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할 때에는 늘 후회가 뒤따라 옵니다. 반대로 해야 할 것도 하지 않았을 때 후회가 따라 옵니다. 영적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또 자신을 유혹과 죄로부터 떨쳐 버릴 수 있는 좋은 훈련의 장이었는데 그것을 차버린 듯한 못남에 대해 후회를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야고보 사도가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권면하고 있는 믿음의 실천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번째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제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야고보서 4장 11-12절) 당시 흩어져 있던 초대교회 내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바로 다툼과 분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시기와 분열이 교회 내에 일어났지요. 분열의 모습은 교회 내에 분파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최고의 장애물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3장 1-2절에서 말에 실수가 많은 선생들(교회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한 좋은 대화를 하다가 혹은 토의를 진행하다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대화나 토의가 상대방을 위한 비방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메’라는 헬라어 금지동사를 앞에 붙임으로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11절은 ‘형제들아 절대로 서로 비방하지 말라!’ 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비방하다’로 사용된 단어의 원래 형테는 ‘카탈랄레오’입니다. 비방, 비난, 험담, 욕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하는 형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주 안좋은 말로 그를 깍아내리고 비난하고 잘못됐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이 일이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번은 Youtube를 통해 개그맨이자 MC인 신동엽씨의 작은 일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저랑 동갑인데다가 참 장수하는 개그맨이라 무언가 특별한게 있겠지 하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대화의 기준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웃기고 재미있어도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웃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남을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조차 멀리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직접 자신이 이런 것들의 폐해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비방과 판단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듣게 되고, 본의 아니게 하게 되고. 이상한 일은 그 모든 비방과 판단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저에게 다시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고 입술로 말하면서 또 입술의 실수가 나온 것이지요. 할 때는 정당하고 맞는 것 같았는데, 찝찝함이 남습니다. 영적으로 개운치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곳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장 2-3, 5절) 이것을 알면서도 말의 실수를 하고 그래서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참 아이러니이지요.
야고보 사도는 비방하는 것, 곧 비난하고 험담하고 판단하는 그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 있는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아니라 준행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줄 수도, 영벌을 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오직 주님 만이 그 일의 판단자요 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선다는 말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비난하고 비방하고 판단함으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면서, 판단 기준을 자신에게로 옮기는 불경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야고보가 한번 더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를 비방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는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말을 아끼시면서 우리 입술 가운데서 남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도록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줄 아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2. 두번째로 하지 말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이란 무엇일까요? 13-16절까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야고보서 4장 13-16절) 말씀을 읽고나서 보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로마 제국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옮겨가면서 사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말로 볼 때, 그들에 대해서 좋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며,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기준에서는 이것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쉬운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만해져서 자랑을 하고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별로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당시의 계획과 정당한 경제생활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질타를 받는단 말입니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교묘히 피해갈려는 교만이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 했을 때는 늘 생명과 구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내일 우리가 다시금 호흡을 할지 장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일어나 우리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장 14절) 생명의 한계성과 연약성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먼저 엎드림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아무리 거창하고 잘 짜여진 계획일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민 온 우리들은 이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민 오기 전에 거창한 꿈들을 꾸었습니다. 이민오고 나서 여러가지 일들을 계획했습니다. 그 계획대로 성공하신 분들도 있고, 또 이루지 못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민생활을 제가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정직하게 한번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진행됐노라고 고백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평안과 힘듦이 늘 함께 존재하고 있었고, 고난과 기쁨이 교차해 오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겐 잠언의 말씀처럼 무릎을 치게 만드는 말씀도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 (잠언 16장 9절)
결국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 뜻대로 살아가면서 세상과 벗될려고 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교인들 중에 부유함을 자랑하던 상인들에게서 보여지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허탄한 자랑’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과 믿음으로 살아낸 것을 자랑하기 보다,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우리가 해낸 일들을 자랑하고 거기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대로 반석위에 세운 것들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무너질 허탄한 자랑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믿음의 자랑이 많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장 17절) 우리는 그동안 앞에서 다루었던 시기나 질투, 혹은 그 밑바탕이 되는 비방이나 험담 이런 것들이 되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을 벗하면서 드러낼려고 하는 허탄한 자랑만이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서 사도는 거의 결론적으로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읽고, 설교도 듣고, 성경공부도 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복음의 진리가 쌓이건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우리의 믿음을 따라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이거든 그것을 미루지 말고 당장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부정적인 삶에 혹은 악한 행동에 넘어지기 보다는 우리가 바로 실천해야 할 선한 행위를 하지 않고 그것을 지연시키는 믿음의 지연 행위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을 뒤에서 몰래 험담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형제들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것이 선하고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쑥스러워 하면서 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좋은 일을 지연시킵니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나쁨을 알기에 그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어려움을 보고 바로 도와주는 것이 선한 일임을 알면서도 지연시킵니다. 나중에 해도 되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비단 이런 예만 있을까요? 돌이켜 보면 우리가 배운 수많은 신앙의 원칙들 가운데, 아니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을 우리는 지연시킵니다. 영적인 procrastination이지요. 이런 모습은 우리의 영적인 체력을 상당히 고갈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우선 나부터 어느 정도 세워놓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 놓고,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고 나서 신앙적인 일들을 하겠습니다.” 나에 대해 기준을 맞춰놓고 나면 만족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훈련입니다. 거듭된 실천을 통해 영적인 체력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부터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하겠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위에 있는 허탄한 자랑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을 듣다가 아,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구나 생각이 드시면 바로 믿음을 따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부족함이 보입니다. 연약함도 보입니다. 한계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후회가 되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알고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비방이 그런 것입니다. 세상과 벗하면서 지혜 있는척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계획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이런 것들을 알았으니 우리 함께 지혜롭게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으니, 아니 지금도 만연한 이런 악한 행위들에서 자신을 지키고 말을 절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보다 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인 지연입니다. 선한 일을 보았거나 선한 일이라고 깨달아질 때에는 지체없이 그 일들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귀한 믿음의 지체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1. 첫번째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제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야고보서 4장 11-12절) 당시 흩어져 있던 초대교회 내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바로 다툼과 분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시기와 분열이 교회 내에 일어났지요. 분열의 모습은 교회 내에 분파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최고의 장애물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3장 1-2절에서 말에 실수가 많은 선생들(교회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한 좋은 대화를 하다가 혹은 토의를 진행하다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대화나 토의가 상대방을 위한 비방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메’라는 헬라어 금지동사를 앞에 붙임으로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11절은 ‘형제들아 절대로 서로 비방하지 말라!’ 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비방하다’로 사용된 단어의 원래 형테는 ‘카탈랄레오’입니다. 비방, 비난, 험담, 욕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하는 형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주 안좋은 말로 그를 깍아내리고 비난하고 잘못됐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이 일이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번은 Youtube를 통해 개그맨이자 MC인 신동엽씨의 작은 일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저랑 동갑인데다가 참 장수하는 개그맨이라 무언가 특별한게 있겠지 하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대화의 기준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웃기고 재미있어도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웃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남을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조차 멀리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직접 자신이 이런 것들의 폐해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비방과 판단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듣게 되고, 본의 아니게 하게 되고. 이상한 일은 그 모든 비방과 판단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저에게 다시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고 입술로 말하면서 또 입술의 실수가 나온 것이지요. 할 때는 정당하고 맞는 것 같았는데, 찝찝함이 남습니다. 영적으로 개운치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곳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장 2-3, 5절) 이것을 알면서도 말의 실수를 하고 그래서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참 아이러니이지요.
야고보 사도는 비방하는 것, 곧 비난하고 험담하고 판단하는 그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 있는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아니라 준행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줄 수도, 영벌을 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오직 주님 만이 그 일의 판단자요 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선다는 말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비난하고 비방하고 판단함으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면서, 판단 기준을 자신에게로 옮기는 불경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야고보가 한번 더 질문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를 비방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는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말을 아끼시면서 우리 입술 가운데서 남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도록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줄 아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2. 두번째로 하지 말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이란 무엇일까요? 13-16절까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야고보서 4장 13-16절) 말씀을 읽고나서 보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로마 제국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옮겨가면서 사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말로 볼 때, 그들에 대해서 좋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며,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기준에서는 이것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쉬운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만해져서 자랑을 하고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별로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당시의 계획과 정당한 경제생활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질타를 받는단 말입니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교묘히 피해갈려는 교만이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 했을 때는 늘 생명과 구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내일 우리가 다시금 호흡을 할지 장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일어나 우리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장 14절) 생명의 한계성과 연약성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먼저 엎드림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아무리 거창하고 잘 짜여진 계획일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민 온 우리들은 이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민 오기 전에 거창한 꿈들을 꾸었습니다. 이민오고 나서 여러가지 일들을 계획했습니다. 그 계획대로 성공하신 분들도 있고, 또 이루지 못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민생활을 제가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정직하게 한번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진행됐노라고 고백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평안과 힘듦이 늘 함께 존재하고 있었고, 고난과 기쁨이 교차해 오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겐 잠언의 말씀처럼 무릎을 치게 만드는 말씀도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 (잠언 16장 9절)
결국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기 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 뜻대로 살아가면서 세상과 벗될려고 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교인들 중에 부유함을 자랑하던 상인들에게서 보여지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허탄한 자랑’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과 믿음으로 살아낸 것을 자랑하기 보다,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우리가 해낸 일들을 자랑하고 거기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대로 반석위에 세운 것들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무너질 허탄한 자랑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믿음의 자랑이 많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장 17절) 우리는 그동안 앞에서 다루었던 시기나 질투, 혹은 그 밑바탕이 되는 비방이나 험담 이런 것들이 되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을 벗하면서 드러낼려고 하는 허탄한 자랑만이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서 사도는 거의 결론적으로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읽고, 설교도 듣고, 성경공부도 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복음의 진리가 쌓이건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우리의 믿음을 따라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이거든 그것을 미루지 말고 당장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부정적인 삶에 혹은 악한 행동에 넘어지기 보다는 우리가 바로 실천해야 할 선한 행위를 하지 않고 그것을 지연시키는 믿음의 지연 행위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을 뒤에서 몰래 험담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형제들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것이 선하고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쑥스러워 하면서 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좋은 일을 지연시킵니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나쁨을 알기에 그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어려움을 보고 바로 도와주는 것이 선한 일임을 알면서도 지연시킵니다. 나중에 해도 되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비단 이런 예만 있을까요? 돌이켜 보면 우리가 배운 수많은 신앙의 원칙들 가운데, 아니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을 우리는 지연시킵니다. 영적인 procrastination이지요. 이런 모습은 우리의 영적인 체력을 상당히 고갈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우선 나부터 어느 정도 세워놓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 놓고,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고 나서 신앙적인 일들을 하겠습니다.” 나에 대해 기준을 맞춰놓고 나면 만족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훈련입니다. 거듭된 실천을 통해 영적인 체력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부터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하겠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위에 있는 허탄한 자랑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을 듣다가 아,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구나 생각이 드시면 바로 믿음을 따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부족함이 보입니다. 연약함도 보입니다. 한계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후회가 되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알고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비방이 그런 것입니다. 세상과 벗하면서 지혜 있는척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계획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이런 것들을 알았으니 우리 함께 지혜롭게 나아가셨으면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으니, 아니 지금도 만연한 이런 악한 행위들에서 자신을 지키고 말을 절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보다 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인 지연입니다. 선한 일을 보았거나 선한 일이라고 깨달아질 때에는 지체없이 그 일들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귀한 믿음의 지체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