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마가복음 14장 8-9절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들려도 편안한 집이 있습니다. 오랜 친구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혹은 서로가 멀리 떨어져 오랜만에 전화 한 통화를 해도 서로 간에 가지고 있는 신뢰와 따뜻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친구가 몇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이런 편안한 집이 있었습니다. 늘 애정이 가는 그래서 언제든지 편하게 들려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귀한 친구 같은 가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의 집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등장하는 마리아는 바로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로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자 듣기에 열심이었고(누가복음 10장 39절), 오늘 본문처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9절)고 칭찬을 받은 여인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필그림가족 여러분! 마리아의 어떤 부분이 이런 칭찬과 초대 교회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 됐는지 함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마리아는 비록 여인의 신분이었지만, 홀로 자신의 중심을 주님을 섬기는데 드렸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에게는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데 장애 요소를 한 두 가지는 가지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경제적 형편 때문에, 배우지 못해서, 나이가 많아서, 사회적 체면 때문에… 찾을려고 찾으려면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데 여러가지의 걸림돌이 주변에 많습니다. 이 말은 조금 확대해보면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환경이 장애로 여겨지기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기가 어렵다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으로는 하고 싶은데 지금의 상황과 여건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건이 되질 않는데. 나는 여기 저기 묶여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없는데.’.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자라고 걸림돌이 되고, 형편이 안되어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걸림돌을 하나님께서 디딤돌로 사용하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헌신이 우선순위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도르가가 그러했고, 로마서 끝에 나오는 겐그레아 교회 집사 뵈뵈도 여자였지만, 주님의 사역을 행하는 바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성경은 증명합니다. 마리아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듣기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그저 말씀만 듣고 묵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상념에만 잠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뛰어 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웃들을 사랑했고, 주님의 제자들을 사랑했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오직 그녀만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늘 믿음의 소수가 그 일을 행함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입술로는 모두가 다 아멘 하면서도 정작 늘 믿음의 헌신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여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신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해 가시며 또 다른 헌신을 불러 일으키는 커다란 믿음의 촉매제가 되게 하십니다. 비록 한 어린 아이의 보잘 것 없는 헌신 같지만 이것이 주님의 기도와 선포를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낳았던 것입니다. 1953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지에 장 지오노라는 프랑스 작가의 ‘나무를 심는 사람’(A Man Who Planted Trees)이란 글이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잠시 여러분에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10년대 알프스 산맥에 위지한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지역을 한 젊은이가 방문하게 됩니다. 도시에서 벗어나 잠시 쉴 요양으로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곳은 바람만 심하게 불고 마을도 황폐케 된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 외로운 양치기인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납니다. 50대 중반의 이 양치기는 일찍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이 황량한 골짜기에 와서 한 마리의 개와 더불어 스무마리 남짓한 양을 치며 살아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날마다 그의 가방에 알이 굵고 신실한 도토리를 가져다가 그 황량한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매일 100개씩 심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만났을 때 그 일을 시작한지 3년이 되었는데 자신이 이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고 그 중에서 만 그루의 참나무가 싹이 트고 자라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후에 젊은이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고 전쟁을 겪고 세월이 그럭저럭 10년 정도 지납니다. 다시 찾은 그 마을과 계곡에서 그는 여전히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느새 그 양치기가 심은 참나무와 자작나무들이 어느새 골짜기를 뒤덮기 시작했고, 물이 흐르며 세찬 바람이 어느새 나무들을 거치면서 잦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이 또 지납니다. 이 젊은이도 어느덧 중년이 되고, 이 양치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그 때에 그는 또 한번 이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연스럽게 신이 내린 산림이라며 다시 동네를 이루고 삽니다. 그곳에는 시원한 강물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따뜻함이 흘러 넘칩니다. 그곳에서 그는 95세가 된 그 양치기 노인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천수를 누리며 홀로 그는 작은 나무에서 큰 숲을 이루었는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결과도 바라지 않고 오직 홀로 묵묵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밀알 같은 헌신은 많은 헌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자신이 죽고 주님을 위해 산 사람이 오늘은 비록 한 사람이지만 함께 할 사람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예비해 주시고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 주님의 일과 부흥도 그렇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홀로 하는 헌신이라고, 연약한 헌신이라고 절대로 물러서거나 부끄러워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연역함 가운데 강함을 드러내시고 모자람 가운데 부요함을 창조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작은 헌신 하나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헌신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본문 8절을 영어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She did what she could.” 즉 마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마음껏 하고 싶은데 망설이게 되는 이유가 몇 가지는 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도 동일하게 그런 상황에 여러 번 직면했었던 적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당면한 어려움은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이였습니다. 자신의 집에 찾아온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온 다른 제자들도 다들 익숙하고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 그들에게 정성 어린 식사 대접 만으로도 무리 없이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을 너무도 소중히 여겼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오빠 나사로를 살려준 것도 그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과 소망을 주신 것도 그러하고, 그들을 참 친구처럼, 가족처럼 여겨주신 것도 그러하고… 그래서 마리아는 그들을 사랑했고 더더욱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해서 평생 소중하게 모은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은 화를 내며 비평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마가복음 14장 4절) 주님의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사치이며 ‘낭비’(waste)로 인식되어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나름대로 기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일을 추진하는데 함께하는, 그래도 이해해주고 따라올 것 같은 형제 자매에게서 이러한 오해를 받으면 참 일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간절한 초심마저도 훼손되고 우리의 감정이 심하게 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오해를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조롱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가장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옥합을 깨뜨리고 붓는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병이 든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과자를 굽고 음식을 만들며 그들의 자녀를 위해 라이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가 아껴 선교지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봉사하고 구원의 향내를 드러내는 자그마한 섬김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때론 그 일들을 하기에 우리의 믿음이 너무도 작다라고 하면서 소극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일들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기도 합니다. 꼭 믿음이 우선이고 나중이 봉사이어야 한다는 것보다 봉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입술에만 그치는 헌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제물로 드러나는 헌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요? 바로 그 일들을 행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힘을 다한 헌신을 했습니다. 우리는 적당한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생활도적당하게 그리고 봉사도 적당하게 하는 것이 좋지 너무 지나치면 광신도라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는 힘을 다한 헌신을 하시기 바랍니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정말이지 마리아의 편에서 보면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되 그녀의 모든 힘을 쏟아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그녀의 헌신의 중심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고, 그녀의 행한 것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지고 기억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동일한 힘을 다한 헌신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음속으로 늘 기도하며 섬기는 러시아의 우태복 선교사님 페이스북에 지난 주 금요일(3월 21일)에 올라 온 글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목은 “밤 중에 찾아온 손님”입니다.
오늘 저녁 처제와 가까이 지내는 한 젊은 부부가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이 부부는 둘 다 미술을 대학에서 전공한 분들인데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네 위 개척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내는 집에서 소규모로 미술 학원을 하고 남편은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십니다. 이 부부가 다니는 개척교회는 그의 아내의 언니가 사모님이시라 그들이 자연스럽게 그 교회를 나와 섬기고 있습니다. 다른 개척교회들이 그렇듯 이 교회도 지난 개척 8년 동안 아직 자립을 못해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고비고비마다 자신들의 집을 내어주기도 하고 돈이 필요하면 여기저기 융통하여 어려울 때마다 짐을 져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떠나지 않으려고 교회와 가까운 곳에 학교를 찾다 보니 정규직대신 비정규직을 선택해야 했고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 학교마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자 찾은 직장이 청소 차량을 운전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선생이 아닌 청소 치량을 몰고 자기가 가르치던 학교를 가서 일하게 됩니다. 8년동안 그러면서도 그는 그 개척교회를 떠나지 않고 섬겼습니다. 2년전 어느 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립중고등학교에 미술 선생님을 뽑았습니다. 수십 개의 이력서 중 오직 한 장 만을 뽑는 그 때, 이 선생님이 뽑혔습니다. 그것도 본래 채용하려던 조건과는 전혀 달랐는데도 말입니다. 조건은 여자 그리고 젊은 사람... 이 선생님은 남자였고 거기다가 결혼하여 나이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합격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저녁 식탁 내내 우느라고 식사를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해서... 그 부부의 꿈은 언젠가 선교지에 가서 학교를 설립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몇 주전 그분들이 다니는 개척교회에 선교 간증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부부도 그 예배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펑펑 울었답니다. 자신들도 우릴 위해 헌금을 하고 싶었는데 드릴 돈이 없어 울었답니다. 그 교회를 다녀온 후 며칠이 지나 그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가정이 선교사님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한 그 전날, 며칠째 계속되는 편두통과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당장 내일 내시경과 검사를 하자는 바람에 그날 저녁 식사약속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가정이 바로 이 선생님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이 오늘 저녁 집으로 왔습니다. 저희는 평상시 처제네 가정과 가까이 지내기 때문에 처제네를 만나러 온 줄 알았더니 오늘은 우리를 만나러 왔답니다. 그러면서 내 놓은 선물과 봉투. 남편 왈 선물인 꿀과 커피는 마트에 직접 가서 사고 병과 선물포장은 일일히 만들었다고 합니다. 봉투엔 편지와 10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돈은 그냥 10만원이 아니라 천 만원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은 그들 마음의 전부, 사랑 덩어리입니다. 과부의 엽전 두 닢. 주님의 계산하는 방법은 우리가 드린 액수보다 드리고 내게 남은 것이 얼마인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이 헌신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깊이입니다. 어찌 이 돈을 의미 없이 생각 없이 헛되이 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눈물겨운 헌신들 위에 선교를 세워가시길 기뻐하나 봅니다.
사랑하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필그림 가족 여러분! 이왕 주를 위해 헌신을 다짐한다면 우리는 마리아같이 귀하게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혼자이더라도 썩어지는 밀알처럼 자신의 환경과 여건을 뛰어 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되 힘을 다한 헌신을 하셔서 주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작은 불꽃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헌신 때문에 우리 교회가 부흥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큰 밑거름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