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으로 돌아가라 Being Faithful to the Basic
성경본문: 말라기 3장 7-12절
요즘 모국인 한국을 보면서 많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지난 세월호 사고와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통해 국민에 대한 기본적인 안전이 무너졌고, 여러 현실적인 정치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우리 믿는 신앙인들의 양심과 도덕이 많이 무너진 것을 봅니다. 가장 최근에는 유럽과 전세계의 클럽 축구에서 개인기를 자랑하며 이제는 세계 무대에서 전혀 꿀릴 것 같지 않던 한국 축구가 브라질 월드컵에서 너무 어이없이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너진 안전성, 무너진 축구, 그리고 무너진 신앙 양심. 이것들의 결과는 우리 조국과 우리들의 마음이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항해하기 보다는 표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외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지금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센 풍랑과 물결로 인해 방향과 목적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풍랑이 세차게 일지만 배에는 아무 이상 없이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항해입니까? 아니면 표류하고 있습니까? 단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풍랑과 거친 물결만 바라보고 원망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표류가 아닌 항해를 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편 30절의 말씀처럼, 즉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라는 말씀이 여러분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의 인생이 도대체 어느 곳에 서 있는지 감을 못 잡고 방향과 목적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근본 원인에는 예외 없이 그 기본이 무너져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배를 예로 치자면, 키가 부서져 있고, 돛은 찢겨져 있으며, 엔진이 고장 나 있습니다. 원래의 제작된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분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건강의 기본에 충실했더라면 지금쯤 몸이 그리 아프진 않을 것입니다. 재정의 기본에 충실 했더라면 지금 물질적인 고생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베이직에 충실 했더라면 외로워 하거나 정말 중요할 때 사람들의 마음과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저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위해 주시는 시험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신앙의 베이직에 충실 했더라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 힘이 들고,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 기본에서 많이 달라져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고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표류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읽은 본문 말씀(말라기 3장 7-12절)을 통해 신앙생활의 베이직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삶에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앙의 베이직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식에 그친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그들 마음은 예배가 번거롭다고 느껴졌습니다(말라기 1장 13절). 그래서 드리는 희생제물도 대충대충 병들고 흠이 있는 것들과 심지어는 훔쳐다가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 꼭 드릴 봉헌물 마저 건성으로 드리거나 아니면 속였습니다. 그들 소유 중에서 가장 좋고 중요한 부분을 먼저 드린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은 것들 중에서 제일 좋지 않고 상한 것을 드렸으며, 혹은 그나마도 하나님의 명령을 좋지 않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삶에 거룩함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여인들과 결혼합니다. 하나님과 이방 신들을 겸하여 섬깁니다. 그들 삶에 다시금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바로 사회 속에 정의가 무너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 가운데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재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의심합니다. 예배가 아닌 종교생활에 그치고 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혹 우리 가운데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다면 빨리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양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Coram Deo) 생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 모든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순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이고, 가장 최선이라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장 1-3절)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에게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손길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심령에 닿을 때 치유되는 것이고, 내가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참으로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께 돌아감으로 우리의 예배 안에,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만큼 복된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시금 어디로 가야 할지 비전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심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같은 것을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버린다면 이런 것들이 오히려 큰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대천덕 신부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같은 제자인 브래드 롱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게도 볼 수 있는 눈을 주리라! 너도 꿈꾸는 자가 되게 하리라! 크고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길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꿈이 내게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조심해라. 내가 네게 준 꿈꾸는 능력은 큰 선이 될 수도 있지만 무서운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거라. 오직 나만 따르거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다음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앙생활의 베이직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의 우선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을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본문은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본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하실 것이고, 한편으로 여러분이 축복의 말씀으로 꼭 붙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십일조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한글 번역 대신에 영어 번역으로 나오는 한 문장에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영어 성경은 앞의 말씀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맺습니다. “Test me in this.” 번역하면 “이것들로 나를 시험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확신과 보증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하시겠다라는 분명한 선포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한다는데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절 한절을 사모합니다. 보통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고 꽉 붙듭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께서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그 약속의 말씀들을 시험해 보실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으면 합니다. 즉 여러분이 사모하는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믿음을 선포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앞의 말씀대로 인생의 풍랑을 만났다면 담대히 이사야 54장 7절에 의지하여 “너는 나를 무너 뜨릴 수 없어. 나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 없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121편에 의지하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그저 짜집기 형식으로 마법의 주문처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의 약속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직접 역사하실 수 있도록 온전히 내어 맡김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순풍이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과 현실의 상황을 바꾸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의 주변 사람이 뭐라 하건 상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에너지를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더욱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실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셨는데, 거친 풍랑이 잔잔해졌고, 백부장의 하인이 낳았으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영적인 능력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순종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전도와 선교, 그리고 봉사와 섬김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을 직접 시험해 보는 담대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베이직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말씀에 순전히 기초할 때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씀을 시험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부분적이고 단기적인 현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의 완전한 목표는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땅이 아름다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의 삶이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풍성한 삶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촉촉한 말씀의 단비로 말미암아 늘 부드러운 심령을 유지하는 것으로의 변화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에서의 목표가 단순히 아름다운 열매만 맺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이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열매는 반드시 좋은 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농경사회라 땅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아름다운 땅이라는 것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풍성하며, 그 열매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그 땅의 농산물이 잘 되어 창고에 풍성하게 거둬들일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우리 삶의 일부만 바뀐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삶의 전부가 바뀐 사람이 진짜 돌아간 사람입니다. 돌 밭이, 가시 밭이 완전히 옥토로 바뀐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룩(성결성)이 회복되고 은혜가 풍성함으로 인격이 부드러워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같이 있는 신자가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입술 가운데서, 즉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입술 속에서 인정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평안을, 성령의 확신과 충만함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고, 오히려 우리들의 아름다운 땅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따뜻한 바람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느 땅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기초가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여러분을 복되다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서있는 현실이 표류하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신앙 생활의 베이직이 무너졌기에 다시금 그 기본을 역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시금 신앙의 베이직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그토록 의지했던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고 시험을 주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만군의 주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니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장 3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두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신 약속의 말씀을 우리의 모든 부분에 시험해 볼 정도로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다지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과 삶의 모든 부분이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본문: 말라기 3장 7-12절
요즘 모국인 한국을 보면서 많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지난 세월호 사고와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통해 국민에 대한 기본적인 안전이 무너졌고, 여러 현실적인 정치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우리 믿는 신앙인들의 양심과 도덕이 많이 무너진 것을 봅니다. 가장 최근에는 유럽과 전세계의 클럽 축구에서 개인기를 자랑하며 이제는 세계 무대에서 전혀 꿀릴 것 같지 않던 한국 축구가 브라질 월드컵에서 너무 어이없이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너진 안전성, 무너진 축구, 그리고 무너진 신앙 양심. 이것들의 결과는 우리 조국과 우리들의 마음이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항해하기 보다는 표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외적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지금 인생이라는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센 풍랑과 물결로 인해 방향과 목적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풍랑이 세차게 일지만 배에는 아무 이상 없이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항해입니까? 아니면 표류하고 있습니까? 단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풍랑과 거친 물결만 바라보고 원망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표류가 아닌 항해를 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편 30절의 말씀처럼, 즉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라는 말씀이 여러분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의 인생이 도대체 어느 곳에 서 있는지 감을 못 잡고 방향과 목적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근본 원인에는 예외 없이 그 기본이 무너져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배를 예로 치자면, 키가 부서져 있고, 돛은 찢겨져 있으며, 엔진이 고장 나 있습니다. 원래의 제작된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분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건강의 기본에 충실했더라면 지금쯤 몸이 그리 아프진 않을 것입니다. 재정의 기본에 충실 했더라면 지금 물질적인 고생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베이직에 충실 했더라면 외로워 하거나 정말 중요할 때 사람들의 마음과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저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위해 주시는 시험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신앙의 베이직에 충실 했더라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 힘이 들고,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 기본에서 많이 달라져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고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표류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읽은 본문 말씀(말라기 3장 7-12절)을 통해 신앙생활의 베이직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삶에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앙의 베이직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식에 그친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그들 마음은 예배가 번거롭다고 느껴졌습니다(말라기 1장 13절). 그래서 드리는 희생제물도 대충대충 병들고 흠이 있는 것들과 심지어는 훔쳐다가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 꼭 드릴 봉헌물 마저 건성으로 드리거나 아니면 속였습니다. 그들 소유 중에서 가장 좋고 중요한 부분을 먼저 드린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은 것들 중에서 제일 좋지 않고 상한 것을 드렸으며, 혹은 그나마도 하나님의 명령을 좋지 않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삶에 거룩함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여인들과 결혼합니다. 하나님과 이방 신들을 겸하여 섬깁니다. 그들 삶에 다시금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바로 사회 속에 정의가 무너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모습 가운데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재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의심합니다. 예배가 아닌 종교생활에 그치고 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혹 우리 가운데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다면 빨리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양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Coram Deo) 생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 모든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순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이고, 가장 최선이라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장 1-3절)
하나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에게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손길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심령에 닿을 때 치유되는 것이고, 내가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참으로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께 돌아감으로 우리의 예배 안에,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만큼 복된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시금 어디로 가야 할지 비전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심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같은 것을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버린다면 이런 것들이 오히려 큰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대천덕 신부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같은 제자인 브래드 롱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게도 볼 수 있는 눈을 주리라! 너도 꿈꾸는 자가 되게 하리라! 크고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길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꿈이 내게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조심해라. 내가 네게 준 꿈꾸는 능력은 큰 선이 될 수도 있지만 무서운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거라. 오직 나만 따르거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다음부터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앙생활의 베이직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의 우선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을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본문은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본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하실 것이고, 한편으로 여러분이 축복의 말씀으로 꼭 붙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십일조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한글 번역 대신에 영어 번역으로 나오는 한 문장에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영어 성경은 앞의 말씀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맺습니다. “Test me in this.” 번역하면 “이것들로 나를 시험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확신과 보증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하시겠다라는 분명한 선포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한다는데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 한절 한절을 사모합니다. 보통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고 꽉 붙듭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께서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그 약속의 말씀들을 시험해 보실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으면 합니다. 즉 여러분이 사모하는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믿음을 선포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앞의 말씀대로 인생의 풍랑을 만났다면 담대히 이사야 54장 7절에 의지하여 “너는 나를 무너 뜨릴 수 없어. 나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 없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121편에 의지하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그저 짜집기 형식으로 마법의 주문처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의 약속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직접 역사하실 수 있도록 온전히 내어 맡김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순풍이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과 현실의 상황을 바꾸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의 주변 사람이 뭐라 하건 상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에너지를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더욱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실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셨는데, 거친 풍랑이 잔잔해졌고, 백부장의 하인이 낳았으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영적인 능력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순종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전도와 선교, 그리고 봉사와 섬김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을 직접 시험해 보는 담대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베이직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말씀에 순전히 기초할 때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씀을 시험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부분적이고 단기적인 현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의 완전한 목표는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땅이 아름다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의 삶이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풍성한 삶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촉촉한 말씀의 단비로 말미암아 늘 부드러운 심령을 유지하는 것으로의 변화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에서의 목표가 단순히 아름다운 열매만 맺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이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열매는 반드시 좋은 땅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농경사회라 땅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아름다운 땅이라는 것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풍성하며, 그 열매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그 땅의 농산물이 잘 되어 창고에 풍성하게 거둬들일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우리 삶의 일부만 바뀐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삶의 전부가 바뀐 사람이 진짜 돌아간 사람입니다. 돌 밭이, 가시 밭이 완전히 옥토로 바뀐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룩(성결성)이 회복되고 은혜가 풍성함으로 인격이 부드러워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같이 있는 신자가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입술 가운데서, 즉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입술 속에서 인정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하나님 안에 있는 평안을, 성령의 확신과 충만함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고, 오히려 우리들의 아름다운 땅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따뜻한 바람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느 땅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기초가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여러분을 복되다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서있는 현실이 표류하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신앙 생활의 베이직이 무너졌기에 다시금 그 기본을 역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시금 신앙의 베이직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그토록 의지했던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고 시험을 주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만군의 주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니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장 3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두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신 약속의 말씀을 우리의 모든 부분에 시험해 볼 정도로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다지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과 삶의 모든 부분이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