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 오늘은 이렇게 한번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밝히고, 그런 후에 야고보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올바른 영적생활 5가지가 무엇인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그 주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야고보서 3장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3장의 주요 내용이 교회 지도자들의 절제되지 못한 말 때문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지혜 때문에 초대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4장을 시작하면서 이런 현상의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봅니다.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냐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장 1절) 야고보 사도는 지금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과 다툼의 근원이 바로 정욕에서 부터 나온다고 밝힙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정욕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정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헤도논’이란 명사입니다. 헤도논의 원형인 ‘헤도네’는 1차적으로 우리의 원초적 본능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바를 가르켰습니다. 오감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반응입니다. 미각으로 치면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 정말 먹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어찌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주로 ‘탐욕, 욕심, 쾌락, 정욕’이란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입은 엄청 큰 데, 그것을 통해 담을 수 있는 자루의 끝이 터져 있는 모습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러니 아무리 입으로 먹어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정욕에 사로잡히면 바로 이런 지독한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2절의 결과가 나옵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야고보서 4장 2절)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요즘으로 치면 물질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추구하는 것 앞에 ‘더’라는 말을 붙입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명망… 사실 좋은 꿈을 위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한 댓가로 얻는 결과들은 의미가 있고 마땅히 칭찬받을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 중에 함께 하는 공동체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나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때론 멈출 줄 알고, 때론 배려할 줄 알고, 때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의 욕심 때문에 시기하고 다툽니다. 바로 이런 것들 속에는 심하면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나의 옳음이나 대의명분을 추구하기 보다 오히려 그 본질적인 바탕에는 교묘히 포장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욕심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우리를 그 자리에 엄청 주저앉게 만듭니다. 야고보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야고보서 4장 2-3절) 잠깐만요? 어딘가 익숙한 말씀이지요? 기도회를 할 때마다, 혹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내놓은 말씀이지요?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말씀 속에 어딘가 모순이 보입니다.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얻지 못했다구요? 사실 초대교회 만큼 기도에 간절했던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이 마가의 다락방 그 놀라운 기도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믿음이 위험에 처하고 그들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는 세상의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하지 아니하였다구요? 더 나아가 구했는데 받지 못함이 그들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였기 때문이라구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탐욕에서 나온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제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권사님들이 하는 기도가, 우리 집사님들이 하는 기도가 정욕으로 쓰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이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욕이라고 하는 말을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그 출발이 어디입니까? 바로 창세기에 나온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사탄의 대리자로 묘사된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뱀의 첫 유혹이 무엇입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라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장 4-5절)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생과 창조세계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었는데, 그 소관이 자신들에게로,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지대로 창조의 세계를 펼쳐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려해서 하나님이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세기 3장 6절) 뱀의 은밀한 유혹이 무엇과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그것이 오감에서 비롯된 탐욕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언약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작용을 해야 하는데, 그 열매를 보는 순간 그들 가운데 있는 정욕이 발동한 것입니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을 바라보니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약속의 말씀은 희미해지고, 오히려 나의 정욕이 그것을 누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타먹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줄 알았는데, 그 결과는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고생과 출산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 가운데 드리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정욕의 뿌리, 탐심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앉고자 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불편하여, 하나님 자리에 자신 말고 다른 것을 채워놓는 우상숭배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우리 교인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님들도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성도님들을 위한 기도가 저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대부분 사양치 않습니다. 한번은 어떤 집사님이 자녀들의 진학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다른 목사님께서 이 집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이렇게 응답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봅니다. ” 이 말을 듣고 나서 저에게 와서 고백하십니다. “목사님, 저는요 지금 상황에서 다른 목사님들이 이게 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하면 좋나요?” 저는 그분이 퍽 솔직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정욕으로 쓸려고 기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께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간다는 것이 때론 기약이 없고, 무척이나 추상적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소박한 정욕이라고 표현하면 경박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의 기도의 기대와 어긋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그래서 소박한 정욕이나마 뒤로하고 믿음의 인내를 경주하는 그런 믿음을 결단한다면 이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집사님, 그런 말씀을 듣고 나서 저도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제가 믿는 한가지는 기도하는 부모 밑에 있는 그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집사님의 자녀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벌어진 여러 다툼과 시기들이 실상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었지만, 그들 안에 교묘히 숨겨진 이기적인 동기들과, 내려놓지 못하는 자존심과, 끊임없이 욕망하는 그 탐욕 때문임을 야고보 사도는 밝히고 나서, 정욕으로 비롯된 신앙생활은 결국 영적인 간음과 같다라고 선포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4장 4절) 정욕의 가장 큰 특징이 세상과 벗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또 세상도 섬기고.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철저히 경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14절)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피었다지는 들의 풀꽃과 같음을 인정하면서 천국을 향해 영원한 소망을 두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언젠가 무너질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팬데믹 이후에 보고 있는 신앙의 무너짐이 바로 이런 결과들이겠지요.
이런 모습들을 하나님은 그냥 보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야고보서 4장 5절)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그냥 내버려둬도 될 그런 존재일텐데 그렇게까지 시기하고 질투하신단 말입니까? 바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해서 얻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피값주고 사셨으며, 진리 가운데 날마다 우리를 감찰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입술과 마음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길 원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 아래 서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은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할 때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금 손 내밀어 일으켜 주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야고보서 4장 6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예비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없고, 당신 자리에 끊임없이 앉으려는 이기적인 정욕에 쌓인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전보다 더욱 큰 은혜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요?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그리고 이것을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정욕을 이기고 번성하는 영적인 가르침 다섯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장 7절) ‘복종’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강한 단어입니다. 이유불문하고 명령을 내리는 주체에 대해서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는 오직 한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안에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어영부영 우리 안에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단호하게 그것들을 대적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장 8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씀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뭘 하지 말라는 말을 먼저 듣습니다. 뭘 하지 말라고 하면 자꾸 그것에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믿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정신을 쏟노라면 자동적으로 부정적인 것들이 밀려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 기도는 해도 해도 늘 언제나 모자라다라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습니다.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만나는 시간을, 하나님 가까이 하는 시간을 가장 먼저 두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 드립니다. 그렇게 했을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를 세밀히 보고 계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하심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세번째,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야고보서 4장 8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언제나 적용되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행한 모든 외적인 행동들과 우리 마음에 들어있는 내적 동기들과 소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정직히 섰을 때,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는 회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정욕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회개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네번째,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야고보서 4장 9절) 상한 심령으로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즐겁고, 세상 살이에 만족하는 한 하나님을 찾는 일이 희박해질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삶의 모든 과정들이 순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냈노라고 하면서 더 이상 갈급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장 24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애통해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고, 우리의 정욕대로 살았던,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곧 무너지게 될 우리의 연약한 신앙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이사야 42장 3절)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의 애통함이, 조국을 생각하며 비통함에 젖었던 다니엘의 눈물이 회복될 때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장 10절) 여기서 낮춘다는 말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 동양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겸양지덕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주 앞에서 낮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직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나는 오직 주님 한 분만 의지하고 나아가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듣고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애씁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시기하고 경쟁하고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교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아진 자리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겸손한 자를 주님이 높이십니다. 그렇기에 많은 하나님의 역사는 덜 배워도, 덜 가져도, 덜 강해도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낳았던 것입니다. 기준점이 분명합니다. 주 앞에서. 우리는 주님 때문에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주님 때문에 얼마든지 손해보고, 또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든 다툼과 시기와 혼란은 거의 대부분 정욕으로부터 왔습니다. 정욕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의 깊은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되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시기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무너졌다는 현실적 결과에 체념하지 마시고, 다시한번 우리를 잡아 이끄시는 우리 하나님의 손길을 꽉 잡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지금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 신실하심을 끝까지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영적인 삶은 분명 구별되어지고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요. 성결한 마음을 품고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잃어버렸던 주님의 평강과 만족과 감사가 다시 한번 회복되시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그 주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야고보서 3장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3장의 주요 내용이 교회 지도자들의 절제되지 못한 말 때문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지혜 때문에 초대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4장을 시작하면서 이런 현상의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봅니다.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냐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장 1절) 야고보 사도는 지금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과 다툼의 근원이 바로 정욕에서 부터 나온다고 밝힙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정욕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정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헤도논’이란 명사입니다. 헤도논의 원형인 ‘헤도네’는 1차적으로 우리의 원초적 본능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바를 가르켰습니다. 오감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반응입니다. 미각으로 치면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 정말 먹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어찌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주로 ‘탐욕, 욕심, 쾌락, 정욕’이란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입은 엄청 큰 데, 그것을 통해 담을 수 있는 자루의 끝이 터져 있는 모습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러니 아무리 입으로 먹어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정욕에 사로잡히면 바로 이런 지독한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2절의 결과가 나옵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야고보서 4장 2절)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요즘으로 치면 물질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추구하는 것 앞에 ‘더’라는 말을 붙입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명망… 사실 좋은 꿈을 위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한 댓가로 얻는 결과들은 의미가 있고 마땅히 칭찬받을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 중에 함께 하는 공동체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나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때론 멈출 줄 알고, 때론 배려할 줄 알고, 때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의 욕심 때문에 시기하고 다툽니다. 바로 이런 것들 속에는 심하면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나의 옳음이나 대의명분을 추구하기 보다 오히려 그 본질적인 바탕에는 교묘히 포장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욕심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우리를 그 자리에 엄청 주저앉게 만듭니다. 야고보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야고보서 4장 2-3절) 잠깐만요? 어딘가 익숙한 말씀이지요? 기도회를 할 때마다, 혹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마다 내놓은 말씀이지요?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말씀 속에 어딘가 모순이 보입니다.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얻지 못했다구요? 사실 초대교회 만큼 기도에 간절했던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이 마가의 다락방 그 놀라운 기도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믿음이 위험에 처하고 그들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는 세상의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하지 아니하였다구요? 더 나아가 구했는데 받지 못함이 그들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였기 때문이라구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탐욕에서 나온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제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권사님들이 하는 기도가, 우리 집사님들이 하는 기도가 정욕으로 쓰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이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욕이라고 하는 말을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그 출발이 어디입니까? 바로 창세기에 나온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사탄의 대리자로 묘사된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뱀의 첫 유혹이 무엇입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라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장 4-5절)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생과 창조세계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었는데, 그 소관이 자신들에게로,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지대로 창조의 세계를 펼쳐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려해서 하나님이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세기 3장 6절) 뱀의 은밀한 유혹이 무엇과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그것이 오감에서 비롯된 탐욕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언약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작용을 해야 하는데, 그 열매를 보는 순간 그들 가운데 있는 정욕이 발동한 것입니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을 바라보니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약속의 말씀은 희미해지고, 오히려 나의 정욕이 그것을 누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타먹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줄 알았는데, 그 결과는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고생과 출산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 가운데 드리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정욕의 뿌리, 탐심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앉고자 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불편하여, 하나님 자리에 자신 말고 다른 것을 채워놓는 우상숭배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우리 교인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님들도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성도님들을 위한 기도가 저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대부분 사양치 않습니다. 한번은 어떤 집사님이 자녀들의 진학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다른 목사님께서 이 집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이렇게 응답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봅니다. ” 이 말을 듣고 나서 저에게 와서 고백하십니다. “목사님, 저는요 지금 상황에서 다른 목사님들이 이게 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하면 좋나요?” 저는 그분이 퍽 솔직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정욕으로 쓸려고 기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께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간다는 것이 때론 기약이 없고, 무척이나 추상적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소박한 정욕이라고 표현하면 경박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의 기도의 기대와 어긋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그래서 소박한 정욕이나마 뒤로하고 믿음의 인내를 경주하는 그런 믿음을 결단한다면 이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집사님, 그런 말씀을 듣고 나서 저도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제가 믿는 한가지는 기도하는 부모 밑에 있는 그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집사님의 자녀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벌어진 여러 다툼과 시기들이 실상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었지만, 그들 안에 교묘히 숨겨진 이기적인 동기들과, 내려놓지 못하는 자존심과, 끊임없이 욕망하는 그 탐욕 때문임을 야고보 사도는 밝히고 나서, 정욕으로 비롯된 신앙생활은 결국 영적인 간음과 같다라고 선포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4장 4절) 정욕의 가장 큰 특징이 세상과 벗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또 세상도 섬기고. 그것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철저히 경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14절)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피었다지는 들의 풀꽃과 같음을 인정하면서 천국을 향해 영원한 소망을 두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언젠가 무너질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팬데믹 이후에 보고 있는 신앙의 무너짐이 바로 이런 결과들이겠지요.
이런 모습들을 하나님은 그냥 보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야고보서 4장 5절)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그냥 내버려둬도 될 그런 존재일텐데 그렇게까지 시기하고 질투하신단 말입니까? 바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해서 얻은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피값주고 사셨으며, 진리 가운데 날마다 우리를 감찰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입술과 마음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길 원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 아래 서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은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할 때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금 손 내밀어 일으켜 주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야고보서 4장 6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예비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없고, 당신 자리에 끊임없이 앉으려는 이기적인 정욕에 쌓인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전보다 더욱 큰 은혜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요?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그리고 이것을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정욕을 이기고 번성하는 영적인 가르침 다섯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장 7절) ‘복종’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강한 단어입니다. 이유불문하고 명령을 내리는 주체에 대해서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는 오직 한분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안에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어영부영 우리 안에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단호하게 그것들을 대적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장 8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씀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뭘 하지 말라는 말을 먼저 듣습니다. 뭘 하지 말라고 하면 자꾸 그것에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믿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에 정신을 쏟노라면 자동적으로 부정적인 것들이 밀려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 기도는 해도 해도 늘 언제나 모자라다라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럽습니다.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만나는 시간을, 하나님 가까이 하는 시간을 가장 먼저 두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 드립니다. 그렇게 했을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를 세밀히 보고 계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하심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세번째,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야고보서 4장 8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언제나 적용되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행한 모든 외적인 행동들과 우리 마음에 들어있는 내적 동기들과 소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정직히 섰을 때,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는 회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정욕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회개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네번째,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야고보서 4장 9절) 상한 심령으로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즐겁고, 세상 살이에 만족하는 한 하나님을 찾는 일이 희박해질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삶의 모든 과정들이 순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냈노라고 하면서 더 이상 갈급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태복음 19장 24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애통해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고, 우리의 정욕대로 살았던,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곧 무너지게 될 우리의 연약한 신앙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이사야 42장 3절)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사무엘의 어머니였던 한나의 애통함이, 조국을 생각하며 비통함에 젖었던 다니엘의 눈물이 회복될 때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장 10절) 여기서 낮춘다는 말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 동양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겸양지덕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주 앞에서 낮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직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나는 오직 주님 한 분만 의지하고 나아가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듣고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애씁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시기하고 경쟁하고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교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아진 자리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겸손한 자를 주님이 높이십니다. 그렇기에 많은 하나님의 역사는 덜 배워도, 덜 가져도, 덜 강해도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낳았던 것입니다. 기준점이 분명합니다. 주 앞에서. 우리는 주님 때문에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주님 때문에 얼마든지 손해보고, 또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든 다툼과 시기와 혼란은 거의 대부분 정욕으로부터 왔습니다. 정욕의 뿌리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의 깊은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되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시기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무너졌다는 현실적 결과에 체념하지 마시고, 다시한번 우리를 잡아 이끄시는 우리 하나님의 손길을 꽉 잡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지금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 신실하심을 끝까지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영적인 삶은 분명 구별되어지고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요. 성결한 마음을 품고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잃어버렸던 주님의 평강과 만족과 감사가 다시 한번 회복되시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