님을 체험한 형제 자매들이 많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도마를 비롯한 다른 모든 제자들이 모인 곳에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도마의 의심 때문에 다른 제자들의 확신과 평화가 날라가 버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강이 있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마를 보며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참 이상합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전혀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조건부 신앙이 잘못된 것을 책망하십니다. 사람이 갖는 의심은 오히려 중립성을 가지지만, 그 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시험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들으신바 없는데 도마 앞에 나타나셔서 그의 의심대로 직접 자신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불신앙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모든 형편과 처지와 속내를 잘 알지 못하지만, 비록 주님이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형편과 처지와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도마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고는 바로 지금 그에게 그의 의심대로 본인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도마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성경은 도마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에 손가락을 직접 넣어보고 확신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눈 앞에서 봤으니 됐어요, 뭘 그런 걸 가지고…”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도마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뜻밖에도 신앙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 다른 사람들의 주님이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신앙의 반전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확신 없이 다른 형제 자매와 함께, 아니 다른 가족들의 눈치도 있고 그러하니 마음 속에 드는 의심을 그냥 묻어버리고, 심지어는 비록 잘못된 태도일지라고 도마처럼 주님 앞에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려고 하는 적극성도 띠지 못한 채 그냥 묻어가는 신앙이라면 이 시간 다시 한번 여러분 자신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추상적인 주님, 멀리 떨어져 있는 주님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서 계신 주님의 그 십자가 흔적을 체험하셔서 죽은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라 산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스트로벨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과연 그의 의심이 바뀌었을까요? 이성과 과학이 철옹성이 되어 복음에 대해서는 장벽을 쌓고 살았던 그가,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철저한 무신론자요 진화론 신봉자가 없을 만큼 단호했던 그가 다양한 과학적 학문들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의 인터뷰들을 통해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의심의 안개가 걷히면서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이 없다’라고 외치던 그의 입술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심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지적 영적 탐구가 오히려 큰 신앙의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는 윌로우 크릭 교회와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들을 위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그가 품은 의심이 신앙의 확신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된 것입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도마가 주님을 의심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나중에 인도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AD 72년 경에 인도의 말리바라는 곳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만이 전승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 내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의 사역과 사명을 지탱했음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성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매체도 그러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보스톤이 바로 지성의 메카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베어있는 의심과 시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지적인 의심이 영성과 만남으로 인해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그것이 비록 나이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2007년에 대한민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딸을 통해 회심하면서 남긴 말처럼 말입니다.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후일에 베드로가 초대교회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전서 1장 8절)라고 선포한 것처럼, 그런 믿음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영광의 부활: 마태복음 28장 1-10절 (2014_0420)

4/21/2014

 
2014년 부활절 메시지

영광의 부활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성경본문: 마태복음 28장 1-10절

오늘 부활주일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도 한편으로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매일 뉴스를 쳐다 보면서 혹시나 산 사람이 없나 하고 스크린만 쳐다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먹먹하기만 합니다. 너무도 슬픕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지금도 여전히 물속에 갇혀 있을 고등학생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애타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오늘 과연 ‘Happy Easter’라고 외치는 것이 맞는가 고민해 봅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의 마음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활절이라 분명 기쁜 날이지만, 오늘만큼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기쁨을 절제하며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떠올리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40일 동안은 음식이 없어도 살 수가 있답니다. 3일 동안은 물이 없어도 살 수 있답니다. 그리고 8분 동안 공기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 1초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소망이 없다’라는 말만큼 우리를 맥 빠지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바다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에 잠수부를 내려 보내고 공기를 주입하고 온갖 첨단장비를 통해 구조활동을 벌이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아직도 배 안에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소망 때문입니다. 비록 한줄기 옅은 소망일지라도 소망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고 함께 할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무언가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성과 관계됩니다. 이 세상의 삶과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영원한 안식이요 하나님과의 동행이 될 테이지만, 오직 이 세상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끝입니다. ‘Hope Zero’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비록 병들고 약해도, 무언가를 잃어버려도 죽은 송장보다 낫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 앞에는 피할 길이 없고 모든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창세기 22장 18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세상 만이 소망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유대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어차피 예수님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았던 당시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죽으면 그들의 위선으로 가려진 모든 정치적 종교적 염려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백성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젠 모든 것이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을 이길 권세는 그 어느 것도 없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도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던 이유는 산 사람을 만나기 보다 죽은 자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도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아 시신이 있는 무덤 안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일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그 자체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흘린 피와 물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우리 인간이 짊어진 모든 죄의 무게를 친히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22절) 아담은 곧 우리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비록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죽음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 안에는 세상의 모든 죽음에 대한 근원이 숨겨져 있으며, 결국 우리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이 됩니다.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봅니다. “무능한 사람들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무책임한 사람들 때문에, 비겁한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김동호 목사 Facebook) 죽음의 근원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우리들의 추악하고 연약한 모습을 봅니다. 혹자는 먼저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는 정부대책반과, 이 와중에도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정치인들과 못된 인터넷 스미싱을 욕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실상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단편 하나 하나가 역할만 바뀌었지 우리 안에 동일하게 베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먼저 희생양을 찾기 보다 우리 안의 악함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생명 가치보다 자본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던 우리의 악함과 죽음을 앞두고 보여준 너무도 옹졸하고 연약한 우리의 의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라는 말은 맞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아담과 우리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죽음의 한계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린도전서 15장 29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서 그토록 봉사하고, 사랑하고, 또 희생하는 것이 다만 이 세상에 국한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이 세상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고통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이 더욱 바보스러울 수 밖에 없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도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예수님마저도 죽음의 한계에 갇히게 만드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 맨 먼저 발견한 것은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고 그 위에 앉은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마태복음 28장 5절)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장 5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He is not here. He is risen just as he said.”(마태복음 28장 6절) 천사가 알려준 소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곧바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곧바로 빈 무덤으로 가 빈 수의를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예루살렘에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의 못자국을 만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후일에 심지어 그를 핍박했던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8절).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22절)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맨처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부활하신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고통과 절망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먼저 평강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보여주십니다. 배신했던 제자들에게, 믿음이 무너졌던 제자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이 두려운 제자들에게 다시 제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영적으로 죽은 그들이 다시금 일어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놀라움과 기쁨”의 반전이 일어나시길 원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 이상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26절).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먼저 믿고 죽은 성도님들은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으며, 언젠가 우리도 그들을 뵙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 1-4절)

비록 지금 여기는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강을 이루지만, 억울함과 분통함과 답답함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배하고 있지만, 죽음의 공포가 뼈 속 시리도록 엄습하고 있지만, 정말 생사의 기로 속에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들의 약함과 힘듦을 아시고 친히 어루만져 주시며,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는 지배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다시는 없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지배하여 그들에게 기쁨과 행복의 삶을 보장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줄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한 믿음으로 영광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실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있으시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세상을 보면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너무도 커 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약한 죄성을 핑계삼아 날마다 지면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아직도 무덤을 향해 가는 여제자들처럼 두려움과 근심 가운데 서계십니까? 해지는 저편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앞으로 어찌할꼬 하며 답답해 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뚫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으로 체험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세상의 조롱과 고통과 힘듦 가운데서, 인간이 보여주는 악함과 불의 가운데 흔들리지 말며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부활의 소식을 통해 우리에게도 소망이 언제나 함께 있음을 전하는 기쁨의 소식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요한복음 13장 1-17절 (2014_0406)

4/7/2014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성경본문: 요한복음 13장 1-17절

개인적으로 현존하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 중에 지미 카터 대통령을 좋아합니다. 대통령 재임시는 그저 그런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으나 퇴임 후 보이고 있는 그의 활동과 발언 등은 대단히 성경적이고 가히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인이 북한에 억류되었을 때마다 그들의 인권과 석방을 위해 늘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늘 그는 금권주의와 물신주의를 경계하면서 분배정의와 함께 나눔의 삶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가난과 기아, 전쟁과 지진이 있는 곳마다 그가 함께 있었습니다. 3년 전인 2011년에 아이티에 큰 지진이 나고 온 나라가 깊은 절망 가운데 빠졌을 때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부인과 함께 그곳에 간이 주택을 짓는 해비타트 운동을 벌이는 그의 모습을 방송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미국의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청바지를 입고 팔을 걷어 붙이고 세워진 목재에 못을 박고 집을 지으며 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은퇴 이후의 권위와 편안함을 버리고 낮은 곳에 와서 함께 섬기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는 그런 모습의 원형을 요한복음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통해 우리 모두 진정한 겸손의 섬김이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진정한 겸손은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요한복음에서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까지는 치유와 기적과 선포가 주를 이루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13장부터는 소위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하는 다락방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마지막 세번째로 예루살렘이 입성하신 후에 예수님은 미리 준비된 조용한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맞이하셨습니다. 한 주일 동안 베다니에서부터 성전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하나님 사역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다니다가 최후의 만찬이 될 저녁 식사를 위해 함께 모인 것입니다. 이때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너무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처음 불렀을 때부터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를 앞두고서도 그 모두에 대한 사랑을 그치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힘든 앞날을 미리 안다고 하는 것은 마음 속에 굉장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 가운데 사랑의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끝날까지 그들을 중심으로 아끼고 염려하고 기도하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오늘 저녁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그들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할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모욕과 조롱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알면서 예수님께서는 전혀 표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오면서 굉장히 들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곧 예수님께서 통치하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마음 속에는 그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려는 마음으로 벅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만해도 제자들 사이에 적잖이 소동이 났었습니다. 바로 그들 중에 누가 크냐라는 논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깨서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노라고 교훈을 주셨건만, 심지어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마태복음 20장 26-27절)고 하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건만 저마다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식사 자리에 도착한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루 종일 먼지와 진흙 길을 돌아 다닌터라 지쳐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엔 그들의 발을 씻길 종이 없었습니다. 그들 속에 자리 잡은 자존심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길 엄두를 내지 못한 때 다들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문 앞에 있는 큰 양동이에서 물을 떠다가 항아리에 담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종처럼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한 사람씩 그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이 있는 제자부터 시작해서 닦아주십니다. 마침내 가룟 유다 차례가 왔습니다. 요한은 이미 13장 2절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보고합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를 배반하고자 하는 가룟 유다 마저도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디 던지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 13장 7절) 예수님의 붙잡히심을 보고 뿔뿔이 도망갈 제자들을 아시면서도, 자기를 세 번 부인 할 베드로를 아시면서도, 십자가 아래서 주님을 모른 채 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할 그들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한 것이 바로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후일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이니라.”(요한 일서 4장 7-8절)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그들에게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시고자 했던 이 본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진정한 겸손의 섬김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겸손히 섬기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사랑하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 사랑을 가지고 형제와 자매를 바라보면 우리는 저절로 그들을 위해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힘을 다한 온전한 예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로, 진정한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을 경험할 때 생겨납니다. 본문을 읽다가 한 사람의 돌출적인 행동에 우리는 부딪히게 됩니다. 바로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씻김을 거부합니다.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발을 씻기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종이나 하는 것이지요. 제가 씻겨 드려야 되는데 지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대답에 한 발 더 나아갑니다. “그러면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육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에서 인간의 모습을 띠고 성육신 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더 낮아져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죽음으로 대속하는 데까지 낮아지신 겸손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서로 간에 말 대답 같습니다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모든 정결케 됨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정결케 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씻음(디도서 3장 5절)을 통해서만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죄를 씻어주지 아니하시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죄 씻음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우리 주님의 임재 안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을 체험하고 나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장 12절) 예수님은 더 나아가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역설합니다. 제자들이 아침에 길을 나서기 전 자신들의 몸을 깨끗이 한 것처럼, 그들은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길을 다니다 더러워진 발만 씻으면 될 뿐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쓴 뿌리로 인해 생기는 매일의 자범죄를 고백하고 그것에 대한 죄 사함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장 9절) 주님으로부터 죄사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우리의 신분을 잘 압니다. 내가 높임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고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셔야 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발씻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보게 되고 위치를 깨닫게 되고 우리를 향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서 우리가 겸손함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늘 자신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목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장 9-10절)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가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를 쓴 성공회 사제인 존 뉴튼(John Newton, 1725-1807) 목사님도 동일한 간증을 합니다. 믿음 좋은 어머니와 선장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못된 친구들을 사귀는 바람에 일찍이 영국 해군에서 탈영죄로 아프리카에서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후에 그는 그들을 부리는 노예 상인이 되고 온갖 악행을 일삼습니다. 24살 때 큰 폭풍우 속에서 생명의 위험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습니다. 이후 회심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일생 동안 노예 페지 운동에 헌신하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음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죽기 전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뜻으로 만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보혈과 관계가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겸손을 깨닫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죄사함의 은총이 진정한 겸손의 시발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이와 같이 서로 서로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은 후 조용하게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절) 한치의 낮아짐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제자들에게 그 어느 한 사람만 낮아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모두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친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위치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모두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와 선생이 될텐데 그 때마다 이 본을 받아 제자라면 서로가 먼저 낮아지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그날부터 제자들은 서로가 주님과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길려고 물동이를 차지할려고 힘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후일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리라.”(베드로전서 5장 5절)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서로 겸손히 섬기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진정한 겸손함에서 우러나오는 섬김은 자연 사랑의 봉사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불평이나 힘이 드는 봉사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섬김으로 자기 중심적 신앙에서 벗어나 십자가 중심적인 봉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을 향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진정한 섬김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 안에 아직도 자신을 높이는 자아가 있다면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이 시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이 없는 사랑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낮아지셨듯이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기꺼이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종의 마음으로 기쁘게 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죄사함에 기초한 참된 겸손함이 우리 신앙생활의 큰 힘이 될수 있도록 날마다 영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인 삶 속에서 그것이 적용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 입니까?: 누가복음 10장 30-37절 (2014_0330)

3/30/2014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성경본문: 누가복음 10장 30-37절

2001년 1월 30일에 LA Times에 이런 기사가 하나 올라 왔습니다.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술취한 한 사람이 그만 철로로 떨어졌습니다. 저만치서 그곳을 향해 전철이 달려 옵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때 한 젊은 청년이 철로로 뛰어 내려 그 술취한 사람을 부둥켜 안고 철로에서 그 사람을 끌어내어 위로 올립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이미 다가오는 전철에 치여 죽고 맙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조국인 한국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이 26살난 한국인 이수현 씨였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한 과거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 건축을 공부하러 왔다가 그만 이 사고 현장에 있었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아찔한 상황에서 그는 몸을 던져 술취한 일본인을 구한 것입니다. 그의 희생은 한 사람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한동안 좋지 않았던 일본과 한국의 묵은 감정에도 따뜻한 훈풍의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율법교사 사이에 나오는 대화 속에서 발견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도 출신 성분도 사회적 계층도 모릅니다. 그냥 익명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나름 추정하기로는 그냥 유대인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험한 길이라 중간 중간에 노상 강도와 도적들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도 강도를 만났는데 그가 가진 재물 뿐 아니라 그의 소중한 옷가지까지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엄청 두들겨 맞았습니다. 신음소리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죽게 된 채 길 위에 버려졌습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을 세 사람이 지나게 됩니다. 먼저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한 참 뒤에 레위인이 그를 보게 됩니다.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갑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에게로 다가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와 기름을 그의 상처 위에 붓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자기 키만한 나귀에 얹고는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라고 말합니다. 부비가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 주겠노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납니다. 오늘날의 많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실명이 거론되는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은 역시 끝까지 이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비유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교사의 관심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치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관원의 질문을 연상 시킵니다.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당연히 율법에 정통한 이 사람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근거하여 대답합니다. “(그야 당연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때, 이 사람이 좀 헷갈렸나 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율법에 정통했기에 어떻게 섬기는지 잘 알고 있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부분에서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네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이며 그를 지나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Go and do likewise).”(37절) 예수님의 강조점은 신앙의 사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알고 있는 것을 행함에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야고보서 2장 22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통을 따라 경건과 절제, 그리고 금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소극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개인적인 부분을 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정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마에 종려나무 숯을 가지고 십자가를 그리고 금식하며 참된 경건을 따라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가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따라 가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의비유 가운데 누구와 동일시 할 수 있을까요? 노상에서 강도 만난 사람입니까? 여러분 대부분은 이런 슬픈 역은 맡지 않으려고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입니까? 레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 주막 주인? 성전 제사와 관련된 업무를 맡은 사람이니 여러분은 제사장은 저와 같은 목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어딘지 찜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는 이웃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도 성경 지식이 많아야 하니 장로님이나 권사님 정도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모든 것은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이스라엘의 구원이 늦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들과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오늘날로 치면 타종교나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든지 혹은 동성연애자나 우리가 꺼려하는 사회적 배타성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하 나는 주막 주인이 제일 가깝구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기 보다는 주막 주인이 훨씬 편한 역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막 주인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이웃 사랑을 회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참된 이웃 사랑을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깨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에만 치우쳐 있거나 교회 내에만 치우쳐서 우리 안의 이웃 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웃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가까운 유대인을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절대로 이웃의 범주에 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좀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교인을 넘어서, 같은 그리스도인을 넘어서, 같은 민족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내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가 가는 길에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거리 밖 이웃들에게로 관심을 돌리길 원하십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 없습니다. 진실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압니다. 그들의 슬픔을 압니다. 그러나 많이 외면한 것이 사실입니다. 편견과 이해관계와 신앙에 갇혀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면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에게 연민을 품지 않으셔도 되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온 인류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어느 한 특정 그룹이나 마을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되셔서 빛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들의 가슴 아픈 상처를 만지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는 이방인도 사마리아인도 유대인도 별 구별이 없으셨습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웃은 그저 구원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혹은 밖에 있는 이웃들의 유대인이라는 허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허울을 벗어버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장 1-3절) 우리 주님의 관심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상한 자들, 포로된 자들, 갇힌 자들에게 있었듯이 우리의 이웃 또한 그들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의 마음과 손길에 교회 안 담장을 넘어 교회 밖 이웃들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오늘의 설교의 질문을 한 번 뒤집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상당히 자기 중심적인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이웃이 되고자 합니다. 당연히 그들이 그런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를 진정한 이웃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 혹 우리의 모습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요? 여전히 그들이 느끼기에 거리감이 있고 이질감이 있지는 않을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을 영어로 sympathy 혹은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함께 느낀다. 함께 고통을 느끼며 나눈다라는 말이 담겨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받는 문제 이상으로 그들의 감정과 상황을 동일시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과정이 없다고 하면 이는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육신을 통해 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당당하시고 그 고통을 함께 하셨기에 우리들의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또한 그들의 이웃이 되도록 낮아져서 함께 나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익명으로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가족 여러분! 혹 이웃을 잃어버린지 오래 되시지는 않았나요? 날마다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입술에만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손과 발이 따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관념의 울타리를 넘어서 눈을 들어 우리의 이웃들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며 함께 고통을 나누어 그들의 입술과 마음에서 우리를 진실된 이웃으로 인정해 주기까지 드러나는 유명의 사마리아인이 아닌 익명의 사마리아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힘을 다한 헌신: 마가복음 14장 8-9절 (2014_0323)

3/24/2014

 
힘을 다한 헌신 The Utmost Commitment

성경본문: 마가복음 14장 8-9절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들려도 편안한 집이 있습니다. 오랜 친구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혹은 서로가 멀리 떨어져 오랜만에 전화 한 통화를 해도 서로 간에 가지고 있는 신뢰와 따뜻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친구가 몇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이런 편안한 집이 있었습니다. 늘 애정이 가는 그래서 언제든지 편하게 들려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귀한 친구 같은 가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의 집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등장하는 마리아는 바로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로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자 듣기에 열심이었고(누가복음 10장 39절), 오늘 본문처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9절)고 칭찬을 받은 여인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필그림가족 여러분! 마리아의 어떤 부분이 이런 칭찬과 초대 교회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 됐는지 함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마리아는 비록 여인의 신분이었지만, 홀로 자신의 중심을 주님을 섬기는데 드렸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에게는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데 장애 요소를 한 두 가지는 가지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경제적 형편 때문에, 배우지 못해서, 나이가 많아서, 사회적 체면 때문에… 찾을려고 찾으려면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데 여러가지의 걸림돌이 주변에 많습니다. 이 말은 조금 확대해보면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환경이 장애로 여겨지기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기가 어렵다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으로는 하고 싶은데 지금의 상황과 여건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건이 되질 않는데. 나는 여기 저기 묶여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없는데.’.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자라고 걸림돌이 되고, 형편이 안되어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걸림돌을 하나님께서 디딤돌로 사용하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헌신이 우선순위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도르가가 그러했고, 로마서 끝에 나오는 겐그레아 교회 집사 뵈뵈도 여자였지만, 주님의 사역을 행하는 바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성경은 증명합니다. 마리아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듣기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그저 말씀만 듣고 묵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상념에만 잠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뛰어 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웃들을 사랑했고, 주님의 제자들을 사랑했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오직 그녀만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늘 믿음의 소수가 그 일을 행함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입술로는 모두가 다 아멘 하면서도 정작 늘 믿음의 헌신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여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신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해 가시며 또 다른 헌신을 불러 일으키는 커다란 믿음의 촉매제가 되게 하십니다. 비록 한 어린 아이의 보잘 것 없는 헌신 같지만 이것이 주님의 기도와 선포를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낳았던 것입니다. 1953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지에 장 지오노라는 프랑스 작가의 ‘나무를 심는 사람’(A Man Who Planted Trees)이란 글이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잠시 여러분에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10년대 알프스 산맥에 위지한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지역을 한 젊은이가 방문하게 됩니다. 도시에서 벗어나 잠시 쉴 요양으로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곳은 바람만 심하게 불고 마을도 황폐케 된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 외로운 양치기인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납니다. 50대 중반의 이 양치기는 일찍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이 황량한 골짜기에 와서 한 마리의 개와 더불어 스무마리 남짓한 양을 치며 살아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날마다 그의 가방에 알이 굵고 신실한 도토리를 가져다가 그 황량한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매일 100개씩 심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만났을 때 그 일을 시작한지 3년이 되었는데 자신이 이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고 그 중에서 만 그루의 참나무가 싹이 트고 자라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후에 젊은이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고 전쟁을 겪고 세월이 그럭저럭 10년 정도 지납니다. 다시 찾은 그 마을과 계곡에서 그는 여전히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느새 그 양치기가 심은 참나무와 자작나무들이 어느새 골짜기를 뒤덮기 시작했고, 물이 흐르며 세찬 바람이 어느새 나무들을 거치면서 잦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이 또 지납니다. 이 젊은이도 어느덧 중년이 되고, 이 양치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그 때에 그는 또 한번 이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연스럽게 신이 내린 산림이라며 다시 동네를 이루고 삽니다. 그곳에는 시원한 강물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따뜻함이 흘러 넘칩니다. 그곳에서 그는 95세가 된 그 양치기 노인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천수를 누리며 홀로 그는 작은 나무에서 큰 숲을 이루었는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결과도 바라지 않고 오직 홀로 묵묵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밀알 같은 헌신은 많은 헌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자신이 죽고 주님을 위해 산 사람이 오늘은 비록 한 사람이지만 함께 할 사람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예비해 주시고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 주님의 일과 부흥도 그렇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홀로 하는 헌신이라고, 연약한 헌신이라고 절대로 물러서거나 부끄러워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연역함 가운데 강함을 드러내시고 모자람 가운데 부요함을 창조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작은 헌신 하나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헌신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본문 8절을 영어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She did what she could.” 즉 마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마음껏 하고 싶은데 망설이게 되는 이유가 몇 가지는 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도 동일하게 그런 상황에 여러 번 직면했었던 적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당면한 어려움은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이였습니다. 자신의 집에 찾아온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온 다른 제자들도 다들 익숙하고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 그들에게 정성 어린 식사 대접 만으로도 무리 없이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을 너무도 소중히 여겼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오빠 나사로를 살려준 것도 그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과 소망을 주신 것도 그러하고, 그들을 참 친구처럼, 가족처럼 여겨주신 것도 그러하고… 그래서 마리아는 그들을 사랑했고 더더욱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해서 평생 소중하게 모은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은 화를 내며 비평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마가복음 14장 4절) 주님의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사치이며 ‘낭비’(waste)로 인식되어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나름대로 기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일을 추진하는데 함께하는, 그래도 이해해주고 따라올 것 같은 형제 자매에게서 이러한 오해를 받으면 참 일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간절한 초심마저도 훼손되고 우리의 감정이 심하게 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오해를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조롱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가장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옥합을 깨뜨리고 붓는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병이 든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과자를 굽고 음식을 만들며 그들의 자녀를 위해 라이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가 아껴 선교지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봉사하고 구원의 향내를 드러내는 자그마한 섬김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때론 그 일들을 하기에 우리의 믿음이 너무도 작다라고 하면서 소극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일들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기도 합니다. 꼭 믿음이 우선이고 나중이 봉사이어야 한다는 것보다 봉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입술에만 그치는 헌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제물로 드러나는 헌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요? 바로 그 일들을 행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힘을 다한 헌신을 했습니다. 우리는 적당한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생활도적당하게 그리고 봉사도 적당하게 하는 것이 좋지 너무 지나치면 광신도라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는 힘을 다한 헌신을 하시기 바랍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정말이지 마리아의 편에서 보면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되 그녀의 모든 힘을 쏟아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그녀의 헌신의 중심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고, 그녀의 행한 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지고 기억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동일한 힘을 다한 헌신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음속으로 늘 기도하며 섬기는 러시아의 우태복 선교사님 페이스북에 지난 주 금요일(3월 21일)에 올라 온 글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목은 “밤 중에 찾아온 손님”입니다.

오늘 저녁 처제와 가까이 지내는 한 젊은 부부가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이 부부는 둘 다 미술을 대학에서 전공한 분들인데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네 위 개척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소규모로 미술 학원을 하고 남편은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십니다. 이 부부가 다니는 개척교회는 그의 아내의 언니가 사모님이시라 그들이 자연스럽게 그 교회를 나와 섬기고 있습니다. 다른 개척교회들이 그렇듯 이 교회도 지난 개척 8년 동안 아직 자립을 못해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고비고비마다 자신들의 집을 내어주기도 하고 돈이 필요하면 여기저기 융통하여 어려울 때마다 짐을 져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떠나지 않으려고 교회와 가까운 곳에 학교를 찾다 보니 정규직대신 비정규직을 선택해야 했고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 학교마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자 찾은 직장이 청소 차량을 운전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선생이 아닌 청소 치량을 몰고 자기가 가르치던 학교를 가서 일하게 됩니다. 8년동안 그러면서도 그는 그 개척교회를 떠나지 않고 섬겼습니다. 2년전 어느 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립중고등학교에 미술 선생님을 뽑았습니다. 수십 개의 이력서 중 오직 한 장 만을 뽑는 그 때, 이 선생님이 뽑혔습니다. 그것도 본래 채용하려던 조건과는 전혀 달랐는데도 말입니다. 조건은 여자 그리고 젊은 사람... 이 선생님은 남자였고 거기다가 결혼하여 나이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합격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저녁 식탁 내내 우느라고 식사를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해서... 그 부부의 꿈은 언젠가 선교지에 가서 학교를 설립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몇 주전 그분들이 다니는 개척교회에 선교 간증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부부도 그 예배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펑펑 울었답니다. 자신들도 우릴 위해 헌금을 하고 싶었는데 드릴 돈이 없어 울었답니다. 그 교회를 다녀온 후 며칠이 지나 그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가정이 선교사님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한 그 전날, 며칠째 계속되는 편두통과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당장 내일 내시경과 검사를 하자는 바람에 그날 저녁 식사약속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가정이 바로 이 선생님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이 오늘 저녁 집으로 왔습니다. 저희는 평상시 처제네 가정과 가까이 지내기 때문에 처제네를 만나러 온 줄 알았더니 오늘은 우리를 만나러 왔답니다. 그러면서 내 놓은 선물과 봉투. 남편 왈 선물인 꿀과 커피는 마트에 직접 가서 사고 병과 선물포장은 일일히 만들었다고 합니다. 봉투엔 편지와 10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돈은 그냥 10만원이 아니라 천 만원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은 그들 마음의 전부, 사랑 덩어리입니다. 과부의 엽전 두 닢. 주님의 계산하는 방법은 우리가 드린 액수보다 드리고 내게 남은 것이 얼마인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이 헌신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깊이입니다. 어찌 이 돈을 의미 없이 생각 없이 헛되이 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눈물겨운 헌신들 위에 선교를 세워가시길 기뻐하나 봅니다.

사랑하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필그림 가족 여러분! 이왕 주를 위해 헌신을 다짐한다면 우리는 마리아같이 귀하게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혼자이더라도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의 환경과 여건을 뛰어 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되 힘을 다한 헌신을 하셔서 주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작은 불꽃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헌신 때문에 우리 교회가 부흥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큰 밑거름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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