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 필그림교회 KOREAN PILGRIM CHURCH OF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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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5장 44절 (2014_0316)

3/17/2014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성경본문: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만남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리 저리 얽히고 섥히며, 때론 사랑하다가 때론 죽도록 미워하는 지경에도 이릅니다. 좋은 만남이고 좋은 관계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만남이고 얽혀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서로 원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예수님의 말씀 중 제일 실천하기 힘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되는데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떨어져 있거나 혹은 생각이 나지 않으면 괜찮은데 막상 보면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믿지 않는 분들을 만나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예수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화하는 상대자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저에게 20년전 30년전 가슴속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바로 엊그제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상처 입어서, 누구 때문에 돈을 떼어서, 누구 때문에 심한 배신감을 입어서… 이유는 다양하지만 한결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원수의 대상은 친구이든 가족이든 같은 교인이든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고, 저마다의 가슴 속에 상대방의 잘못을 아직도 깊이 새기고 지워지지 않는 기록처럼 보관하며 살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늘 의심과 손해의 구름이 그들을 둘러싸고 원망과 부정의 목소리가 그들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아파오고 저며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모습은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인 삶에서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잠잠히 놔두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적 가르침(impractical idealistic teaching)일까요? 정의를 부르짖고 공평함을 주장하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종상해법이 훨씬 맞아 보입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공평하다고는 할테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한들 우리는 몇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선은 그렇게 시행했을 때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도 상대방에게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살점 한 파운드를, 이빨 하나를 피 한방울 흘림 없이, 그리고 다른 기관의 손상 없이 떼어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보복의 속성이 꼭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곳에 사용되는 말이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에게 이만큼 손해를 받았으니, 모욕을 이만큼 받았으니 나는 갑절 이상으로 되갚아주겠다는 심리입니다. 이빨 하나가 아니라 이빨 전체를, 눈 하나가 아니라 얼굴 전체를,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 가족 전체를, 도시 하나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망하도록 하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꼭 동종상해만을 구별했던 구약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법이 상당히 인간적인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실적인 부분과 상당히 동떨어져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것도 시험입니다. 원래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믿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면 시험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우리 자신의 죄된 본성이 자꾸 충돌하기 때문에 시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우리의 본능을 따라 시험에 져서 신앙의 불구자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하지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장 46-47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이 예수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를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의 피를 따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실천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그런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가 어렵다 말고, 힘들다 말고 주님께서 능력 주시는 대로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고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삶 속에 직접 적용해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누구인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말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은 잡은 생선을 구워다가 가져다가 베드로를 먹이고 그 유명한 대화를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치라.”(요한복음 21장 15절) 지금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베드로는 한때 천국 열쇠를 받을 만큼 큰 신앙고백도 하긴 했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심지어 십자가를 질 때도 자신을 부인하고 철저히 침묵했던 베드로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고 그 배신감 때문에 다시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제자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주님의 양떼를 칠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히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을 뵐 낯도, 그럴 자격도 전혀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마치 ‘너는 나를 배신하였지만, 너를 원수처럼 여기지 아니하고 용서하노라. 너를 여전히 사랑하노라. 그리므로 네 양떼를 네게 맡기노라.”는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이미지를 받았지만, 우리 안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장 23-24절) 그리고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에베소서 2장 14-17절)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전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만큼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사랑 아래 있는 자격 없는 우리의 모습을 먼저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조지 허버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나 고통을 감추고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용서하지 않아 과거 속에 여전히 묻혀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멈춰 선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용서를 통해 우리가 과거로부터의 자유함을 누리고 우리에게 예비된 미래의 축복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용서하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는 원망도 우리에겐 큰 짐입니다. 용서는 어렵지만, 일단 하게 되면 그 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빚진 자의 모습(마태복음 18장 21-35절)과 같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현재 시가로 한 50만불 정도 되는)를 빚진 한 사람이 도저히 빚을 갚을 길 없었습니다. 임금은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다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이 사람이 울면서 다 갚겠노라고 했을 때, 임금의 마음 속에 갑자기 그 사람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에게 진 빚은 제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한 5000불 정도되는)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 빚을 당장 갚으라고 아우성입니다. 친구가 꼭 갚겠노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임금의 신하들이 보았습니다. 임금이 다시 그를 붙잡고 책망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임금은 화가 나서 다시 탕감한 빚을 다 갚도록 그를 감옥에 넘겨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구요?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의 대상에 따라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합니다. 우리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정의를 핑계 삼아 우리는 용서를 잊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장 35절)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은 암송합니다. 주기도문 중에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먼저 용서의 책임을 부각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용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처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를 실천하실 수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도 대단한 신앙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믿음은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고, 모욕과 수치를 주었던,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이유 없이 깎아 내리고 늘 하는 일에 반대했던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되갚아 주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 44절은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믿음의 아버지를 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살아 생전 보물처럼 노트를 쓰곤 하셨습니다. 다른 일엔 일체 비밀이 없으셨지만 오직 노트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되어서야 비로서 그는 노트를 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힌 것은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했던 아들은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 있구나." 그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노트를 아세요?" 어머니는 그 노트를 들고 한 장 한 장씩 넘기면서 추억에 잠기시는 듯 했습니다. "이건 너희 아버지의 기도 노트란다. 매일 밤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하셨지." 청년은 다시 낯선 이름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신 분들이란다. 아버지는 매일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리셨지." 생각만 해도 힘이 드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기회입니다. 다음으로는 원수를 위해 숯불을 쌓는 실제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부터 21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 하시느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가 배고플 때 오히려 먹이고 마시게 하는 행위는 원수의 양심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집안에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화로에 숯불이 꼭 필요한 데, 하필이면 원수가 숯불을 달라고 찾아왔을 때 그 화로에 가득 숯불을 채워 줌으로 인해 그것을 머리에 이고 가는 그가 가는 동안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거림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의 친구로 만들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꾸 상식과 본능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따라 이런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중에는 아직도 여러분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과거의 원수들 때문에, 혹은 아주 가까이 있는 원수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 아래 있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용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때늦은 회한이 아닌 말이 나왔을 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 머리에 숯불을 쌓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들보와 티: 마태복음 7장 1-5절 (2014_0309)

3/9/2014

 
들보와 티 A Plank and A Speck

성경본문: 마태복음 7장 1-5절

사순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 세상적인 많은 부분에서 절제하고 믿음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이 이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모습들이 밝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살아온 걸음걸이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부분보다 우리의 뜻대로 행한 일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도록 우리에게 철저한 회개를 말씀하실 때, 마음이 더 무겁기만 합니다. 지난 주에 어떤 분이 ‘회개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답은 쉽습니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태복음 3장 8절)를 맺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한다는 의미는 예수님께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행위를 바로 아뢰고 용서를 구한 후 바로 주님 안에서 달라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들은 여전히 선입관념으로 우리를 바라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삭개오처럼 남을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 바로 주님께 아뢰고 그 토색한 부분을 피해자들에게 변상하고 다시는 그러한 삶을 되풀이 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혹은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면 주님께 아뢰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러한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과 격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실천이 어렵고 당사자에게 말을 떼기가 어려운 것이지 회개는 어렵지 않습니다. 용기가 들지 않거든 예수님께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혹 자신에게서 자신에게만 적용될 회개가 필요한 부분은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는 한 회개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우리의 신앙 양심이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한 심령의 통회는 기뻐하시지만 외식은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절기를 따라 가장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자비를 행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금식하는 것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 마저도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외식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남들 앞에서 구제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낯을 흐려가며 금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이 바리새인들에게 저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상을 다 받았고, 하늘에서 받을 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볼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5절까지 내용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말씀이 누가복음 6장 37절과 38절에, 그리고 41절과 4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7장 5절과 누가복음 6장 42절에 공통적으로 ‘외식하는 자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외식, 즉 겉으로만 그러한 체 하는 것이 이제는 우리의 언어 생활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산 위에 둘러앉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첫째, ‘비판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조그마한 비판부터 큰 비판까지 비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뉴스를 들어도 그렇고 신문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잘됐다 아니면 이것은 못됐다’ 꼭 평가를 해야만 시원하고, 소위 여론이라고 하는 것에 너무도 민감한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병원을 다녀와도, 자동차를 고치고 와도, 물건을 사고 와도 설문 조사를 합니다. 서비스가 어땠는가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도 비판에 익숙한 데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단순하게 2절에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대답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속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언제 어느 상황에 있든지 우리의 생각이 늘 공격적으로 남을 비판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긍정과 칭찬의 비판이 아니라 부정적인 때론 인신공격적인 비판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나온 ‘비판’이란 단어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판단’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고, 새번역에서는 ‘심판’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본문이 나오는 누가복음에서는 ‘비판’에서 ‘정죄’라는 단어로 발전되는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안에는 남을 비판할 때 칭찬과 격려가 따르는 긍정의 비판보다는 판단과 정죄가 따르는 심판의 비판이 훨씬 더 많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 안에서도 옆 사람을 보면서 맨 먼저 마음 속으로 흘러 나오는 내용이 ‘왜 저분은 저럴까? 옷 차림은 또 뭐람? 오늘도 애들 자랑만 하네. 혼자 신앙생활 다 하는 척하네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혼자 판단하고 혼자 정죄하고 이미 심판까지 다 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비판은 결국 우리 안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이런 비판들은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무섭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심판’이라는 단어가 바로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태복음 13장 38-39절)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했던 판단과 정죄로 동일하게 우리를 비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 사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남에게서 발견되는 단점과 흠들은 많은 부분 우리들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되어지는 단점과 흠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런 비판을 할 때 사실은 그것이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려고 하는 비판을 통해, 판단과 정죄를 통해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두번째 교훈은 바로 우리 안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들보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본문에서 나오는 들보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의 중심이 되는 큰 서까래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하는 것은 그 큰 통나무에서 벗겨 떨어지는 자그마한 나무 껍질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보면 들보와 티는 너무도 대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들보는 다 잘보입니다. 그러나 티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은 아주 애를 써서 남의 티를 아주 주의해서 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에게서 발견한 티를 들보처럼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하게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조법을 썼으니 남의 티보다는 우리의 들보가 훨씬 나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 된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나쁜 것이 내 안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의 티를 빼고자 하는 노력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눈의 들보를 볼 수 없을까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 안에 선한 하나님의 이미지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빛과 진리 가운데 있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의 영향 아래 우리는 어둠 속에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있는 연약성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어떤 비판의 출발점이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서 있지 않나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어떤 마을의 제빵업자가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했는데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농장의 버터 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버터 공장 주인을 고발하였습니다. 그 버터 공장 주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사가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소?" 라고 하자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안다는 거요?"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1파운드 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럼 그 1파운드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오는거요?"라고 하자 그 낙농공장 주인은 고소인을 가리키며 "우리는 늘 저 제빵업자 한테서 사다 먹습니다." 결국 버터의 양이 줄어든 이유는 제빵업자의 빵이 줄었기 때문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문제의 시작은 바로 나인데 자꾸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발 그것 좀 먼저 보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이 주는 세번째 교훈은 내 눈의 들보를 빼고 그런 후에 남의 티를 빼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 눈의 들보는 스스로 볼 수 없기에 절대로 자신이 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과실은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신앙 양심에 비추어, 말씀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앞의 문제를 계속해서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나의 모든 들보를 빼낸 후에는 우리는 또 다른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절의 말씀처럼 궁극적으로  ‘비판하지 말라’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5절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밝아진 후에 분명 형제의 과실을 보고 그것을 교정해 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한 편지에서도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형제들에 대해서 그들을 사랑으로 지적하고 권면하여 깨우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을 위한 비판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부분과 관련하여 김동호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을 통해 남기신 내용(2013년 6월 29일 묵상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5절까지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자기비판을 전혀 할 줄 모르고 남 비판만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고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남의 눈의 티를 지적하고 제거하는 것을 비판이라고 생각할 때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5절 이하 말씀의 결론은 비판을 조심스럽게 잘 하라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수술을 하는 의사에게서 동일하게 배울 수가 있다. 비판을 수술과 동일시해서 본다고 했을 때, 의사는 먼저 수술해야만 하는 암과 같은 조직이 발견되면 덮어두지 않는다. 사정 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그러니 무조건 비판하면 안 된다고 섣부르게 성경을 들이대면 안 된다. 둘째, 자기 전공영역에서만 칼을 든다. 정형외가 의사가 암수술을 하지 않고 일반외과 의사가 정형외과 수술을 하지 않는다. 의사는 수술의 성공률을 높이려고 엄청나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훈련한다. 우리도 누구와 무엇을 비판하려면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기가 잘 아는 부분에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의사는 수술하기 전 환자를 철저히 검사한다. 그래서 환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선 후에 메스를 든다. 의사는 환자를 감으로 수술하지 않는다. 짐작으로 수술하지 않는다. 추측으로 수술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환자(비판의 대상자)의 열 가지 중 한 두개만 알고 그냥 막 비판하는 경우가 많디. 넷째, 수술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병든 부분만 잘라내고 할 수 있는 한 건강한 조직은 건들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비판을 의사처럼 하지 않고 도축사처럼 하는 경우가 많다. 수술할 부분(비판할 부분)을 발견하여 흥분하면 눈에 보이는게 없어지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건들이지 않아도 되는 부분, 한 걸음 더 나아가 건들여서는 안 되는 부분까지 너무 넓고 많은 부분을 수술하여 결국 환자를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수술의 마지막은 잘라냄이 아니다. 꿰맴이다…. 우리는 비판할 때 잘라냄만 생각하고 꿰맴을 잊을 때가 많다. 나도 한가닥 하는 칼잽이가 아닐까? 다음에 수술을 해야 할 때가 생기면 나부터 오늘 이 글 한 번 자세히 읽어보고 조심스럽게 칼을 들어야겠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지키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본문 말씀을 여러분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하여 우리 입술의 외식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이며 저마다의 들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마다 우리 안의 들보를 주님의 이름으로 빼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에 형제의 티를 빼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한 그대로 비판과 정죄를 받아 심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연습을 행하시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 먼저 거룩함을 회복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다른 형제 자매들을 더욱 긍휼히 여기고 비판보다 이해의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 마가복음 1장 14-15절 (2014_0302)

3/2/2014

 
예수님의 첫 선포 The First Proclamation of Jesus

성경본문: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작년 11월에 Harris Interactive라는 곳에서 미국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신앙과 관련해서 가장 간단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기적을 믿습니까? 당신은 천국을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 종교적 질문을 17가지로 설정해 놓고 성별, 지역별, 정치적 성향 별로 물어본 것입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항목이 하나 들어 왔습니다. 바로 천국(heaven, 혹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믿는다 68%, 믿지 않는다 16%, 그리고 잘 모르겠다 15% 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74%의 수치와는 조금은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했던 2005, 2007, 2009년 조사들에서는 천국에 대한 믿음이 75%로 나타납니다. 점점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신앙이 퇴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천국에 대해서 듣고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관심도 믿음도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점 자본과 상업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현재, 그리고 지금 여기에만 관심을 가질 뿐, 내세, 곧 죽음 이후에는 별 관심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보단 “오늘을 즐기라”는 호라시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BC 8)의 싯구 중의 하나인 Carpe Diem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천국에 대한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그려보고자 열심을 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을 꽉 붙잡고 신실하게 산다면 Carpe Diem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을 앞두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번째 선포에 대해서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항상 처음 하는 말과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셨던 그 선포는 예수님의 사역 방향과 관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를 함께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의 모든 비밀과 기쁨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의 노력들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 받는 곳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들고 찾아갑니다. 그곳에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웁니다. 정의가 무너진 곳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자 노력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험적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이 모습과 열정은 너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기를 소망하면서 뿌렸던 수많은 선배 신앙인들의 고귀한 희생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장 6-8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니이다.”(시편 102편 26-27절)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과 주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들은 중단되지 말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함께 누리길 원하셨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단편에 불과할 뿐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좀더 넓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노력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고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목숨을 바치고 헌신하는 노력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이 세상을 넘어선,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이런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다시 한번 그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도 한 평생 멋지게 살다가 죽었고, 그 집 대문 앞에서 한 평생 거지로 살았던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보니 부자는 음부(지옥)에, 그리고 나사로는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보여 줍니다. 음부는 지극한 고통이 떠나지 않고 영원한 고민 가운데 사는 곳이고,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안식과 기쁨 가운데 사는 곳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죽음 이후에 심판의 결과에 따라 우리가 영원히 경험하게 될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한 계시록은 우리 인류의 종말과 더불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어느 구절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영원토록 존재한다고 기록한 곳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번째로 선포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공생애의 시작도 그리고 그 마지막도 끝까지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영원토록 미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단히 전파하셨고, 그리고 현세의 권세 잡은 자들이 끊임없이 예수님께 정치적 메시야로서 현세적 정체성을 물었을 때마다 예수님은 그것을 뛰어 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통해 구원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이 통치하는 영원한 천국에 대해서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 히브리어로는 ‘슈브’라고 합니다. 두 단어의 말 뜻을 풀어 종합해보면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살던 우리가 깊이 후회하고 반성하고 돌이켜서 다시금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늘 범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보다 정욕과 탐욕에 사로 잡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 즉 죄를 범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범죄의 성향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소극적, 적극적 행위를 포함합니다. 죄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장 2절)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상태로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안에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길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 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입술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실천하겠다고 했을 때도 역시 꼭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 없는 그리스도인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안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힘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참된 안식과 기쁨이 없다면 바로 이것에서 막힌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마음, 이것은 남들은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 자신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도 그 부분이 나옵니다. 부자가 왜 지옥에 갔고 나사로가 왜 천국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경은 단편적으로 부자에게는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줍니다.(누가복음 16장 30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의 전부이고 최고이십니다. 혹 돈을 더 사랑했다면, 명예를 더 사랑했다면, 건강을 더 사랑했다면, 혹은 가족을 더 사랑했다면, 남과의 관계를 더 사랑했다면, 골프를 더 사랑했다면, 드라마를 더 사랑했다면, 학위를 더 사랑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다 위에 있는 이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 개인들이 숨기거나 드러내기 싫어하는 죄를 회개하기 원하십니다. 욕심, 거짓말, 나태, 음욕, 성냄, 미움, 질투, 함부로 하는 말 등 이런 죄들은 나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쉽게 발견 됩니다. 언제나 반복적으로 짓는 죄이며, 이제는 하도 많이 고백해서 설마 이런 것까지 하나님이 들으실까 라는 의심이 들어 우리의 회개를 머뭇거리게 합니다. 때로는 그것들이 너무 무거워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대언자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사탄은 자꾸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무디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양심의 찔림은 주되 그 죄의 주변부에서 떠나지 않고 맴맴 돌게 만들 것입니다. 죄가 깊어지면 우리 안에 참된 안식이 사라지고 기쁨도 없습니다. 예배하는 기쁨도, 찬양하는 기쁨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그 기쁨도 없어집니다. 때론 우리가 너무 기도를 많이 하고 찬양이 충만하다고 해서 느껴지는 자신감 속에 숨겨져 있는 교만도 회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겸손함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남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과 대상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지은 죄들까지 낱낱이 아뢰어 즉시 즉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체하면 할수록 우리의 신앙 양심은 무디어지고 성령님이 떠나시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형식으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내려 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고통 당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나 때문에 십자가 지신 것입니다. 머리의 가시관의 고통이, 채찍으로 찢기신 살과 창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모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장 8절). 주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깨끗하게 지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장 18절)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죄 없다 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회개의 열매에 이를 때만 우리는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혼인잔치에 더러운 죄악의 옷을 입고 참여하기보다 죄 사함의 흰 옷을 입고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는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실 회개는 말만 다를 뿐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를 이루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 즉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라는 총주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4장 6절)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결국 복음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주신 사랑의 선물을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게 하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기쁨에 참여하도록 우리의 모든 의지와 마음을 위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흔히들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신속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반응 중에 하나가 ‘나중에 믿겠다’라는 말입니다. “은퇴하고 나서 종교생활 삼아 믿겠습니다. 집안 제사를 다 물려주고 나서 홀가분할 때 믿겠습니다. 지금 사업을 정리하고 믿겠습니다. 이번 학위만 마치면 믿겠습니다. 이번 승진만 끝나면 믿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당신의 그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기를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나 봅니다. 유명한 부흥사요 복음 전도자였던 무디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목회하실 때입니다. 청년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하던 중에 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이따금씩 성경공부 반에는 참석하면서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을 계속 이런 저런 핑계로 연기합니다. 서부에 내려가서 금광을 찾아 부자가 되고 성공하면 그때 가서 예수님을 잘 믿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 청년이 무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서부로 떠난다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다시 한번 권면했지만 아연 정색을 하고 돌아서서 나가 버립니다. 그 순간 무디 목사님은 뭔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자정이 넘는 시간에 그 청년의 약혼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 청년이 야간 특급 열차를 타고 내려가던 중 기차의 탈선 사고로 이 청년이 크게 다쳐 지금 응급실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급히 달려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청년에게 귀에 입을 대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목사님,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애석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언 27장 1절) 정말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비밀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주님의 첫 선포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혹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이 시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세례 받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 전까지 40일 동안 금식과 절제를 이루면서 주님의 말씀과 생애를 묵상했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도 마찬가지로 한 주일에 최소한 한끼 내지는 하루 금식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의 관심을 알고 그 마음을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에 있었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 대한 많은 관심을 절제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더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던 지난 날의 모든 죄들을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 놓고 낱낱이 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즉시 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한 양심을 지키고, 성령 충만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혜의 사순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가보, 믿음의 유산: 창세기 22:1-14 (2014_0223)

2/23/2014

 
남전도회 헌신예배 설교: 반봉현 목사

믿음의 가보, 믿음의 유산

성경본문: 창세기 22:1-14

이 시간 부족한 저에게 남전도회 헌신예배 설교자로 불러 주신 박도술 목사님과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6년 여름에 보스톤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갈 때에 저와 집사람이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여기 보스톤에 다시 올 수 있을까란 질문에 우리는 글쎄 아이들이 보스톤에 대학을 오지 않는한 여기 보스톤에 안 오겠지 라는 대화를 나누면서 갔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오게 되면서 우리가 살면서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적을 만들어서는 안되겠구나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남전도회 헌신예배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어느 성경본문이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께 적합한 말씀인가를 약 2주 동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도 잘 아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수없이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였던 본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독자 아들인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 즉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설교를 준비해 가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들 이삭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신앙의 일세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고향을 떠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향하여 가는 여정 가운데서 수없이 많은 인생 역정과 어려움을 겪었던 신앙의 일세대 아니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이민 일세대의 인물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들 이삭으로 말하자면 자기와 자기 부인이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나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낳은 아들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한국적인 정서가 남아 있으니까 좀 이해가 쉬우시겠죠.  한번 생각해 보시죠. 노년에 낳은 자식을 더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던 그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여러분은 쉽게 떠오를 수 있으시겠죠? 이런 애틋하고 아련한 심정이 자식이었던 이삭을 향하여 왜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에는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더군다나 아들을 제물을 칼로 사방으로 각을 내고 이 제물을 불로 태우는 번제물로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크게 두가지의 점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오늘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아닌 오히려 이삭에게 촛점을 두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7절을 함께 보십시다.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드릴 번제 제물에 대한 준비물은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중요한 번제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어린 이삭이 번제에 대해 그리고 번제 제사를 드릴 때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라는 점입니다. 이삭은 번제 제물이 없음에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는 이삭이 과거에 수없이 많이 번제 제사를 드렸던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아 왔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리고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들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결박을 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삭의 믿음을 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이가 100세가 넘은 나이였습니다. 아들 이삭이 7절 말씀처럼 분별있는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조금씩 세상을 알아나가는 나이가 된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도 약 110이상의 나이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면 나이가 들대로 들은 노년의 할아버지가 한창 자라나는 아이의 힘을 당해 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9절과 10절을 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만약 이삭이 자기의 생명이 위급함을 알았거나 아니면 다른 마음을 품어 자기의 생명을 보존코자 했다면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에 대해 대들거나 아니면 아버지 아브라함과 논쟁을 하거나 도망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거부하거나 대항하거나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는 그대로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삭에게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 즉 8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다시 말하면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구약 창세기에 보면 이삭이라는 존재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과 손자인 야곱과 요셉에 가려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 야곱 그리고 요셉처럼 화려하고 엄청난 인생 역정을 경험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삶을 그의 자손 대대로 이어져 가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이삭은 한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게 된 배경에는 이런 이삭의 순종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아갔지만 대항하지 않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에 자기 자신을 내려 놓았던 이삭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순종을 한 이삭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삭이 판 우물들은 실패하지 않고 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물을 판 곳에서 물이 나왔다는 점은 농경사회를 살았던 우리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사막지역인 그리고 척박한 땅을 가졌던 중동 사람들에게는 우물이 가기는 그 중요성은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가 아닙니까? 판 우물들마다 물이 나오는 그 축복을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은 어디서부터 나왔을까요? 한창 때에 나이가 들 대로 들은 아버지로부터 번제 제물처럼 손이 묶이고, 제단 위에 올려 짐을 당한 그런 이삭이 모습 그리고 그의 순종이 이런 축복을 받게 된 배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졌던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 즉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이삭에게도 동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 보다는 아들 이삭의 믿음이 더욱 큼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거스렸던 아브라함의 최대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그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던 대표적인 아브라함의 행동은 바로 이삭의 이복형이었던 이스마엘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아브라함의 실수와 잘못이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된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한 실수를 하고 또 하나님께 죄만 짓는 존재가 아닙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의도와 역사에 항상 브레이크를 걸고 창조자되신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존재들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의 대가인 아브라함도 이런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이런 인간의 죄성과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가 있습니까?  번제 제물로 자기의 아들을 칼로 각을 떠서 사지를 짤라야하는 아버지의 심정과 이런 번제 제물로 자기 자신이 드려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결박을 당하고 나무 제단위에 올려짐을 당하는 아들의 심정과 아픔을 오늘날 교회에서 증거 되어지고 있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들을 죽여야 하고 또 불에 태워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 그리고 분명히 죽어야 하고 불에 태워져야만 할 그런 존재가 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친 아버지로부터 결박을 당하고 제단 나무 위에 올려짐을 당하는 그런 이삭의 심정을 여러분은 이같은 상황이 여러분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떤 어려움과 곤란에 처해 있을 때 과연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제물을 준비하시리라는 믿음의 고백을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실의 상황에서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목회자인 저도 아브라함처럼 쉽게 그런 행동으로 옮겨질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향하여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절규와 사랑 그리고 십자가에서 아무런 죄도 없지만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헌신이 오늘날의 교회에 있습니까?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내가 계획했던 그 무엇인가가 우리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면 그것이 여호와 이레의 사건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우리에게 아브라함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인간의 짧은 판단과 생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으로 움직임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여호와 이레의 신앙,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신앙고백이 없으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하고, 내가 아무리 매달리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참된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 이삭을 죽이고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는 그 아버지의 심정 그리고 아무런 대항도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결박을 당하고 제단 나무 위에 올림을 당하여야 했던 그 아들 이삭의 모습을 통하여 저는 죄된 인간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보내 주셔야 했던 그 아버지 하나님의 절규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을 하여야만 했던 그 아들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이삭을 믿음의 통로를 이어나가는데 있어 한 중요한 축으로 만들었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고백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그렇게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특히 이삭에게는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창세기 26장 12절과 13절을 보십시요.“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는지 창세기 26장 14절을 보면 이방 민족인 블레셋 민족이 그를 시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이삭이 가졌던 여호와 이레의 믿음의 결과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우리에게 있어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요즈음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필요조건으로 믿고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충분조건으로 믿는 잘못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 필요가 우리에게 있어질 때 비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잘 되어 사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것이 다입니까? 여호와 이레의 믿음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축복만을 강조하고 그 외의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그런 신앙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있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이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에 그들이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가지지 않고는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여호와 이레의 신앙, 즉 하나님이 친히 자기 자신을 위해 준비하시리라라는 신앙의 고백이 없는 그런 믿음의 생활은 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하나의 교양생활을 하는 것이지 진정한 믿음새활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십니까?   보통 우리는 드러난 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고 이 사람 믿음 좋구나 아니면 나쁘구나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 다음으로 여러분의 모습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것은 목사로서 설교를 하는 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반봉현 목사야 너도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믿음을 가져라! 이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그리고 저의 설교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과 믿음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늦둥이를 칼로 토막을 내어 죽여야 하는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번제제물로 드려져야 하는 그런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여호와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믿음과 신앙고백으로 극복해 나간다면 거기에 비로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믿음의 결단이 없는 교회생활, 믿음생활은 언젠가 자기 공력이 나오고 이 교회는 내 것인데라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그리고 이런 믿음의 모습과 결단이 없는 교회는 비록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이것은 일개 하나의 교양생활을 하는 인간이 만든 단체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 그리고 세계사가 증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의 유산을 더욱 더 남길 수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처럼 너무나 소중한 자기의 아들까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던 그 모습 그리고 이삭처럼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옴을 알더라도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그런 순종이 있을 때에야 비로서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친해 준비하시리라라는 하나님의 액션이 나올 수 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믿음의 유산이 이어져 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믿음과 헌신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내 자신이 믿음의 유산과 가보를 이어가는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달자가 되려면 내 자신을 헌신하지 안으면 않됩니다. 내가 가진 제일 소중한 것, 내 자신까지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 아니 더 나아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십니다. 마치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식된 우리를 위해 헌신하시고 고생하셨듯이 우리도 교회를 위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 될 때에: 역대하 20장 20-23절 (2014_0215)

2/15/2014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As They Began to Sing and Praise)

성경본문: 역대하 20장 20-23절

오래 전에 일입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찾아와서 이런 고민을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우리 딸네를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참 안 풀리네요. 속만 썩이고 어디까지 참고 또 도와 주어야 할지… 다른 자식들은 다 괜찮고 잘 사는데 아직도 괜히 사서 고생하고 있는 딸을 보면 속이 상하네요. 기도 좀 해주세요” 나이가 지긋이 든, 어떻게 보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사신 것 같은 할머니가 저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눈가에 어린 오래된 슬픔의 흔적들이 얼마나 딸네 집 때문에 고민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씨름했는지 보여줍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바꿔 주실 거예요. 할머니께서 염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이기게 해 주실 거예요.”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쉽사리 달라지지 않는 현재의 모습과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믿음의 간구와 현실의 괴리 가운데 아주 오랫동안 남몰래 힘들어하고 괴로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 뜻에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비껴가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면 더더욱 힘이 듭니다. 버겁습니다. 그냥 주저 않고 싶고 때론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다시금 자비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그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왜 쉽사리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더더욱 하나님께 매어 달릴까요? 우리의 고집인가요? 아니면 습관에 매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금 내려놓는다고 뭐 달라질게 있나 하는 관조인가요?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혈통과는 전혀 다른 영의 혈통이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눈 앞의 현실과 환경이 우리를 가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보잘것없고, 힘들고, 연약해 보이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영적인 혈통을 이어 받았기에 믿음의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저 녀석 좀 봐. 지금은 그래도 반드시 해 낼거야. 그 부모가 그랬거든. 그 피가 어디 가겠어.”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온 우주의 계획을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혈통이 어디 가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빌립보서 4장 13절)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또 가까이 있다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역대하 20장 20절부터 23절 말씀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 입니다.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적용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이 주로 우상 숭배와 불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면, 남쪽 왕조들은 그래도 간간히 믿음의 길을 걸었던 왕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사밧도 그런 왕 중에 하나입니다. 35세에 왕이 되어 25년간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좋은 신앙의 본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는 이전에 악한 왕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오직 그 부친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 계명을 행하고”(역대하 17장 4절), 백성의 지도자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온 유다에서 가르치게 했습니다.(역대하 17장 9절) 그 결과 하나님이 유다를 강하게 만드셨고, 이웃 나라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북쪽의 아합 왕과 결혼 동맹을 맺고 길르앗 라못과 전쟁을 하는 통에 하나님께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 묻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그것이 칭찬이든지 혹은 책망이든지 간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온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위해 노력했고, 각 성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실한 재판관을 세웠습니다. 그는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찾았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세워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시대는 왕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신앙 생활이 흠잡을 데 없이 헌신하던 시기였고, 이 정도 되면 태평성대가 이뤄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작은 믿음이 불이 붙어 하나님의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 나가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 간절하고, 은혜로 찬양하는 것이 가슴 벅차고, 내가 하는 기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 같고,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과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이 그런 시기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가득하고 믿음의 확신이 이 때보다 강할 때가 없습니다. 여호사밧의 시대가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상황이 우리의 기대와 달리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져야 하는데 갑자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이 찾아옵니다. 갑작스레 몸이 병들기도 하고, 사업이 삐그덕 대기도 하고,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면서 기도했던 자녀들이 속을 썩이기도 하고, 믿었던 형제 자매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들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을 겪기도 하고... 그 때에 느끼는 당혹감과 실망감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호사밧 왕과 그의 백성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은 외부에서 나타납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큰 연합군을 만들어 엔게디를 통하여 브라가 골짜기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브라가 골짜기의 연합군으로 인해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여호사밧 왕의 기도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겠습니다.”(역대하 20장 12절).” 아마도 연합군들은 이런 우왕좌왕하고 두려워하는 유다의 심리를 이용해서 더더욱 득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시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더욱 빛이 납니다. 마치 빛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과 행동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생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반드시 삶에 곳곳에 적용되는 큰 힘이 됩니다. 여호사밧 왕이 보여준 믿음의 빛은 이렇습니다. 먼저 그는 신앙의 항상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혼자 살려고, 혹은 지금 당장 온 백성의 괴로움을 줄여보기 위해 연합군과 당장 타협하지 않고, 곧바로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역대하 20장 12절) 여호사밧 왕 뿐만 아니라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아내와 아이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지금은 전쟁을 준비해서 싸우든지 아니면 완전히 투항하든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항상 그 문제를 하나님께 먼저 묻습니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드린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가 주인이 되어 어떤 일을 행하다가 실패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항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이면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며,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두려움과 걱정이 그들을 사로잡았지만, 여호사밧 왕과 그의 백성들은 평상시에 바로 이것이 잘 훈련되었기에 금식하고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레위 사람인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응답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역대하 20장 15, 17절).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맡기는 순간,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역사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사밧이 그 응답을 듣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다음날 그는 백성들과 함께 드고아 들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먼저 먼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대를 조직합니다. 찬양대가 군대 앞에 서서 찬송을 하며 나아갑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나님께 묻고 주도권을 내어드린 후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선포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편안하고 모든 일이 잘 될 때에는 신앙고백을 잘 합니다. 그러나 정작 어렵고 힘들 때에는 믿음의 선포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신앙고백은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랬습니다.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면전에서 예수님께 하나님의 자녀로 취급받기 보다 그 보다 못한 개의 족속들이라고 무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가복음 7장 28절) 그녀의 믿음에 대해 예수님은 뜻밖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어렵지만 하나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네 믿음의 고백을 보니 너는 자격이 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마가복음 7장 29절)

그런데 말로 하는 신앙 고백, 홀로 하는 신앙고백은 힘이 듭니다. 여러분, 이때 찬송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전쟁을 시작 하면서 찬송을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기도 중에 제일 힘있게 할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찬송의 기도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찬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역대하 20장 21절) 지금 이스라엘은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 데 감사의 찬양을 먼저 드립니다. 그들에게 임한 것은 전쟁의 두려움인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먼저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울려 퍼지는 온 백성이 찬송이 이보다 더 큰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과 아들 압살롬의 박해를 피해 광야에서, 이방 땅에서 홀로 도망하면서도 하나님께 하프를 켜면서 찬양으로 신앙고백을 했던 다윗을 높이셨던 하나님께서,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개입을 고백했던 바울과 실라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 자비하심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가 힘들거든 찬양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음의 고백이 알알이 새겨져 있는 찬양을 마음껏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찬양에 역사하십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찬양의 제사를 마음껏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제일 감동이 될 때에는 역시 우리가 예상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실 때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희생으로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할 때 더더욱 그 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의 찬양의 고백에 대해서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은 복병을 연합군 사이에 두셔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먼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세일 자손을 치고 그 후에 서로 상대방끼리 쳐서 모든 사람이 멸망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신 복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적들의 패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브라가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전리품을 거둬 들였습니다. 얼마나 많았던지 사흘 동안 거둬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정확하고 놀랍습니다. 구약에는 이상하리만큼 이런 믿음의 고백에 대해서 정확하게 응답하는 하나님의 타이밍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선포와 그 행위를 보고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범람하는 요단강의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을 내딛고 그곳에 잠기자 마자 요단강이 멈춰 서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니엘은 힛데겔 강가에서 마지막 시대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자기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지쳐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다니엘 10장 11절)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를 보내어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선포를 그냥 흘러 보내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탄식과 간구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적합한 때에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결국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에게 근심과 고통의 골짜기였던 브라가 골짜기는 그 말의 뜻대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송축하는 송축의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브라가 골짜기가 신앙고백의 한 흔적처럼 눈 앞에 그렇게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은 결국 우리의 믿음과 연결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 들어오셔서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혹 오랫동안 열심히 믿어왔는데, 아니 이제 믿은지 얼마 안 되지만 삶이 힘이 들고 기대했던 변화가 없어서 낙심이 되십니까? 우리는 믿음의 항상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선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찬양과 감사의 선포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구하는 것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얽힌 문제가 해결 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믿고 우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찬양의 제사로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 동반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사탄의 방해는 있을지언정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선포에 대해서 우리가 노래하고 찬송을 시작할 바로 그 때에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에게 여러분의 근심과 고통의 골짜기가 송축과 기쁨의 골짜기로 바뀌는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하만: 에스더 3장 1-6절 (2014_0202)

2/3/2014

 
내 안에 있는 하만 (Haman in My Heart)

성경본문: 에스더 3장 1-6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태복음 15장 11절) 후에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에게 자세히 뜻을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태복음 15장 17-18절)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생각과 행동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 안에 지금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마음은 종종 밭으로 비유 되곤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밭에 무엇이 있는가는 그곳에 무엇을 심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얼마 전이든 아니면 아주 오래 전부터 심어온 것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올 한 해를 열면서 우리 보스톤 필그림교회는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어를 더욱 간단하고 쉽게 표현 하자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까?’라는 말일 것입니다. 한달이 벌써 훌쩍 지나 버렸는데, 이런 결심이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끊임없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로마서 7장 15,19절) 무엇이 문제일까요? 저는 여러분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즉 에스더 3장 1~6절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 중간 정도에 보면 별로 눈에 띠지 않는 책, 에스더가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시고, 성경을 읽어보신 분은 에스더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고, 에스더의 지혜를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큰 곤경에서 벗어난 것 정도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나 지금이나 딸을 낳으면 이름을 에스더(Esther)라고 많이 짓습니다. 에스더는 오히려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더 익숙한 성경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날을 기념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두 번 포로 생활을 합니다. 첫번째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총리가 되고, 기근을 피해 그의 부친 야곱과 형제들을 초청한 후 큰 민족을 이룹니다. 그러나 요셉 사후에 왕조가 바뀌고 나서 히브리 민족이 통치자 계급에서 종의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무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첫번째 포로 생활과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두번째는 바로 오늘 본문 배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범죄한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BC 721년과 BC 586년경에 차례로 멸망 당하고, 당시 왕족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메대라는 나라를 거쳐 우리에게 익숙한 페르시아의 전성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당시의 왕은 아하수에로였으며, 헬라식으로는 크세르 크세로(Xerxes, BC 485~486) 왕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지략이 뛰어난 왕이었으며, 동시에 자기를 과신하고 크게 파티를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섭리로 유대인인 에스더가 왕후가 됩니다. 그런데 그 왕후를 키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입니다. 어쩌면 에스더서의 중심인물이 에스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발단과 그 결과의 중심에는 바로 모르드개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2~3년쯤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대신 위에 두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됐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왕이 모든 신하에게 명령을 내려 하만에게 꿇고 절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유독 모르드개만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하만의 눈에 띄지 않았을 터인데 하만과 가까운 다른 왕의 신복들 때문에 그의 이런 행동이 드러나게 됩니다. 모르드개에게 권면하여 왕의 명령을 따르라고 해도 굽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이유를 드는데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만은 대노(大怒)하고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히틀러 같은 인종 말살 정책을 여기서 미리 보게 됩니다. 당연히 민족 전체를 담보로 할 정도로 모르드개가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하만을 무시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유대인과 하만과는 어떤 관계이기에 모르드개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본문 3장 1절에서 하만의 출신을 설명하는 단어가 몇 개 붙습니다.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아각’이라는 인물은 사무엘상 15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베냐민 출신인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과 그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사울이 아각을 사로 잡고 좋은 것을 남겨 놓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그 일 때문에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음 것을 후회하게 되고 결국 왕권이 다윗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에스더 2장 5절에 보니까 바로 모르드개가 베냐민 자손으로 나옵니다. 즉 아각 사람인 하만과 베냐민 자손인 모르드개 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일 뿐 아니라 모르드개의 피 속에는 역사적인 실수와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결연함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멀리는 출애굽기 17장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제일 먼저 부딪힌 사람들이 바로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과 출신이 같은 형제인 에서 족속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방해합니다. 가만히 후미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우고 산 꼭대기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싸움에서 승리한 후 모세가 단을 쌓고 그 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고 하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출애굽기 17장 18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인(이스라엘)들이 대대로 싸울 대적이 바로 아말렉 족속이요, 그 대표자가 아각 사람들이요 그 후손이 바로 하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일면 개인 대 개인의 싸움으로 비춰지지만, 역사적인 사건들의 결과요 신앙의 충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신해 싸우고 있는 그의 불굴의 신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대해서 철저하게 순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이방 민족의 땅입니다. 즉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도, 그리고 그곳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도 그 자신의 상황이 하만보다 절대 불리함에도 불과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것 이면에는 하만을 대표하는 그 무언가에 우리가 종속되고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만 즉 아말렉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악한 사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말살케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이백만 백성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준비가 전혀 없었고, 메마른 광야에서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던 그 어려운 시기를 틈타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눈에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형편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만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제일 위험한 것이 바로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판단할 때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보자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아 보이고 편안해 보이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하면 마귀가 40일 금식한 예수님께 보여준 것이 세상 모든 영화 이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은혜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산 위에서 기도하던 모세의 지팡이가 깃발처럼 햇빛에 빛으로 비추일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얻고 아말렉을 무찔렀던 것처럼, 모르드개도 바로 그런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현실 속에서 내가 열세이고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도 나는 언젠가는 사라질 마귀 권세에 편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얻겠노라는 믿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아말렉을 세상 권세나 영화에 비유한다면 그것에 굴하지 않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 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함께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편 1-2절)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하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바라보고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우리는 날마다 우리 밖에 있는 하만을 만납니다. ‘너희가 그것을 경배하면 이것을 주리라.’ 달콤한 약속입니다. 편안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약속이고 영원하지 않는 연약한 약속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을 인정하는 신앙 그것이 우리의 참된 예배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가 이런 외부적인 하만의 위험성도 깨달을 수 있지만, 본문 그 자체 속에 숨겨져 있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하만의 모습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대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교묘하고 대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무시무시합니다. 조그마한 누룩이 온 빵덩어리에 퍼져 못 먹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하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에스더서가 진행되면 될수록 하만의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아하수에로 왕 앞에서 그가 표출한 생각에서 우리는 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스더 6장 6~9절) 즉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만에게 절하고 무릎 꿇는다는 사실 가운데는 우리 자신의 중심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 대신에 앉고자 하는 영적인 교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열심으로 교묘히 가장됩니다 그래서 예배하다가 섬기다가 우리가 인정받지 않는 것 같으면 시험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나는 모습, 목사가 드러나고 성도가 드러나는 모습이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시작이지만, 별로 티도 나지 않지만, 내 안의 그런 모습이 누룩이 되어 전체를 멸망시킬 사탄의 계획에 놓이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육적인 정욕 때문에, 이생에 대한 자랑 때문에, 억누를 수 없는 권세에 대한 추구 때문에, 우리 안의 강력한 진을 구축하고 있는 성령이 훼방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르드개처럼 우리가 죽으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혈과 육의 욕심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고자 하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유혹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죽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장 1-2절) 우리가 육에 대해서 죽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 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될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참된 섬김이 나올 수가 없고, 오히려 봉사와 직분이 우리가 쌓는 공로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위협하는 인간적인 노력과 교묘한 사탄의 계획은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 과감하게 말씀과 확고한 신앙의 행동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불이익이 다가오더라도 우리의 깃발이 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내어 맡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좀먹는 자기중심적이고 소비적인 세상 정욕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주님과 함께 사는 연습이 오직 우리 앞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매일 매일 훈련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결론을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구원하여 주시되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더욱 높이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그렇게 역사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의 거룩한 예배와 섬김 가운데 나타나시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의 열정 : 로마서 12:11           (2014_0126)

1/26/2014

 
신앙생활의 열정 Passion in the Life of Belief

성경본문: 로마서 12장 11절 

2주 전에 가족들과 함께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번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볼 때마다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 나옵니다. 때론 웃기도 하고 때론 진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 날 프로그램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짬뽕 대결”이었습니다. 중식업계의 프로 두 분이 나와서 자신의 장기를 보여줍니다. 한 분은 백짬뽕으로 다른 한분은 홍짬뽕으로 승부를 하는데 밀가루 반죽을 쳐서 4미터짜리 면을 뽑아내는 기술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힘도 힘이려니와 그것을 행하는 그분의 얼굴 속에는 자신감의 미소가 넘쳐 있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그 엄청난 양의 해물을 해감시키고 볶아대는데 한 사람을 위한 짬뽕이라기 보다는 일가족을 위한 어마어마한 양을 균등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요리합니다. 여유를 가지면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키워 주세요’라는 코너를 통해 중학생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이었지만 3개의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는 테크닉뿐만 아니라 어려운 곡들을 표현하는 능력과 함께 연주단과 하는 조화력이 굉장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보면서 동시에 느낀 것이 바로 그들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을 위해 집중력을 가지고 열정을 표출해 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을 하면서 이런 아름다운 열정을 품어낼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의 즐거움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표출해 나올 수 있을까요? 예배를 위해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엄숙하다 못해 너무 무거워 보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장 4절)”고 들었지만 좀 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장 27절)”고 하지만 우리 모습이 주 안에서 정작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는지는 궁금합니다.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장 11절) 이 구절을 다른 성경들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십시오.”(현대인의 성경)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새번역)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공동번역) 오늘의 본문을 요약하자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체되어 있고, 때론 무기력한 우리 신앙생활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 생활 하면서 제일 정체될 수 있고때로는 권태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저 같은 목회자들입니다. 복음을 통한 생명 구원이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이지만, 일단 교회와 목회라는 장에 들어와서 하루 하루 양들을 돌보다 보면 처음의 사랑과 열정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몸에 익숙해진 채 형식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객체적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신앙의 이중적인 모습이지요. 그때마다 흠칫 흠칫 놀랍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목회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목회라는 틀에 갇혀서 자유함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구속해 버린 셈입니다. 심방과 설교와 행사가 목회자 자신의 내면을 가둬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목회는 해야 하기에 모든 것에서 생동감을 잃고 형식적으로 흐르고, 열정을 잃어버렸기에 끊임없이 나태와 권태가 목회자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자유함에서 나온 신앙의 단순함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다시금 신앙생활이 꼭 해야만 하는 강박관념(율법)에 얽매이기 된다면 십중팔구 신앙생활이 정체되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직분 맡으신 분들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초반에 환상을 통해 일곱 초대교회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에베소 교회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요한계시록 2장 2-3절) 에베소 교회는 굉장히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부분에서 열심은 나타나는데 이것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요한계시록 2장 3절) 처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대속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그 이름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아낌없이 하겠노라는 헌신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 감격해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노라는 떨림과 설레임입니다. 주님만 생각하면 예배 드림도, 전도하고 봉사 함도, 내 돈과 시간을 드려서 남을 돕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사하고 은혜가 되는 것이 바로 첫사랑입니다. 즉 신앙생활의 열정을 회복하라는 의미 가운데는 나의 신앙의 초점이 하나님께로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다시금 우리 안에 믿음과 성령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뜨거워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항상 모자람을 깨닫고 ‘이만하면 됐어’라는 생각보다 ‘나는 부족하다. 더 은혜 받아야 돼, 더 기도해야 해, 더 하나님을 알고 경험해야 돼.’라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을 힘써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내면을 한번 들여다 보시고, 내 믿음 생활의 출발점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주님에 대한 첫 사랑과 그 은혜의 감격을 회복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번째, 본문 말씀 그대로 우리 신앙 생활의 열정을 위해서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모면 우리는 전심으로(wholeheartedly)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적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의 상태는 우리의 신앙이 미적지근한 상태로부터 오게 됩니다. 앞서 사도 요한이 본 일곱 교회 환상을 말씀 드렸는데,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 도전도 없고, 편안한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이 더없이 평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은 위장된 평안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적지근함을 대단히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하여 도전하시기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장 18-19절) 즉 그들의 신앙 생활은 신앙의 위험을 무릎 쓰지 않고 세상과 적당한 타협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부유함은 정금을 연단할 정도의 강한 영적인 믿음도, 주님에 대한 순결한 흰 옷의 믿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회개가 없어도 신앙생활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주님은 입에서 토해 내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영국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목회한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이 교회의 소속 교인은 4,366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였습니다. 하루는 스펄전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12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66명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신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신앙의 뜨거움을 표출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게으름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성경은 잠언을 통해서든 다른 성경을 통해서든 게으름의 해악(잠언 6:6-9, 10:26, 13:4, 18:9, 24:30-34, 26:13-16)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 문제는 그것의 출발점이 죄된 속성(sinful Nature)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 나타난 것처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런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게으름이 세상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주님의 사역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참된 열정과 헌신을 담보하는 진지함을 요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게으름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향한 즐거움에서 표류하게 되고 그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이중성을 보이게 만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심령이 감동 받고 열정적인 것 같으나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열정을 갖는 얕은 신앙의 감동을 자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이 금방 식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감히 우리 안에 싹트는 미적지근함과 게으름에 대해서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장 17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은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로새서 3장 23-24절),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의 핵심은 열심을 가지고 “주를 섬기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올 한해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를 위해 결단했습니다. 사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이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흘러나가 우리의 삶의 영역 전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대하면 우리의 삶이 주를 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를 섬기는 삶의 예배를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1-2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한 일들과 기뻐하는 일들을 생각해보고 그런 일들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행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역이, 어떤 봉사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과감히 행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결과도 어떻게 나올 것인가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라(douleuo)”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 세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주인에 대한 종(doulos, slave)의 섬김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이라면 전적으로 종처럼 온전히 순종해서 섬기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이 말이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기에 쉬지 말고 끊임없이 섬기라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냥 가끔씩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항상성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즉 온전한 마음으로 꾸준히 부지런하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주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장 31절)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아름답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인 산 제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일관된 삶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친히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고 단순한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첫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우리 신앙 생활의 열정을 불어 넣어줄 것입니다. 신앙의 열정이 우리를 속이는 모든 신앙의 게으름을 몰아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복음을 위하여 미친 그 갈급함과 열정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열정으로 다시 한번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그 넘침 속에 함께 행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다같이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반석 위에 세워지는 교회: 히브리서 11:1-2,6 (2014_0119)

1/19/2014

 
창립 4주년 기념 주일

반석 위에 세워지는 교회 The Church Being Built on the Rock

성경본문: 히브리서 11장 1-2, 6절

저희 교회가 창립된지 벌써 4주년이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9년 8월 2일에 보스톤 필그림교회(The Korean Pilgrim Church of Boston)로 개척예배를 드렸으니 4년 5개월이 된 셈입니다. 그동안 저희 교회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여러 힘든 부분에도 불구하고 함께 기도해 주시고 교회를 세워간 많은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를 시작할 즈음에는 고민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첫번째 고민은 이 지역에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기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보스톤에 사는 유학생과 교민들  수에 비해 교회가 너무 많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자꾸만 저를 괴롭혔습니다. 또한 개척하는 타이밍이 문제였습니다. 어려운 전임 교회 사정을 보지 않고 그냥 사임하면서 개척하는 것이 마치 교회를 쪼개 나간다는 오해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사정을 잘 모르던 다른 목사님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싸늘한 시선을 한동안 받아야 했던 힘든 시기도 있었습니다. 이 고민은 우리 교회의 존재의 필요성과 특수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승천하시기 전 개인적으로 나눈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한 그 고백만큼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을 먹이고 치라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게 주신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리하는 양들이 있는 곳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목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신앙이 흔들리고 기도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와 같은 믿음의 식구들로부터 상처입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말씀으로 싸매고 인도해야 할 책임이 저에게 있다라는 강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 주님의 관심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당신의 수제자인 베드로 한 사람을 뛰어 넘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갈릴리에 남은 제자들을 뛰어 넘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던 이스라엘의 연약한 양들에게 그리고 장차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올 이방인 양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어졌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담대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모습에서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던 베드로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기에 우리 교회가 다른 이민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이 이곳 보스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갈 하나님 나라의 허브(Hub)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후에 이 지역에서 개척해서 20여년간을 목회하고 계시던 어느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대화할 때 분명히 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암요, 보스톤에 교회가 더 많이 생겨야 합니다. 이 지역에는 그래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리고 믿음 생활을 중단하신 분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이곳을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갈 복음의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미래 시대를 위한 교육과 복음을 통하여 세계 선교를 중요시하게 된 데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고민은 현실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기는 했는데 누가 교회를 함께 세워 나가고 이무거운 책임을 같이 할 수 있을까, 과연 얼마나 모일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첫 개척 예배 때는 30여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두번째 예배 때는 MIT 기숙사 지하 친교실에서 모였는데 반으로 줄어 열 다섯 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모임 때 장은자 집사님 댁에서 모였는데 한국에서 방문하신 이경은 집사님의 어머님을 포함하여 8명 정도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긴 했는데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 함께 교회를 세워 나갈 주체적인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개척하면 사람들이 듣고 구름같이 몰려오리라는 환상은 갖지 않았지만 다음 예배를 드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노라고 큰 소리치셨던 분들이 그냥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여간 기운이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예배 드릴 교회 처소를 얻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여름에 개척했으니 날씨만 좋으면 야외에서 예배 드려도 상관없지만, 개학 시즌이 다가오니까 성도님들이 자꾸 어디에서 예배 드리는지 물어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시간을 저와 저의 집사람에게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교인들에게 은혜와 기도의 시간으로 주셨습니다. 장은자 집사님 댁에서 8명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서 보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제 됐다! 누가 함께 하는지 알았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끄시고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겠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만 믿고 나아가겠습니다” 이날 저녁 이후로는 사람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모임이구나라는 강한 확신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개척하고 나서 한 3주 동안 저와 저희 집사람은 예배 처소를 얻기 위해 일 끝나고 자정이 넘도록 알링톤(arlington)부터 캠브리지(Cambridge), 보스톤(Boston), 벨몬트(Belmont), 워터타운(Watertown), 그리고 뉴튼(Newton)까지 세워진 교회들을 찾아 다니고 그곳에 편지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거절의 편지도, 매몰찬 무관심의 모습도 그리고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기다림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어 크고 멋진 교회를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일은 제가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주인이심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던 초기 멤버들과 개척교회에 대한 그분들의 열정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후에 귀한 이종영 권사님, 문경자 권사님, 문춘희 권사님과 공병근 장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또 여러 일꾼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하나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 세상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는 교회가 되고자 그 다음해 2010년 1월 셋째 주일에 정식으로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반석 위에 세워지는 교회”라고 붙였습니다. 창립 4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가 더욱더 반석 위에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반석과 관련된 성경말씀을 몇 군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면서 마태복음 7장에서 한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즉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에 대한 비유입니다. 둘 다 집을 지었고, 지어진 집은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며 창수가 날 때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그냥 주저 않습니다. 그냥 무너져 버리고 비바람에 그 큰 파도에 맥없이 쓸려 갑니다. 세워지긴 했으나 의미 없는 세워짐 입니다. 겉은 멀쩡하고 화려하나 든든히 세워지지 않은 기초가 부실한 집입니다. 반면에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힘이 들어도 땅을 깊이 파고 바위를 깍아 내고 그 위에 기초를 세웠습니다. 어쩌면 더 조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비바람 앞에, 큰 창수 앞에 끄떡도 없습니다. 많은 이민교회가 부침이 있었습니다. 몇 십 주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교회가 세워지고 어떻게 성장해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기초는 어디입니까? 모래 위 입니까? 아니면 반석입니까? 모두들 반석 위에 지어진 교회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석 위에 세워진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태복음 16장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절) 예수님은 이 대답을 아주 흐믓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7-19절)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말 속에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말입니다. 캐톨릭교회에서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 일뿐 아니라 바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으니 그의 순교지인 로마 교회가 바로 주님의 최고 교회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석은 문자 그대로 베드로를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즉 베드로처럼 누구나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교회의 참된 터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머릿될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시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LORD, kurios)라는 말속에는 최고의 절대 권위, 가장 처음이신 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최고의 것, 창조의 주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이 쓰였을 때는 종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주인을 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헬라 문화권에서 대문자로 쓰이고 나서 부터는 로마 황제인 시저(Ceasar)를 일컫는 말로 쓰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가 따라야 할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은 그 당시의 통치권자인 시저에 대한 불충성을 의미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던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참된 주요 모든 것의 우위요 유일한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우리의 왕 되시고 우리 교회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메시야처럼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우리를 위해 왕처럼, 선지자처럼, 대제사장처럼 그 역할을 감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는 한 그 교회는 모래 위에 세운 교회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입술 가운데서 매일 매 순간 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흘러나오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매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실 수 있도록, 세상은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지만 우리의 굳건한 믿음의 신앙고백 위에 필그림교회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1,2절과 6절 말씀을 읽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우리에게는 바라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가족들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합니다. 사업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좋은 직장으로 인도 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혹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믿음을 갖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 삼서의 말씀처럼 “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복을 받길 원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적으로 성장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꿈꿀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커져서 마음껏 2세들을 양육하고, 지역에 큰 교회로 소문 났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바람들이 전부 잘못됐다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런 모습은 갓난 아이와 같은 엷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업그레이드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한 단계 도약하려 한다면 다시금 우리 안에 오직 예수 정신을 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실 때, 그분의 복음과 생명일 때 우리의 신앙과 교회는 건강하고 튼튼한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예수가 빠진, 오직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 못하는 우리들의 신앙이 된다면 다시금 우리는 믿음 생활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히브리서 11장 6절)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열심히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저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성과 연합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원리를 믿고 희생의 진리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녹아지고 우리 인생의(신앙의) 전부이기를 소원합니다. 때론 힘들고 우리의 바라는 모든 것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도, 혹은 보지 못하는 증거들이 아니어도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길 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반석 되신 주님께 기대어 오직 하나님을 순전하게 의지하고 우리와 우리 교회를 향한 이 마지막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오직 우리 안에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런 우리 교회가 되도록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 에스겔 47장 1-12절 (2014_0112)

1/12/2014

 
성전에서 나오는 물 The Water Which Comes from the Temple

성경본문: 에스겔 47장 1-12절

우리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니카라구아의 이동홍 선교사님과 전구 선교사님은 몇 해 전부터 새로운 선교사역 하나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엘 파라이소’라는 지역에 우물을 파주는 사역입니다. 사실 니카라구아는 수도가 ‘마나구아’, 즉 ‘물이 많은 도시’라고 불릴 만큼 물이 부족한 나라는 아닙니다. 그러나 빈민들이 집중해서 몰려사는 엘 파라이소는 문제가 다릅니다. 원래 물이 귀하고 우물이 없는 지역이라 지역 사람들은 30분 이상을 걸어서 물을 길러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곳에 사역하는 선교사님 조차도 0.5리터 물병 2개로 사워를 해야만 하는 열악한 지역입니다. 더러운 물을 마심으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피부병이 흔하게 발견되고, 더운 열기로 인해 인해 기타 다른 질병이 흔하게 발생하는 곳입니다. 그런 그곳에 디트로이트 한인교회의 도움을 받아 여러 선교사님들이 협력하여 현지인 교회 마당에 우물을 팠습니다. 아침 5시부터 밤 11시까지 동네 사람들이 수동식으로 된 펌프를 이용해서 물을 퍼냅니다. 이제는 동네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고,아이들도 마음껏 샤워와 빨래를 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물을 통해 육신의 샘물을 얻고 교회를 통해 영혼의 샘물을 얻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희가 읽었던 에스겔서 47장도 바로 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서는 대략 스물 다섯 살 나이에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그발 강가에 살던 에스겔(약 B.C. 593~ B.C. 571)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에 관한 성경입니다. 암울한 한 시대 동안 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과 소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의 활동기 거의 끝자락에 받은 환상, 즉 예루살렘 새성전에 대한 환상(41-46장)을 받고 나서 시작되는 환상이 바로 오늘 저희가 읽은 말씀입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손에 이끌리어 성전 안에 들어갔다가 제단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보게 됩니다. 그 물은 제단 남편으로 흘렀다가 동편 문 밑으로 스며 밖으로 흘러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물은 동쪽으로 흘러 조그만 시내를 이루더니 점점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결국에는 능히 헤엄칠 만하고 또한 사람이 건너지 못할 큰 강이 됩니다. 에스겔은 그 물이 흐르는 강 주변으로 과실 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나무가 심히 번성하고 강의 모든 물고기와 생물이 심히 많은 것과 강 주변이 회복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본문이 2014년 새해를 새롭게 시작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삶의 중심지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물은 생명수입니다. 그것이 지나는 곳마다 살리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회복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좋은 열매 맺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좋은 물, 살아 있는 생수에 대한 갈급증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니라” 물의 근원이 참 중요합니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챨스강(Charles River)의 근원인 합킨톤(Hopkinton)의 에코 호수(Echo Lake)가 오염되고 썩은 물을 보낸다면 그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 병들고 죽게 될 것입니다. 2010년에 중간 상수원인 Weston에서 큰 상수도관이 터져 일주일 동안 깨끗한 물을 얻지 못해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수돗물을 틀었는데 그곳에서 흙탕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고 그 물은 샤워조차도 할 수 없는 더러운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물의 근원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나오는 물은 비록 작은 물이었지만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물이었습니다. 그 물은 하나의 지류로 흘렀지만 큰 강을 이룰 정도로 엄청난 양과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새롭게 다짐하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번 해야겠다고 하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이 제자리 걸음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과 교회의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말입니다. 어느 시에서 도로 중앙선 페인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모든 것을 기계식으로 하니까 상관이 없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해야만 하던 시기입니다. 우연찮게 솜씨가 좋다고 해서 한 사람이 뽑혔습니다. 첫날에는 이 사람이 10마일을 페인트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상관이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Wow, 하루에 10마일씩이나 칠하다니 참 대단하다.” 둘째 날은 이 사람이 7마일 정도 칠했습니다. “흠, 그런대로 괜찮군!” 셋째 날은 3마일 밖에 칠하지 못하더니 넷째 날은 1마일도 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실망입니다. 상관이 이 사람을 불러 그 연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예, 페인트를 담은 큰 통이 가까이 있을 때는 10마일도 아무 문제 없었지요. 그러나 매일 점점 그 통이 너무 멀리 있어 왔다 갔다 하느라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네요.”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에 계심을 인식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하박국 2장 20절)이 더 와 닿습니다. 신앙생활의 후퇴는 바로 교회 가기 싫어지는 것부터,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는 교회를 가까이 하십시오. 교회 가기를 사모하십시오. 그곳에서 예배하면서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 아름다운 생명수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모해야 될 그 생명수는 무엇을 말합니까? 넓게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장 12-13절) 이 세상의 모든 것 즉 풀이나 꽃과 같은 육체의 영광은 시들고 말라지고 종국에는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비록 천지는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영원합니다(베드로전서 1장 24-25절).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여러분에게 큰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그런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예배를 사모하고 하나님 만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좁게는 그 생명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을 의미합니다. 참된 진리를 갈망하던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3-14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가 속죄함을 받았고, 우리의 신분이 다시금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2013년까지는 우리의 모습이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고, 아니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의 우리의 모습 속에 도무지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second chance, 즉 하늘로부터 값없이 내리는 은혜를 힘입어 새롭게 변화를 받을 새사람, 새생활의 가능성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힘을 얻고 역동성을 가지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성령충만은 일어나지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가족 여러분! 올 한해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에 의지하여 여러분 안에서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더욱 뚜렷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순전한 인도를 받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이 우리 삶에 주시는 도전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수의 흐름에따른 변화입니다. 먼저 3절부터 5절까지 살펴보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변화는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일천척마다 깊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발목에 오르더니 다음에는 무릎에 차고 그 다음에는 허리에까지 오르며 마지막에는 물이 크게 넘쳐 헤엄칠 정도로 크게 깊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두 부분으로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되 결국에는 은혜의 강물에 잠길 정도로 그런 큰 영향력이 여러분에게도 미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읽는 말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다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문학가나 과학자, 그리고 예술가나 체육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지식 많은 사람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어쩌면지금까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 그 말씀의 깊이는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면서 아직 여러분 몸을 잠길 정도의 하나님 말씀, 그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도 않았는데 다 알고 경험한 것처럼, 혹은 나는 Science를 하니까, 나는 Technology를 하니까, 나는 운동을 하니까 성경이 상관없다고 말씀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감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영역, 즉 우리의 모든 지정의 부분을 주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계획하신 1%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들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희미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지식과 연구와 노력은 어느 정도 통계적으로 가능한 수치적인 진보를 이룬다면,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은 그 한계를 능히 뛰어 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장 17-19절)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이런 놀라운 역사를 창일한 은혜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는 것처럼 누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또한 생명수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우리 개개인의 평생의 믿음의 여정이 성장하고 풍성해지며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공동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살아있는 복음의 말씀은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는 지극히 미미했습니다. 마치 발목에 찬 물은 겉보기에도 하찮고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오르고 우리의 몸이 잠길 정도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넓고 깊게 흐르는 거대한 강물은 바위를 쪼개고 산을 부술만한 엄청난 힘과 수많은 종류의 각종 생명체를 담아낼 생명의 능력이 그곳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의 기독교는 겨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급기야는 로마와 전세계를 덮어버릴 큰 힘과 역사를 바꾸는 역동적인 강물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큰 기업가나 좋은 가문들을 볼 때에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들도 역시 모두가 출발점은 별 볼일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에 붙들린바 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록펠러(John D. Rockefeller), 링컨(Abraham Lincoln),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같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통해 그들이 변화되었거나 그들 부모에게서 시작된 복음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가문은 개인을 뛰어넘어 미국이라는 국가적 신앙적 공동체를 떠받드는 더욱 귀한 가문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여기서 한번 질문해 봐야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복음이 들어왔는데, 혹은 우리 중에도 벌써 예수 믿은 지 4대 째를 넘어가고 있는데 어떤 복음의 변화와 능력이 있는지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자녀들에게 후손들에게 정말 좋은 것을 물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남겨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것들은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말입니다. 진실로 우리 가족과 후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큰 생명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공동체 안에 생겨난 작은 믿음은 비록 작아 보이지만 언젠가는 큰 강을 이루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모든 생명체를 담을 만한 큰 그릇의 공동체가 될 줄로 확신합니다.

분명 이 생명수 강이 흐르는 곳마다 회복과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감으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이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에스겔 47장 8~12절). 이 시간 성전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 생명수를 몸이 잠길 정도로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가족과 자녀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와 이 나라 위에 이런 회복과 가슴 벅찬 변화의 풍성함이 올 한해 동안 이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 이사야 43장 15-21절 (2014_0105)

1/5/2014

 
새 해 주일 감사 예배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 Holy Worshiper, Happy Worshiper!

성경본문: 이사야 43장 15-21절




할렐루야! 2014년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교회에 모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입니다. 주일이 한 주간의 시작이면 그 주일의 중심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 한 주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배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찬양을 통해 힘을 얻고 돌아가면 한 주간의 삶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예배에서부터 혼란스러우면 한 주간의 삶이 정신 없고 힘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예배에 집중하기 위해 올 한해 우리 교회 표어를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로 정했습니다. 이 표어가 여러분 각자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기를 원합니다. 올 한 해 새로운 결심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거룩한 예배자, 언제나 예배 드릴 때마다 행복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작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이 신앙을 표현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글자 그대로 보면 예를 갖추어 절을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신앙의 대상에게 존경과 숭앙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입니다. 값어치를 나타내는 ‘Worth’라는 말과 태도 마음을 의미하는 ‘ship’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결국 우리가 드리는 예배란 우리의 절대 가치가 되는 하나님께 가장 아름다운 마음과 태도로 최고의 존경과 경배를 드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드리기 전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 교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이요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생명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 감동 있는 예배. 뜨거운 예배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예배 드릴 때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의 체험이 분명하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43장 15절부터 21절까지 읽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그들의 왕과 함께 이역만리 바벨론으로 끌려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포로 생활을 한지 꽤 오랩니다. 유대인들끼리 그발 강가에 모여 살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신앙도 그리고 찬송도 잊어 버린지 꽤 오래 됐습니다. 기쁨 보다는 삶의 고역이, 소망보다는 이제 그곳 삶에 익숙해 버린 자녀들을 보며 타향에서의 낯설음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마치 삶을 살고 있으되 이제 막 눈이 내릴 것 같은 희뿌연 구름 아래 핏기 없이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래도 함께 모인 그들을 보며 바벨론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너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우리를 위해 그 하프 한번 켜보며 노래를 불러라!”  시편 137편이 이런 상황을 아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찌로다.

예배 하러 오신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그 사모하는 마음을 잊어 버릴정도로 주어진 현실이 어렵고 힘도 나지 않아 교회 가는 것이 고역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고통 때문에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하나님은 고사하고 찬송과 기도를 드려도 예배에 집중이 되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참여자가가 아닌 예배의 방관자로 한 시간 동안 앉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예배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현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고통 가운데서, 힘듦 가운데서, 염려 가운데서 영원히 거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행복하고 기쁨 가운데, 즐거움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과 멀리 떨어져 외롭고 낯선 이방인의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 거하여 당신의 보호 아래 안전하고 든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시편 40편 1-2절)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배의 회복과 그 시작이 무엇인지를 저희에게 알려 줍니다. 이사야 43장 15절 말씀에,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I am the LORD, your Holy One, Israel’s Creator, your king.)”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작은 예배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말씀의 선포를 통해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주(主)이시며, 왕 되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우리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누가 나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본 자마다, 심지어 그 천사를 본 자마다 죽었는데 우리는 어떤 자격으로 그 크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장 16절)고 말씀합니다. 잊어버렸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멀리 떠나셨던 건만 같았던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예배를 통해 나와 직접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나의 하나님이 깨달아져야만 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예배하는 우리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임재로 경험 되어질 때 우리가 거룩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사람을 즐겁게 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거룩이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경험되어지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갈망하는 거룩한 예배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통해 예배가 회복되면, 즉 거룩한 예배자가 되면 우리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18절과 19절에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리.” 거룩한 예배자의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자의 삶 속에 개입하십니다. 더 이상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라 이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만드십니다. 즉 내 삶에 새로운 일들을 행하신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 만으로도 가슴 벅차지 않습니까? 과거의 상처도 고통도 힘듦도 잊어 버리게 만드실 놀라운 일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 주십니다. 본문 가운데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고 살기는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몰라, 그 길을 몰라 황량한 광야에서 배회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의미를 몰라 메마른 사막처럼 타는 갈증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여러분에게 예수님은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한복음 7장 37-38절)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이 우리 삶에 다가올 때 일어나는 변화의 신앙 사건을 통해 우리 안에 지독히도 반복되고 있는 과거의 굴레와 죄의 옛모습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지금 바벨론에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서 노예처럼,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그들에게 고향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다시 만난 가족들과 함께 포도원을 짓고 양을 치며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 실제로 그들은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때 그들이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한 예배자가 된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새로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내실 것입니다. 각자 각자에게 올 한해 동안 하나님은 분명하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큰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여러분에게 임할 새로운 일들을 기대해 보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거룩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역사하실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일들을 통해서 행복한 예배자가 된 우리는 어떤 사람들로 바뀌게 될까요? 오늘 본문 21절이 그 대답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예배의 회복과 감동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잊어버렸던 찬양과 감사가 다시 흐르게 합니다. 입술을 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다시금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도록 내어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작은 천국이 이곳에서부터 이루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는 예배에 성공합시다. 정말 감격 있는 예배, 살아 있는 예배를 위해 기도합시다. 매 예배마다 준비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며, 여러분에게 한 해 동안 말씀으로 약속하신 놀랍고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년말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런 새로운 일들을 행하셨노라고 간증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그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기쁨과 감사의 올 한해 동안 찬양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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