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의 기쁨 (The Joy of Zacchaeus)
성경본문: 누가복음 19장1-10절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행복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 경제적인 것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평과 사회 정의라는 것 보다는 바로 내 앞의 이익, 즉 내 밥 그릇의 크기를
불려준다는 말에 더 현혹되기 쉬운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오랫동안 축복, 특별히 물질적인 축복에 많은 강조를 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이 틀렸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축복이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축복의 유무가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는 자에게 따라오는 부산물의 하나이지 절대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잘 믿어서 물질적인 축복이 따라오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축복이 따라왔다고 해서 꼭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믿지 않고도 주체할 수 없는 부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부유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절제할 수 없는 탐욕을 보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느껴지는 결핍(모자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공허하지만 겉으로는 온갖
것들로 포장한 것 같은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중성에 노출된 자아가 자신 안에서 만족하고 기뻐할만한 일관성을 지니게 될 때 입니다. 그런 일관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변화는 우리의 생각의 변화로 우리가 바꿔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이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서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런 결핍과 이중성의 문제를 해결한 한 사람의 기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삭개오라는 사람을 통해 그가 어떤 기쁨을 누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기쁨을 누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함께 이런 교훈들을 우리 삶에 동일하게 적용해서 그가 누렸던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려보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동안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구약 성경 이사야
61장의 예언에서 잘 나타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3절) 그래서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셨고,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전하였습니다.
갈릴리에서 돌아와 이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바로 여리고를 거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리고 성이 상당히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여호수아를 통해 철저히 무너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저주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의 여리고 성에서 약간 떨어진, 헤롯의 별장인 Wadi Qult가 있던 오아시스 도시를 말합니다. 여러 개의 오아시스로 인해 풍부한 물이 있었기에 큰 도시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관문이었기에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큰 세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도시의 세리장이 삭개오였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면서 그 사이에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동족들의 희생을 통하여 부자가 된 셈이지요. 그래서 그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거리의 창기들처럼 죄인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취급에 대해서 삭개오는 별로 아랑곳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족할 것 없는 그가, 신경 쓸 것 없는 그가 어떻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걸까요?
당시 여리고 성에는 얼마 전 일어났던 기적(누가복음 18:35-43)이 화제였습니다. 바로 성 밖에서 늘 구걸하며 살던 시각장애인인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입니다. 눈을 뜬 과정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선풍적으로 여리고 성안에 쫙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 또한 이런 소문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던 것 같습니다.3절에 보니까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보고자 하되’라는 말 앞에 한 단어를 덧붙입니다. “He wanted to see Jesus eagerly.” 정말 간절히 보고자 하는 욕구가 그의 마음 속에 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소문을 따라 예수님이 오신다는 길목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 발꿈치를 쳐들고 뛰면서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근처 길목 위로 쭉 뻗어 있는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 갔습니다. 바로 그 위로 예수님이 지나가게 됩니다. 대개가 구경 나온 사람은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즉 인간관계가 간접적인 관계에서 그치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삭개오도 이미 저만큼에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됐다’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으로 만족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돌무화과 나무 아래 오시더니 자기를 쳐다보면서 한 마디 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성경은 그 다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우리는 여기서 뜻밖의 큰 즐거움을 얻게 된 삭개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는 속히 내려와 예수님을 즐거워하며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을까요? 우리는 5절 말씀을 보면서 그 속에서 몇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삭개오야’라는 부름에 있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은 만난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로부터 유명한 세리장이라고 들은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여리고까지 오면서 그럴만한 힌트는 한군데서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번에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고 있으되 잘 알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밖으로 보여지는 키 작은 삭개오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중심을 알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셨고 당신의 계획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장 1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고 있었고, 그도 하나님의 선한 이미지를 따라 구원의 대상에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의 모든 자아가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가장 출발점은 우리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알고 부르셨을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거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우리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손님이 오히려 우리를 초대하는 격입니다. 사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를 예수님이 초대하십니다. 비록 장소가 삭개오 집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초대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신앙 사건의 가장 큰 순간은 바로 이런 주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늘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로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오직 마음을 열고 그 초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주변 사람들이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열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감격이 있기에 즐거움으로 그 초청에 응하여 당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삭개오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중심을 아는 예수님을 간접적인 관계가 아닌 직접적으로 만나는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이 여러분의 존재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삭개오의 집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장면은 바로 삭개오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돌무화과 나무에서 삭개오의 집까지는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가까우면 10분정도 걸었을 수도 있고, 혹은 도심 정반대편에 있었다면 꽤 걸었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 사이의 기록을 말하고 있지 않기에 우리는 모릅니다. 다분히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이 다음 장면입니다. 분주하게 하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겼을 것이고, 부자 집인 까닭에 좋은 음식들이 준비되어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보고 모여든 주변 사람들이 수근댑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말입니다. 거룩한 예수님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부정한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힐난하는 셈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이런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삭개오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 일종의 폭탄 선언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선언을 하게끔 만들었을까요? 삭개오는 부정한 자신의 집에 거룩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오신 순간부터 성(the sacred)과 속(the secular)의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레위기에 보면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거룩한 것에 부정한 것이 닿으면 그것이 부정해지든지 아니면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해서 거룩하게 되든지 하는 것이지 그 둘의 중간이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병이 묻은 옷이나 다른 부정한 것을 닿은 그릇은 바로 깨뜨려지거나 불살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성과 속의 갈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15절, 21-24절) 삭개오의 마음 속에서 죄의 짐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짐이 함께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짐이 결코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 앞에서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옛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힘들어도 새로운 결단을 한번 해볼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장 22-24절) 삭개오는 자신 앞에 놓인 결단의 순간의 죄의 문제를 과감히 주님께 맡기고 믿음을 따라 생명으로의 변화를 선택합니다. 비록 자신이 평생 쌓아 이룬 부와 관계가 손해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전에 살았던 삶과 반전을 이루는 두드러진 회개가 있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믿음의 과정에서 진정한 회개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편리함과 익숙함을 포기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실상 우리 한국교회의 잘못된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많이 듣는데 실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신뢰도가 매년마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아예 동네 개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 대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 지성인인 손봉호 교수님은 한국 사회가 경쟁위주의 사회로 급성장하였고 그것이 교회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경쟁은 그 결과가 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과 방법은 경쟁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쟁적으로 실천했더라면 오히려 한국 교회는 훨씬 투명하고 존경 받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 절박성을 잃어버리고 말씀의 능력과 삶의 성결성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안에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과 물신(物神)인 맘몬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타협한 결과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면 내가 손해 봐야 하고, 영광도 없고 고난만이 있기에 복음을 올바로 적용하기 보다 오해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손쉽게 믿을 수 있는 기독교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예수님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으로 바꿔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이 울리는 내적인 반향에 그가 공적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부정하고 탐욕스러운 부자에서 정직하고 거룩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니 더 이상 부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한 분 만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삭개오의 폭탄선언은 우리에게 세례 요한의 외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태복음 38-10절)
이런 그를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장 9절) 구원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더 이상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회개를 보시고는 그에게 사죄의 은혜와 더불어 그와 그의 온 집에 구원의 선포를 이루신 것입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니!”죄인으로 취급 받고 있었던 삭개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쁨과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은혜는 죄가 많은 곳으로 흐르는 법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삶의 반전도 중요하지만, 존재의 반전을 삭개오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였고 궁극적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자신을 아는 예수님을 모심으로 회개의 기쁨과 사죄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의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 다가온 믿음의 사건에 오해하지 않고 올바르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밖에서 늘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계신 주님을 모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기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주신 마음의 소리를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회개에 합당한 참된 열매를 이룸으로 사죄의 기쁨에 참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새생명을 얻은 새사람으로서의 구원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성경본문: 누가복음 19장1-10절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행복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 경제적인 것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평과 사회 정의라는 것 보다는 바로 내 앞의 이익, 즉 내 밥 그릇의 크기를
불려준다는 말에 더 현혹되기 쉬운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오랫동안 축복, 특별히 물질적인 축복에 많은 강조를 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이 틀렸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축복이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축복의 유무가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는 자에게 따라오는 부산물의 하나이지 절대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잘 믿어서 물질적인 축복이 따라오는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축복이 따라왔다고 해서 꼭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믿지 않고도 주체할 수 없는 부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부유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절제할 수 없는 탐욕을 보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느껴지는 결핍(모자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공허하지만 겉으로는 온갖
것들로 포장한 것 같은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중성에 노출된 자아가 자신 안에서 만족하고 기뻐할만한 일관성을 지니게 될 때 입니다. 그런 일관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변화는 우리의 생각의 변화로 우리가 바꿔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이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서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런 결핍과 이중성의 문제를 해결한 한 사람의 기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삭개오라는 사람을 통해 그가 어떤 기쁨을 누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기쁨을 누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함께 이런 교훈들을 우리 삶에 동일하게 적용해서 그가 누렸던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려보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동안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구약 성경 이사야
61장의 예언에서 잘 나타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3절) 그래서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셨고,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전하였습니다.
갈릴리에서 돌아와 이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바로 여리고를 거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리고 성이 상당히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여호수아를 통해 철저히 무너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저주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 시대의 여리고는 구약 시대의 여리고 성에서 약간 떨어진, 헤롯의 별장인 Wadi Qult가 있던 오아시스 도시를 말합니다. 여러 개의 오아시스로 인해 풍부한 물이 있었기에 큰 도시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관문이었기에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큰 세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도시의 세리장이 삭개오였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면서 그 사이에 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동족들의 희생을 통하여 부자가 된 셈이지요. 그래서 그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거리의 창기들처럼 죄인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취급에 대해서 삭개오는 별로 아랑곳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족할 것 없는 그가, 신경 쓸 것 없는 그가 어떻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걸까요?
당시 여리고 성에는 얼마 전 일어났던 기적(누가복음 18:35-43)이 화제였습니다. 바로 성 밖에서 늘 구걸하며 살던 시각장애인인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입니다. 눈을 뜬 과정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선풍적으로 여리고 성안에 쫙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 또한 이런 소문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던 것 같습니다.3절에 보니까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보고자 하되’라는 말 앞에 한 단어를 덧붙입니다. “He wanted to see Jesus eagerly.” 정말 간절히 보고자 하는 욕구가 그의 마음 속에 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소문을 따라 예수님이 오신다는 길목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 발꿈치를 쳐들고 뛰면서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근처 길목 위로 쭉 뻗어 있는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 갔습니다. 바로 그 위로 예수님이 지나가게 됩니다. 대개가 구경 나온 사람은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즉 인간관계가 간접적인 관계에서 그치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삭개오도 이미 저만큼에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됐다’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으로 만족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돌무화과 나무 아래 오시더니 자기를 쳐다보면서 한 마디 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성경은 그 다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우리는 여기서 뜻밖의 큰 즐거움을 얻게 된 삭개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는 속히 내려와 예수님을 즐거워하며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을까요? 우리는 5절 말씀을 보면서 그 속에서 몇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삭개오야’라는 부름에 있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은 만난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로부터 유명한 세리장이라고 들은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여리고까지 오면서 그럴만한 힌트는 한군데서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번에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고 있으되 잘 알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밖으로 보여지는 키 작은 삭개오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중심을 알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셨고 당신의 계획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장 1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고 있었고, 그도 하나님의 선한 이미지를 따라 구원의 대상에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의 모든 자아가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가장 출발점은 우리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알고 부르셨을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거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우리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손님이 오히려 우리를 초대하는 격입니다. 사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를 예수님이 초대하십니다. 비록 장소가 삭개오 집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초대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신앙 사건의 가장 큰 순간은 바로 이런 주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늘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로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오직 마음을 열고 그 초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주변 사람들이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열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감격이 있기에 즐거움으로 그 초청에 응하여 당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삭개오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중심을 아는 예수님을 간접적인 관계가 아닌 직접적으로 만나는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이 여러분의 존재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삭개오의 집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장면은 바로 삭개오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돌무화과 나무에서 삭개오의 집까지는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가까우면 10분정도 걸었을 수도 있고, 혹은 도심 정반대편에 있었다면 꽤 걸었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 사이의 기록을 말하고 있지 않기에 우리는 모릅니다. 다분히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신 것이 다음 장면입니다. 분주하게 하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겼을 것이고, 부자 집인 까닭에 좋은 음식들이 준비되어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보고 모여든 주변 사람들이 수근댑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말입니다. 거룩한 예수님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부정한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힐난하는 셈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이런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나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갑자기 삭개오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 일종의 폭탄 선언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선언을 하게끔 만들었을까요? 삭개오는 부정한 자신의 집에 거룩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오신 순간부터 성(the sacred)과 속(the secular)의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레위기에 보면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거룩한 것에 부정한 것이 닿으면 그것이 부정해지든지 아니면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해서 거룩하게 되든지 하는 것이지 그 둘의 중간이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병이 묻은 옷이나 다른 부정한 것을 닿은 그릇은 바로 깨뜨려지거나 불살라 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성과 속의 갈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15절, 21-24절) 삭개오의 마음 속에서 죄의 짐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짐이 함께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짐이 결코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 앞에서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옛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힘들어도 새로운 결단을 한번 해볼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장 22-24절) 삭개오는 자신 앞에 놓인 결단의 순간의 죄의 문제를 과감히 주님께 맡기고 믿음을 따라 생명으로의 변화를 선택합니다. 비록 자신이 평생 쌓아 이룬 부와 관계가 손해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전에 살았던 삶과 반전을 이루는 두드러진 회개가 있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믿음의 과정에서 진정한 회개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편리함과 익숙함을 포기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실상 우리 한국교회의 잘못된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많이 듣는데 실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신뢰도가 매년마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아예 동네 개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 대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 지성인인 손봉호 교수님은 한국 사회가 경쟁위주의 사회로 급성장하였고 그것이 교회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경쟁은 그 결과가 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과 방법은 경쟁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쟁적으로 실천했더라면 오히려 한국 교회는 훨씬 투명하고 존경 받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 절박성을 잃어버리고 말씀의 능력과 삶의 성결성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안에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과 물신(物神)인 맘몬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타협한 결과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면 내가 손해 봐야 하고, 영광도 없고 고난만이 있기에 복음을 올바로 적용하기 보다 오해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손쉽게 믿을 수 있는 기독교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분명히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예수님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으로 바꿔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이 울리는 내적인 반향에 그가 공적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부정하고 탐욕스러운 부자에서 정직하고 거룩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니 더 이상 부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한 분 만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삭개오의 폭탄선언은 우리에게 세례 요한의 외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태복음 38-10절)
이런 그를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장 9절) 구원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더 이상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회개를 보시고는 그에게 사죄의 은혜와 더불어 그와 그의 온 집에 구원의 선포를 이루신 것입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니!”죄인으로 취급 받고 있었던 삭개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쁨과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은혜는 죄가 많은 곳으로 흐르는 법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삶의 반전도 중요하지만, 존재의 반전을 삭개오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였고 궁극적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자신을 아는 예수님을 모심으로 회개의 기쁨과 사죄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의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 다가온 믿음의 사건에 오해하지 않고 올바르게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밖에서 늘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계신 주님을 모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기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주신 마음의 소리를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회개에 합당한 참된 열매를 이룸으로 사죄의 기쁨에 참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새생명을 얻은 새사람으로서의 구원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