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부활절 메시지
영광의 부활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성경본문: 마태복음 28장 1-10절
오늘 부활주일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도 한편으로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매일 뉴스를 쳐다 보면서 혹시나 산 사람이 없나 하고 스크린만 쳐다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먹먹하기만 합니다. 너무도 슬픕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지금도 여전히 물속에 갇혀 있을 고등학생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애타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오늘 과연 ‘Happy Easter’라고 외치는 것이 맞는가 고민해 봅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의 마음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활절이라 분명 기쁜 날이지만, 오늘만큼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기쁨을 절제하며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떠올리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40일 동안은 음식이 없어도 살 수가 있답니다. 3일 동안은 물이 없어도 살 수 있답니다. 그리고 8분 동안 공기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 1초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소망이 없다’라는 말만큼 우리를 맥 빠지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바다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에 잠수부를 내려 보내고 공기를 주입하고 온갖 첨단장비를 통해 구조활동을 벌이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아직도 배 안에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소망 때문입니다. 비록 한줄기 옅은 소망일지라도 소망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고 함께 할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무언가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성과 관계됩니다. 이 세상의 삶과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영원한 안식이요 하나님과의 동행이 될 테이지만, 오직 이 세상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끝입니다. ‘Hope Zero’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비록 병들고 약해도, 무언가를 잃어버려도 죽은 송장보다 낫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 앞에는 피할 길이 없고 모든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창세기 22장 18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세상 만이 소망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유대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어차피 예수님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았던 당시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죽으면 그들의 위선으로 가려진 모든 정치적 종교적 염려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백성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젠 모든 것이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을 이길 권세는 그 어느 것도 없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도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던 이유는 산 사람을 만나기 보다 죽은 자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도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아 시신이 있는 무덤 안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일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그 자체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흘린 피와 물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우리 인간이 짊어진 모든 죄의 무게를 친히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22절) 아담은 곧 우리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비록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죽음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 안에는 세상의 모든 죽음에 대한 근원이 숨겨져 있으며, 결국 우리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이 됩니다.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봅니다. “무능한 사람들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무책임한 사람들 때문에, 비겁한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김동호 목사 Facebook) 죽음의 근원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우리들의 추악하고 연약한 모습을 봅니다. 혹자는 먼저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는 정부대책반과, 이 와중에도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정치인들과 못된 인터넷 스미싱을 욕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실상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단편 하나 하나가 역할만 바뀌었지 우리 안에 동일하게 베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먼저 희생양을 찾기 보다 우리 안의 악함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생명 가치보다 자본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던 우리의 악함과 죽음을 앞두고 보여준 너무도 옹졸하고 연약한 우리의 의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라는 말은 맞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아담과 우리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죽음의 한계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린도전서 15장 29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서 그토록 봉사하고, 사랑하고, 또 희생하는 것이 다만 이 세상에 국한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이 세상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고통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이 더욱 바보스러울 수 밖에 없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도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예수님마저도 죽음의 한계에 갇히게 만드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 맨 먼저 발견한 것은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고 그 위에 앉은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마태복음 28장 5절)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장 5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He is not here. He is risen just as he said.”(마태복음 28장 6절) 천사가 알려준 소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곧바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곧바로 빈 무덤으로 가 빈 수의를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예루살렘에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의 못자국을 만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후일에 심지어 그를 핍박했던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8절).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22절)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맨처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부활하신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고통과 절망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먼저 평강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보여주십니다. 배신했던 제자들에게, 믿음이 무너졌던 제자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이 두려운 제자들에게 다시 제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영적으로 죽은 그들이 다시금 일어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놀라움과 기쁨”의 반전이 일어나시길 원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 이상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26절).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먼저 믿고 죽은 성도님들은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으며, 언젠가 우리도 그들을 뵙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 1-4절)
비록 지금 여기는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강을 이루지만, 억울함과 분통함과 답답함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배하고 있지만, 죽음의 공포가 뼈 속 시리도록 엄습하고 있지만, 정말 생사의 기로 속에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들의 약함과 힘듦을 아시고 친히 어루만져 주시며,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는 지배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다시는 없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지배하여 그들에게 기쁨과 행복의 삶을 보장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줄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한 믿음으로 영광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실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있으시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세상을 보면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너무도 커 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약한 죄성을 핑계삼아 날마다 지면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아직도 무덤을 향해 가는 여제자들처럼 두려움과 근심 가운데 서계십니까? 해지는 저편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앞으로 어찌할꼬 하며 답답해 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뚫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으로 체험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세상의 조롱과 고통과 힘듦 가운데서, 인간이 보여주는 악함과 불의 가운데 흔들리지 말며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부활의 소식을 통해 우리에게도 소망이 언제나 함께 있음을 전하는 기쁨의 소식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광의 부활 The Glory of the Resurrection
성경본문: 마태복음 28장 1-10절
오늘 부활주일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도 한편으로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매일 뉴스를 쳐다 보면서 혹시나 산 사람이 없나 하고 스크린만 쳐다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먹먹하기만 합니다. 너무도 슬픕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지금도 여전히 물속에 갇혀 있을 고등학생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애타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오늘 과연 ‘Happy Easter’라고 외치는 것이 맞는가 고민해 봅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의 마음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활절이라 분명 기쁜 날이지만, 오늘만큼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기쁨을 절제하며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떠올리며 함께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40일 동안은 음식이 없어도 살 수가 있답니다. 3일 동안은 물이 없어도 살 수 있답니다. 그리고 8분 동안 공기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 1초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소망이 없다’라는 말만큼 우리를 맥 빠지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바다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에 잠수부를 내려 보내고 공기를 주입하고 온갖 첨단장비를 통해 구조활동을 벌이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아직도 배 안에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소망 때문입니다. 비록 한줄기 옅은 소망일지라도 소망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이고 함께 할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무언가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영원성과 관계됩니다. 이 세상의 삶과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영원한 안식이요 하나님과의 동행이 될 테이지만, 오직 이 세상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끝입니다. ‘Hope Zero’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비록 병들고 약해도, 무언가를 잃어버려도 죽은 송장보다 낫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 앞에는 피할 길이 없고 모든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창세기 22장 18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세상 만이 소망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유대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어차피 예수님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았던 당시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죽으면 그들의 위선으로 가려진 모든 정치적 종교적 염려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백성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젠 모든 것이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을 이길 권세는 그 어느 것도 없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도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던 이유는 산 사람을 만나기 보다 죽은 자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도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아 시신이 있는 무덤 안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일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그 자체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흘린 피와 물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우리 인간이 짊어진 모든 죄의 무게를 친히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22절) 아담은 곧 우리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비록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죽음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 안에는 세상의 모든 죽음에 대한 근원이 숨겨져 있으며, 결국 우리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이 됩니다.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봅니다. “무능한 사람들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무책임한 사람들 때문에, 비겁한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김동호 목사 Facebook) 죽음의 근원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우리들의 추악하고 연약한 모습을 봅니다. 혹자는 먼저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는 정부대책반과, 이 와중에도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정치인들과 못된 인터넷 스미싱을 욕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실상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단편 하나 하나가 역할만 바뀌었지 우리 안에 동일하게 베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먼저 희생양을 찾기 보다 우리 안의 악함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생명 가치보다 자본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겼던 우리의 악함과 죽음을 앞두고 보여준 너무도 옹졸하고 연약한 우리의 의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라는 말은 맞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아담과 우리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죽음의 한계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린도전서 15장 29절)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서 그토록 봉사하고, 사랑하고, 또 희생하는 것이 다만 이 세상에 국한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이 세상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고통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이 더욱 바보스러울 수 밖에 없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도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예수님마저도 죽음의 한계에 갇히게 만드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 맨 먼저 발견한 것은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고 그 위에 앉은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마태복음 28장 5절)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장 5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He is not here. He is risen just as he said.”(마태복음 28장 6절) 천사가 알려준 소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곧바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곧바로 빈 무덤으로 가 빈 수의를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예루살렘에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의 못자국을 만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후일에 심지어 그를 핍박했던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8절).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장 22절)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맨처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부활하신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고통과 절망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먼저 평강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보여주십니다. 배신했던 제자들에게, 믿음이 무너졌던 제자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이 두려운 제자들에게 다시 제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영적으로 죽은 그들이 다시금 일어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놀라움과 기쁨”의 반전이 일어나시길 원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 이상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26절).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먼저 믿고 죽은 성도님들은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으며, 언젠가 우리도 그들을 뵙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 1-4절)
비록 지금 여기는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강을 이루지만, 억울함과 분통함과 답답함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배하고 있지만, 죽음의 공포가 뼈 속 시리도록 엄습하고 있지만, 정말 생사의 기로 속에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들의 약함과 힘듦을 아시고 친히 어루만져 주시며,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는 지배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다시는 없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지배하여 그들에게 기쁨과 행복의 삶을 보장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줄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한 믿음으로 영광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실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있으시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세상을 보면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너무도 커 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약한 죄성을 핑계삼아 날마다 지면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아직도 무덤을 향해 가는 여제자들처럼 두려움과 근심 가운데 서계십니까? 해지는 저편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앞으로 어찌할꼬 하며 답답해 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뚫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으로 체험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세상의 조롱과 고통과 힘듦 가운데서, 인간이 보여주는 악함과 불의 가운데 흔들리지 말며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부활의 소식을 통해 우리에게도 소망이 언제나 함께 있음을 전하는 기쁨의 소식자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