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믿음 (Doubt and Belief)
성경본문: 요한복음 20장 24~29절
오늘은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스트로벨은 미주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법학으로 석사학위를 땄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 자신의 적성과 관심을 따라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사실 위주로 파헤쳐 볼 수 있는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의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설명된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이런 확신은 그의 고등학생 시절에 한 화학 실험과도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지구의 원초적 상태에서 생물이 생성되는 과정에 관한 실험을 하게 됩니다. 질소와 탄소 및 산소가 전기장과 반응하여 초기 생명체의 근원이 되는 아미노산이 생성되는 것을 보고 그는 더 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결혼을 하고 동일하게 무신론자였던 아내가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집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정 생활과 자녀에 대한 이후의 일들이 자신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진행되자 마음 속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인가? 성경은 사실인가?’ 정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중립적인 견해에서 믿을 만한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심을 품고 1981년부터 약 2년간 과학 및 의학 분야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본인이 가졌던 의심을 검증해 나갑니다. 마침내 이 의심에 대한 검증이 끝났을 때 놀라우리만치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순전하게 모든 것이 믿어지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개는 한두 번은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의심하게 됩니다. 순전하게 믿어지는 신앙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의심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그런 의심에 대해서는 절대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 이런 신앙의 의심에 대해서 살펴 보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도마라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나게 됩니다. 갈릴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도마는 다른 제자들처럼 별로 두드러진 제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도마는 늘 상이한 태도를 보여주는 그의 이중적 성격을 의미하는 ‘디두모(쌍둥이)’라는 별칭처럼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한 제자입니다. 무조건 믿기보다 사리를 따져보고 본인이 이해해야만 믿는 그런 철저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그런 의구심이 풀리면 그 다음에는 다른 제자들 보다 용감하게 신앙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성경에 보여집니다. (참고, 요한복음 11:16) 이런 도마의 모습은 점점 과학과 이성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좀처럼 어떤 일이나 사실을 믿으려고 하기 보다는 증거와 객관적 자료들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한복음 20장 24절). 그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증거합니다. 엠마오로 갔다가 돌아온 두 제자가 증언합니다. 심지어는 부활절 새벽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제자들로 부터도 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런 그가 보인 반응은 한 마디로 ‘믿을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람이 죽었으면 끝났지 부활은 또 뭔가라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의 말에 짙은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면서 “나는 주님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네”(25절)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견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만약에 여러분이 도마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마도 도마처럼 많은 분들이 세상에 대한 상식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도마가 이런 정직한 의심을 하게 된 배경을 성경을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참고, 누가복음 24장 13~35절)은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과 한참 동안 동행을 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것을 자세히 설명 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져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부활이 실재이고 상식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아직 머물러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주님은 본인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지상 대명령의 사명까지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부인할 수 없는 실재로 나타나셨고 그들과 오랜 동안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도마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하다고 하면 묻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소외감을 포장한 채 믿어지지 않는 의구심을 덮어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표출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주님에 신앙 체험을 소원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신앙에 대한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오든지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형편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합리적인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경우들일 때가 많습니다. 정말 신앙 좋은 분들이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오는 결과들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실망스러운 것들이거나, 혹은 우리의 귀한 믿음과 정반대로 우리의 삶이 진행될 때 우리는 신앙의 회의를 품게 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부터 의심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서 신앙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의심의 안개 속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1장 19절) 이런 의심의 안개 속에 여러분들은 묻혀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마는 자신이 이해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의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곳이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다른 제자들과의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홀로 숨지 않고, 자신의 의심의 연약함을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드러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의심과 회의를 갖게 될 때, 그 때마다 우리도 또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찾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확대하면 자신의 신앙적 욕구에 대해서 반드시 표출하되 교회 안에서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보다 주님을 체험한 형제 자매들이 많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도마를 비롯한 다른 모든 제자들이 모인 곳에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도마의 의심 때문에 다른 제자들의 확신과 평화가 날라가 버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강이 있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마를 보며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참 이상합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전혀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조건부 신앙이 잘못된 것을 책망하십니다. 사람이 갖는 의심은 오히려 중립성을 가지지만, 그 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시험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들으신바 없는데 도마 앞에 나타나셔서 그의 의심대로 직접 자신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불신앙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모든 형편과 처지와 속내를 잘 알지 못하지만, 비록 주님이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형편과 처지와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도마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고는 바로 지금 그에게 그의 의심대로 본인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도마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성경은 도마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에 손가락을 직접 넣어보고 확신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눈 앞에서 봤으니 됐어요, 뭘 그런 걸 가지고…”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도마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뜻밖에도 신앙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 다른 사람들의 주님이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신앙의 반전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확신 없이 다른 형제 자매와 함께, 아니 다른 가족들의 눈치도 있고 그러하니 마음 속에 드는 의심을 그냥 묻어버리고, 심지어는 비록 잘못된 태도일지라고 도마처럼 주님 앞에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려고 하는 적극성도 띠지 못한 채 그냥 묻어가는 신앙이라면 이 시간 다시 한번 여러분 자신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추상적인 주님, 멀리 떨어져 있는 주님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서 계신 주님의 그 십자가 흔적을 체험하셔서 죽은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라 산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스트로벨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과연 그의 의심이 바뀌었을까요? 이성과 과학이 철옹성이 되어 복음에 대해서는 장벽을 쌓고 살았던 그가,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철저한 무신론자요 진화론 신봉자가 없을 만큼 단호했던 그가 다양한 과학적 학문들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의 인터뷰들을 통해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의심의 안개가 걷히면서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이 없다’라고 외치던 그의 입술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심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지적 영적 탐구가 오히려 큰 신앙의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는 윌로우 크릭 교회와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들을 위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그가 품은 의심이 신앙의 확신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된 것입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도마가 주님을 의심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나중에 인도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AD 72년 경에 인도의 말리바라는 곳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만이 전승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 내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의 사역과 사명을 지탱했음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성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매체도 그러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보스톤이 바로 지성의 메카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베어있는 의심과 시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지적인 의심이 영성과 만남으로 인해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그것이 비록 나이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2007년에 대한민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딸을 통해 회심하면서 남긴 말처럼 말입니다.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후일에 베드로가 초대교회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전서 1장 8절)라고 선포한 것처럼, 그런 믿음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20장 24~29절
오늘은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스트로벨은 미주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법학으로 석사학위를 땄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 자신의 적성과 관심을 따라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사실 위주로 파헤쳐 볼 수 있는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의 신문기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설명된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이런 확신은 그의 고등학생 시절에 한 화학 실험과도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지구의 원초적 상태에서 생물이 생성되는 과정에 관한 실험을 하게 됩니다. 질소와 탄소 및 산소가 전기장과 반응하여 초기 생명체의 근원이 되는 아미노산이 생성되는 것을 보고 그는 더 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결혼을 하고 동일하게 무신론자였던 아내가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집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정 생활과 자녀에 대한 이후의 일들이 자신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진행되자 마음 속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인가? 성경은 사실인가?’ 정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중립적인 견해에서 믿을 만한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심을 품고 1981년부터 약 2년간 과학 및 의학 분야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본인이 가졌던 의심을 검증해 나갑니다. 마침내 이 의심에 대한 검증이 끝났을 때 놀라우리만치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순전하게 모든 것이 믿어지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개는 한두 번은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의심하게 됩니다. 순전하게 믿어지는 신앙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의심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주님은 그런 의심에 대해서는 절대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 이런 신앙의 의심에 대해서 살펴 보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도마라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나게 됩니다. 갈릴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도마는 다른 제자들처럼 별로 두드러진 제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도마는 늘 상이한 태도를 보여주는 그의 이중적 성격을 의미하는 ‘디두모(쌍둥이)’라는 별칭처럼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한 제자입니다. 무조건 믿기보다 사리를 따져보고 본인이 이해해야만 믿는 그런 철저한 합리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그런 의구심이 풀리면 그 다음에는 다른 제자들 보다 용감하게 신앙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성경에 보여집니다. (참고, 요한복음 11:16) 이런 도마의 모습은 점점 과학과 이성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좀처럼 어떤 일이나 사실을 믿으려고 하기 보다는 증거와 객관적 자료들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요한복음 20장 24절). 그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증거합니다. 엠마오로 갔다가 돌아온 두 제자가 증언합니다. 심지어는 부활절 새벽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제자들로 부터도 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런 그가 보인 반응은 한 마디로 ‘믿을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람이 죽었으면 끝났지 부활은 또 뭔가라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의 말에 짙은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면서 “나는 주님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네”(25절)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견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만약에 여러분이 도마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마도 도마처럼 많은 분들이 세상에 대한 상식으로 말미암아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도마가 이런 정직한 의심을 하게 된 배경을 성경을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참고, 누가복음 24장 13~35절)은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과 한참 동안 동행을 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것을 자세히 설명 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져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부활이 실재이고 상식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아직 머물러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주님은 본인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지상 대명령의 사명까지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부인할 수 없는 실재로 나타나셨고 그들과 오랜 동안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도마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하다고 하면 묻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소외감을 포장한 채 믿어지지 않는 의구심을 덮어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표출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주님에 신앙 체험을 소원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신앙에 대한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오든지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형편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합리적인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경우들일 때가 많습니다. 정말 신앙 좋은 분들이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오는 결과들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실망스러운 것들이거나, 혹은 우리의 귀한 믿음과 정반대로 우리의 삶이 진행될 때 우리는 신앙의 회의를 품게 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부터 의심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서 신앙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의심의 안개 속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1장 19절) 이런 의심의 안개 속에 여러분들은 묻혀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마는 자신이 이해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의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곳이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던 다른 제자들과의 자리였다는 점입니다. 홀로 숨지 않고, 자신의 의심의 연약함을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드러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의심과 회의를 갖게 될 때, 그 때마다 우리도 또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찾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확대하면 자신의 신앙적 욕구에 대해서 반드시 표출하되 교회 안에서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보다 주님을 체험한 형제 자매들이 많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도마를 비롯한 다른 모든 제자들이 모인 곳에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도마의 의심 때문에 다른 제자들의 확신과 평화가 날라가 버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강이 있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마를 보며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참 이상합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전혀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조건부 신앙이 잘못된 것을 책망하십니다. 사람이 갖는 의심은 오히려 중립성을 가지지만, 그 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시험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들으신바 없는데 도마 앞에 나타나셔서 그의 의심대로 직접 자신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불신앙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모든 형편과 처지와 속내를 잘 알지 못하지만, 비록 주님이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형편과 처지와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도마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시고는 바로 지금 그에게 그의 의심대로 본인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도마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성경은 도마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에 손가락을 직접 넣어보고 확신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눈 앞에서 봤으니 됐어요, 뭘 그런 걸 가지고…”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도마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뜻밖에도 신앙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 다른 사람들의 주님이 바로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신앙의 반전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확신 없이 다른 형제 자매와 함께, 아니 다른 가족들의 눈치도 있고 그러하니 마음 속에 드는 의심을 그냥 묻어버리고, 심지어는 비록 잘못된 태도일지라고 도마처럼 주님 앞에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려고 하는 적극성도 띠지 못한 채 그냥 묻어가는 신앙이라면 이 시간 다시 한번 여러분 자신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추상적인 주님, 멀리 떨어져 있는 주님이 아니라 바로 내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서 계신 주님의 그 십자가 흔적을 체험하셔서 죽은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라 산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스트로벨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과연 그의 의심이 바뀌었을까요? 이성과 과학이 철옹성이 되어 복음에 대해서는 장벽을 쌓고 살았던 그가,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철저한 무신론자요 진화론 신봉자가 없을 만큼 단호했던 그가 다양한 과학적 학문들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의 인터뷰들을 통해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의심의 안개가 걷히면서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이 없다’라고 외치던 그의 입술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심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지적 영적 탐구가 오히려 큰 신앙의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는 윌로우 크릭 교회와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들을 위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그가 품은 의심이 신앙의 확신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된 것입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도마가 주님을 의심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나중에 인도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AD 72년 경에 인도의 말리바라는 곳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만이 전승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 내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의 사역과 사명을 지탱했음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성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매체도 그러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보스톤이 바로 지성의 메카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베어있는 의심과 시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지적인 의심이 영성과 만남으로 인해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그것이 비록 나이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2007년에 대한민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딸을 통해 회심하면서 남긴 말처럼 말입니다.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후일에 베드로가 초대교회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전서 1장 8절)라고 선포한 것처럼, 그런 믿음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