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성경본문: 누가복음 10장 30-37절
2001년 1월 30일에 LA Times에 이런 기사가 하나 올라 왔습니다.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술취한 한 사람이 그만 철로로 떨어졌습니다. 저만치서 그곳을 향해 전철이 달려 옵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때 한 젊은 청년이 철로로 뛰어 내려 그 술취한 사람을 부둥켜 안고 철로에서 그 사람을 끌어내어 위로 올립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이미 다가오는 전철에 치여 죽고 맙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조국인 한국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이 26살난 한국인 이수현 씨였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한 과거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 건축을 공부하러 왔다가 그만 이 사고 현장에 있었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아찔한 상황에서 그는 몸을 던져 술취한 일본인을 구한 것입니다. 그의 희생은 한 사람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한동안 좋지 않았던 일본과 한국의 묵은 감정에도 따뜻한 훈풍의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율법교사 사이에 나오는 대화 속에서 발견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도 출신 성분도 사회적 계층도 모릅니다. 그냥 익명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나름 추정하기로는 그냥 유대인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험한 길이라 중간 중간에 노상 강도와 도적들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도 강도를 만났는데 그가 가진 재물 뿐 아니라 그의 소중한 옷가지까지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엄청 두들겨 맞았습니다. 신음소리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죽게 된 채 길 위에 버려졌습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을 세 사람이 지나게 됩니다. 먼저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한 참 뒤에 레위인이 그를 보게 됩니다.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갑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에게로 다가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와 기름을 그의 상처 위에 붓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자기 키만한 나귀에 얹고는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라고 말합니다. 부비가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 주겠노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납니다. 오늘날의 많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실명이 거론되는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은 역시 끝까지 이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비유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교사의 관심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치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관원의 질문을 연상 시킵니다.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당연히 율법에 정통한 이 사람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근거하여 대답합니다. “(그야 당연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때, 이 사람이 좀 헷갈렸나 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율법에 정통했기에 어떻게 섬기는지 잘 알고 있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부분에서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네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이며 그를 지나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Go and do likewise).”(37절) 예수님의 강조점은 신앙의 사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알고 있는 것을 행함에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야고보서 2장 22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통을 따라 경건과 절제, 그리고 금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소극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개인적인 부분을 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정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마에 종려나무 숯을 가지고 십자가를 그리고 금식하며 참된 경건을 따라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가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따라 가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의비유 가운데 누구와 동일시 할 수 있을까요? 노상에서 강도 만난 사람입니까? 여러분 대부분은 이런 슬픈 역은 맡지 않으려고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입니까? 레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 주막 주인? 성전 제사와 관련된 업무를 맡은 사람이니 여러분은 제사장은 저와 같은 목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어딘지 찜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는 이웃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도 성경 지식이 많아야 하니 장로님이나 권사님 정도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모든 것은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이스라엘의 구원이 늦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들과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오늘날로 치면 타종교나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든지 혹은 동성연애자나 우리가 꺼려하는 사회적 배타성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하 나는 주막 주인이 제일 가깝구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기 보다는 주막 주인이 훨씬 편한 역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막 주인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이웃 사랑을 회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참된 이웃 사랑을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깨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에만 치우쳐 있거나 교회 내에만 치우쳐서 우리 안의 이웃 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웃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가까운 유대인을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절대로 이웃의 범주에 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좀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교인을 넘어서, 같은 그리스도인을 넘어서, 같은 민족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내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가 가는 길에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거리 밖 이웃들에게로 관심을 돌리길 원하십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 없습니다. 진실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압니다. 그들의 슬픔을 압니다. 그러나 많이 외면한 것이 사실입니다. 편견과 이해관계와 신앙에 갇혀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면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에게 연민을 품지 않으셔도 되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온 인류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어느 한 특정 그룹이나 마을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되셔서 빛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들의 가슴 아픈 상처를 만지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는 이방인도 사마리아인도 유대인도 별 구별이 없으셨습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웃은 그저 구원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혹은 밖에 있는 이웃들의 유대인이라는 허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허울을 벗어버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장 1-3절) 우리 주님의 관심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상한 자들, 포로된 자들, 갇힌 자들에게 있었듯이 우리의 이웃 또한 그들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의 마음과 손길에 교회 안 담장을 넘어 교회 밖 이웃들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오늘의 설교의 질문을 한 번 뒤집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상당히 자기 중심적인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이웃이 되고자 합니다. 당연히 그들이 그런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를 진정한 이웃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 혹 우리의 모습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요? 여전히 그들이 느끼기에 거리감이 있고 이질감이 있지는 않을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을 영어로 sympathy 혹은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함께 느낀다. 함께 고통을 느끼며 나눈다라는 말이 담겨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받는 문제 이상으로 그들의 감정과 상황을 동일시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과정이 없다고 하면 이는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육신을 통해 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당당하시고 그 고통을 함께 하셨기에 우리들의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또한 그들의 이웃이 되도록 낮아져서 함께 나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익명으로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가족 여러분! 혹 이웃을 잃어버린지 오래 되시지는 않았나요? 날마다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입술에만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손과 발이 따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관념의 울타리를 넘어서 눈을 들어 우리의 이웃들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며 함께 고통을 나누어 그들의 입술과 마음에서 우리를 진실된 이웃으로 인정해 주기까지 드러나는 유명의 사마리아인이 아닌 익명의 사마리아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본문: 누가복음 10장 30-37절
2001년 1월 30일에 LA Times에 이런 기사가 하나 올라 왔습니다.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술취한 한 사람이 그만 철로로 떨어졌습니다. 저만치서 그곳을 향해 전철이 달려 옵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때 한 젊은 청년이 철로로 뛰어 내려 그 술취한 사람을 부둥켜 안고 철로에서 그 사람을 끌어내어 위로 올립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이미 다가오는 전철에 치여 죽고 맙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조국인 한국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이 26살난 한국인 이수현 씨였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한 과거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 건축을 공부하러 왔다가 그만 이 사고 현장에 있었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아찔한 상황에서 그는 몸을 던져 술취한 일본인을 구한 것입니다. 그의 희생은 한 사람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한동안 좋지 않았던 일본과 한국의 묵은 감정에도 따뜻한 훈풍의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율법교사 사이에 나오는 대화 속에서 발견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도 출신 성분도 사회적 계층도 모릅니다. 그냥 익명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나름 추정하기로는 그냥 유대인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험한 길이라 중간 중간에 노상 강도와 도적들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람도 강도를 만났는데 그가 가진 재물 뿐 아니라 그의 소중한 옷가지까지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엄청 두들겨 맞았습니다. 신음소리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죽게 된 채 길 위에 버려졌습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을 세 사람이 지나게 됩니다. 먼저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한 참 뒤에 레위인이 그를 보게 됩니다.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갑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에게로 다가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와 기름을 그의 상처 위에 붓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자기 키만한 나귀에 얹고는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라고 말합니다. 부비가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 주겠노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납니다. 오늘날의 많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실명이 거론되는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은 역시 끝까지 이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비유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교사의 관심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치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관원의 질문을 연상 시킵니다.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당연히 율법에 정통한 이 사람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 근거하여 대답합니다. “(그야 당연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때, 이 사람이 좀 헷갈렸나 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율법에 정통했기에 어떻게 섬기는지 잘 알고 있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부분에서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네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이며 그를 지나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Go and do likewise).”(37절) 예수님의 강조점은 신앙의 사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알고 있는 것을 행함에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야고보서 2장 22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우리는 사순절을 지나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통을 따라 경건과 절제, 그리고 금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소극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개인적인 부분을 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정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마에 종려나무 숯을 가지고 십자가를 그리고 금식하며 참된 경건을 따라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가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따라 가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문의비유 가운데 누구와 동일시 할 수 있을까요? 노상에서 강도 만난 사람입니까? 여러분 대부분은 이런 슬픈 역은 맡지 않으려고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입니까? 레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 주막 주인? 성전 제사와 관련된 업무를 맡은 사람이니 여러분은 제사장은 저와 같은 목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어딘지 찜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는 이웃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도 성경 지식이 많아야 하니 장로님이나 권사님 정도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모든 것은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이스라엘의 구원이 늦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들과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은 오늘날로 치면 타종교나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든지 혹은 동성연애자나 우리가 꺼려하는 사회적 배타성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하 나는 주막 주인이 제일 가깝구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기 보다는 주막 주인이 훨씬 편한 역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막 주인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이웃 사랑을 회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참된 이웃 사랑을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깨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에만 치우쳐 있거나 교회 내에만 치우쳐서 우리 안의 이웃 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웃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가까운 유대인을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절대로 이웃의 범주에 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좀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교인을 넘어서, 같은 그리스도인을 넘어서, 같은 민족을 넘어서길 원하십니다.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내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가 가는 길에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거리 밖 이웃들에게로 관심을 돌리길 원하십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 없습니다. 진실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압니다. 그들의 슬픔을 압니다. 그러나 많이 외면한 것이 사실입니다. 편견과 이해관계와 신앙에 갇혀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필요를 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면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에게 연민을 품지 않으셔도 되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온 인류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어느 한 특정 그룹이나 마을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되셔서 빛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오셨습니다. 그들의 가슴 아픈 상처를 만지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는 이방인도 사마리아인도 유대인도 별 구별이 없으셨습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웃은 그저 구원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혹은 밖에 있는 이웃들의 유대인이라는 허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허울을 벗어버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장 1-3절) 우리 주님의 관심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상한 자들, 포로된 자들, 갇힌 자들에게 있었듯이 우리의 이웃 또한 그들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의 마음과 손길에 교회 안 담장을 넘어 교회 밖 이웃들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오늘의 설교의 질문을 한 번 뒤집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상당히 자기 중심적인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면서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이웃이 되고자 합니다. 당연히 그들이 그런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를 진정한 이웃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 혹 우리의 모습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요? 여전히 그들이 느끼기에 거리감이 있고 이질감이 있지는 않을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본받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을 영어로 sympathy 혹은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함께 느낀다. 함께 고통을 느끼며 나눈다라는 말이 담겨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받는 문제 이상으로 그들의 감정과 상황을 동일시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과정이 없다고 하면 이는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육신을 통해 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당당하시고 그 고통을 함께 하셨기에 우리들의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또한 그들의 이웃이 되도록 낮아져서 함께 나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익명으로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가족 여러분! 혹 이웃을 잃어버린지 오래 되시지는 않았나요? 날마다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입술에만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손과 발이 따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위해 우리가 노력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관념의 울타리를 넘어서 눈을 들어 우리의 이웃들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며 함께 고통을 나누어 그들의 입술과 마음에서 우리를 진실된 이웃으로 인정해 주기까지 드러나는 유명의 사마리아인이 아닌 익명의 사마리아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