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열정 Passion in the Life of Belief
성경본문: 로마서 12장 11절
2주 전에 가족들과 함께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번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볼 때마다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 나옵니다. 때론 웃기도 하고 때론 진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 날 프로그램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짬뽕 대결”이었습니다. 중식업계의 프로 두 분이 나와서 자신의 장기를 보여줍니다. 한 분은 백짬뽕으로 다른 한분은 홍짬뽕으로 승부를 하는데 밀가루 반죽을 쳐서 4미터짜리 면을 뽑아내는 기술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힘도 힘이려니와 그것을 행하는 그분의 얼굴 속에는 자신감의 미소가 넘쳐 있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그 엄청난 양의 해물을 해감시키고 볶아대는데 한 사람을 위한 짬뽕이라기 보다는 일가족을 위한 어마어마한 양을 균등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요리합니다. 여유를 가지면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키워 주세요’라는 코너를 통해 중학생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이었지만 3개의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는 테크닉뿐만 아니라 어려운 곡들을 표현하는 능력과 함께 연주단과 하는 조화력이 굉장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보면서 동시에 느낀 것이 바로 그들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을 위해 집중력을 가지고 열정을 표출해 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을 하면서 이런 아름다운 열정을 품어낼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의 즐거움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표출해 나올 수 있을까요? 예배를 위해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엄숙하다 못해 너무 무거워 보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장 4절)”고 들었지만 좀 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장 27절)”고 하지만 우리 모습이 주 안에서 정작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는지는 궁금합니다.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장 11절) 이 구절을 다른 성경들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십시오.”(현대인의 성경)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새번역)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공동번역) 오늘의 본문을 요약하자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체되어 있고, 때론 무기력한 우리 신앙생활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 생활 하면서 제일 정체될 수 있고때로는 권태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저 같은 목회자들입니다. 복음을 통한 생명 구원이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이지만, 일단 교회와 목회라는 장에 들어와서 하루 하루 양들을 돌보다 보면 처음의 사랑과 열정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몸에 익숙해진 채 형식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객체적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신앙의 이중적인 모습이지요. 그때마다 흠칫 흠칫 놀랍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목회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목회라는 틀에 갇혀서 자유함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구속해 버린 셈입니다. 심방과 설교와 행사가 목회자 자신의 내면을 가둬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목회는 해야 하기에 모든 것에서 생동감을 잃고 형식적으로 흐르고, 열정을 잃어버렸기에 끊임없이 나태와 권태가 목회자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자유함에서 나온 신앙의 단순함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다시금 신앙생활이 꼭 해야만 하는 강박관념(율법)에 얽매이기 된다면 십중팔구 신앙생활이 정체되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직분 맡으신 분들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초반에 환상을 통해 일곱 초대교회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에베소 교회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요한계시록 2장 2-3절) 에베소 교회는 굉장히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부분에서 열심은 나타나는데 이것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요한계시록 2장 3절) 처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대속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그 이름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아낌없이 하겠노라는 헌신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 감격해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노라는 떨림과 설레임입니다. 주님만 생각하면 예배 드림도, 전도하고 봉사 함도, 내 돈과 시간을 드려서 남을 돕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사하고 은혜가 되는 것이 바로 첫사랑입니다. 즉 신앙생활의 열정을 회복하라는 의미 가운데는 나의 신앙의 초점이 하나님께로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다시금 우리 안에 믿음과 성령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뜨거워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항상 모자람을 깨닫고 ‘이만하면 됐어’라는 생각보다 ‘나는 부족하다. 더 은혜 받아야 돼, 더 기도해야 해, 더 하나님을 알고 경험해야 돼.’라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을 힘써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내면을 한번 들여다 보시고, 내 믿음 생활의 출발점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주님에 대한 첫 사랑과 그 은혜의 감격을 회복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번째, 본문 말씀 그대로 우리 신앙 생활의 열정을 위해서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모면 우리는 전심으로(wholeheartedly)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적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의 상태는 우리의 신앙이 미적지근한 상태로부터 오게 됩니다. 앞서 사도 요한이 본 일곱 교회 환상을 말씀 드렸는데,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 도전도 없고, 편안한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이 더없이 평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은 위장된 평안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적지근함을 대단히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하여 도전하시기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장 18-19절) 즉 그들의 신앙 생활은 신앙의 위험을 무릎 쓰지 않고 세상과 적당한 타협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부유함은 정금을 연단할 정도의 강한 영적인 믿음도, 주님에 대한 순결한 흰 옷의 믿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회개가 없어도 신앙생활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주님은 입에서 토해 내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영국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목회한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이 교회의 소속 교인은 4,366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였습니다. 하루는 스펄전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12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66명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신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신앙의 뜨거움을 표출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게으름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성경은 잠언을 통해서든 다른 성경을 통해서든 게으름의 해악(잠언 6:6-9, 10:26, 13:4, 18:9, 24:30-34, 26:13-16)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 문제는 그것의 출발점이 죄된 속성(sinful Nature)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 나타난 것처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런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게으름이 세상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주님의 사역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참된 열정과 헌신을 담보하는 진지함을 요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게으름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향한 즐거움에서 표류하게 되고 그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이중성을 보이게 만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심령이 감동 받고 열정적인 것 같으나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열정을 갖는 얕은 신앙의 감동을 자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이 금방 식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감히 우리 안에 싹트는 미적지근함과 게으름에 대해서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장 17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은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로새서 3장 23-24절),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의 핵심은 열심을 가지고 “주를 섬기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올 한해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를 위해 결단했습니다. 사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이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흘러나가 우리의 삶의 영역 전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대하면 우리의 삶이 주를 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를 섬기는 삶의 예배를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1-2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한 일들과 기뻐하는 일들을 생각해보고 그런 일들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행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역이, 어떤 봉사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과감히 행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결과도 어떻게 나올 것인가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라(douleuo)”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 세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주인에 대한 종(doulos, slave)의 섬김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이라면 전적으로 종처럼 온전히 순종해서 섬기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이 말이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기에 쉬지 말고 끊임없이 섬기라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냥 가끔씩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항상성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즉 온전한 마음으로 꾸준히 부지런하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주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장 31절)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아름답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인 산 제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일관된 삶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친히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고 단순한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첫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우리 신앙 생활의 열정을 불어 넣어줄 것입니다. 신앙의 열정이 우리를 속이는 모든 신앙의 게으름을 몰아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복음을 위하여 미친 그 갈급함과 열정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열정으로 다시 한번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그 넘침 속에 함께 행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다같이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본문: 로마서 12장 11절
2주 전에 가족들과 함께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번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볼 때마다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 나옵니다. 때론 웃기도 하고 때론 진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 날 프로그램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짬뽕 대결”이었습니다. 중식업계의 프로 두 분이 나와서 자신의 장기를 보여줍니다. 한 분은 백짬뽕으로 다른 한분은 홍짬뽕으로 승부를 하는데 밀가루 반죽을 쳐서 4미터짜리 면을 뽑아내는 기술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힘도 힘이려니와 그것을 행하는 그분의 얼굴 속에는 자신감의 미소가 넘쳐 있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그 엄청난 양의 해물을 해감시키고 볶아대는데 한 사람을 위한 짬뽕이라기 보다는 일가족을 위한 어마어마한 양을 균등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요리합니다. 여유를 가지면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키워 주세요’라는 코너를 통해 중학생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이었지만 3개의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는 테크닉뿐만 아니라 어려운 곡들을 표현하는 능력과 함께 연주단과 하는 조화력이 굉장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보면서 동시에 느낀 것이 바로 그들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을 위해 집중력을 가지고 열정을 표출해 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을 하면서 이런 아름다운 열정을 품어낼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의 즐거움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표출해 나올 수 있을까요? 예배를 위해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엄숙하다 못해 너무 무거워 보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장 4절)”고 들었지만 좀 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장 27절)”고 하지만 우리 모습이 주 안에서 정작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는지는 궁금합니다.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장 11절) 이 구절을 다른 성경들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십시오.”(현대인의 성경)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새번역)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공동번역) 오늘의 본문을 요약하자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체되어 있고, 때론 무기력한 우리 신앙생활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 생활 하면서 제일 정체될 수 있고때로는 권태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저 같은 목회자들입니다. 복음을 통한 생명 구원이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이지만, 일단 교회와 목회라는 장에 들어와서 하루 하루 양들을 돌보다 보면 처음의 사랑과 열정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몸에 익숙해진 채 형식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객체적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신앙의 이중적인 모습이지요. 그때마다 흠칫 흠칫 놀랍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목회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목회라는 틀에 갇혀서 자유함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구속해 버린 셈입니다. 심방과 설교와 행사가 목회자 자신의 내면을 가둬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목회는 해야 하기에 모든 것에서 생동감을 잃고 형식적으로 흐르고, 열정을 잃어버렸기에 끊임없이 나태와 권태가 목회자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자유함에서 나온 신앙의 단순함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다시금 신앙생활이 꼭 해야만 하는 강박관념(율법)에 얽매이기 된다면 십중팔구 신앙생활이 정체되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직분 맡으신 분들이 지치고 힘들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초반에 환상을 통해 일곱 초대교회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에베소 교회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요한계시록 2장 2-3절) 에베소 교회는 굉장히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부분에서 열심은 나타나는데 이것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요한계시록 2장 3절) 처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대속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그 이름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아낌없이 하겠노라는 헌신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 감격해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노라는 떨림과 설레임입니다. 주님만 생각하면 예배 드림도, 전도하고 봉사 함도, 내 돈과 시간을 드려서 남을 돕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사하고 은혜가 되는 것이 바로 첫사랑입니다. 즉 신앙생활의 열정을 회복하라는 의미 가운데는 나의 신앙의 초점이 하나님께로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다시금 우리 안에 믿음과 성령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뜨거워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항상 모자람을 깨닫고 ‘이만하면 됐어’라는 생각보다 ‘나는 부족하다. 더 은혜 받아야 돼, 더 기도해야 해, 더 하나님을 알고 경험해야 돼.’라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을 힘써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내면을 한번 들여다 보시고, 내 믿음 생활의 출발점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주님에 대한 첫 사랑과 그 은혜의 감격을 회복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번째, 본문 말씀 그대로 우리 신앙 생활의 열정을 위해서 우리는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모면 우리는 전심으로(wholeheartedly)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적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의 상태는 우리의 신앙이 미적지근한 상태로부터 오게 됩니다. 앞서 사도 요한이 본 일곱 교회 환상을 말씀 드렸는데, 그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 도전도 없고, 편안한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이 더없이 평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은 위장된 평안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적지근함을 대단히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하여 도전하시기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요한계시록 3장 18-19절) 즉 그들의 신앙 생활은 신앙의 위험을 무릎 쓰지 않고 세상과 적당한 타협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부유함은 정금을 연단할 정도의 강한 영적인 믿음도, 주님에 대한 순결한 흰 옷의 믿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회개가 없어도 신앙생활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주님은 입에서 토해 내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영국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목회한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이 교회의 소속 교인은 4,366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였습니다. 하루는 스펄전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12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66명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신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신앙의 뜨거움을 표출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게으름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성경은 잠언을 통해서든 다른 성경을 통해서든 게으름의 해악(잠언 6:6-9, 10:26, 13:4, 18:9, 24:30-34, 26:13-16)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 문제는 그것의 출발점이 죄된 속성(sinful Nature)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 나타난 것처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런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게으름이 세상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주님의 사역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참된 열정과 헌신을 담보하는 진지함을 요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게으름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향한 즐거움에서 표류하게 되고 그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이중성을 보이게 만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심령이 감동 받고 열정적인 것 같으나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열정을 갖는 얕은 신앙의 감동을 자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이 금방 식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감히 우리 안에 싹트는 미적지근함과 게으름에 대해서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장 17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은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로새서 3장 23-24절),
마지막으로 본문 말씀의 핵심은 열심을 가지고 “주를 섬기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올 한해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를 위해 결단했습니다. 사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이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흘러나가 우리의 삶의 영역 전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대하면 우리의 삶이 주를 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를 섬기는 삶의 예배를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1-2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한 일들과 기뻐하는 일들을 생각해보고 그런 일들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행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역이, 어떤 봉사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과감히 행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결과도 어떻게 나올 것인가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라(douleuo)”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 세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주인에 대한 종(doulos, slave)의 섬김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이라면 전적으로 종처럼 온전히 순종해서 섬기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이 말이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기에 쉬지 말고 끊임없이 섬기라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냥 가끔씩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항상성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즉 온전한 마음으로 꾸준히 부지런하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주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장 31절)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아름답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인 산 제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일관된 삶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친히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고 단순한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첫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우리 신앙 생활의 열정을 불어 넣어줄 것입니다. 신앙의 열정이 우리를 속이는 모든 신앙의 게으름을 몰아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복음을 위하여 미친 그 갈급함과 열정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열정으로 다시 한번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그 넘침 속에 함께 행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다같이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