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6:
복음의 종이 된 자유인 Being a Servant for the Gospel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9장 19-23절 (1 Corinthians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종종 종이 된다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일본의 종이 되어 오랫동안 살아왔던 역사적 피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찌됐든 외면적으로 종이 된다는 말에는 남의 밑에 들어가서 복종해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감과 자유를 제한당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싫어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19절) 그 이유로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고린도교인들에게 이 말을 했을까요?
우선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논쟁점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논의의 주제는 우상숭배와 음식 나눔으로 인한 교회의 시험이 주요 주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입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제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니 우리에게 이 세상의 우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자유자로서 당시 주변 환경과 풍속과 음식등에 거리낄 것이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제의에 참석은 하지만 문화의 하나로서 그것을 넘어서고 신앙 양심에 거칠 것이 못되고,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들이 시장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접할 때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세례와 성만찬을 매번 하기 때문에 구원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소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믿기로 시작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우리가 이방 신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옳은지, 혹 남의 초대를 받고서도 눈 앞에 차려진 음식들과 고기들을 보고 혹시나 이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시장에 가서도 그들 앞에 놓인 고기가 신전 제의에 사용된 것이었는지 늘 물어보며 염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이런 믿음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오는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이 주변 세상 문화에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각각이고 그 태도에서 누리는 자유함의 강도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어떤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뚜렷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유인으로서 지식에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지식의 종이 되어 교만과 방종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국은 구원의 패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약과 연결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세례와 매 모임마다 함께 하는 성만찬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면 신학적으로는 이런 그들의 모습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온 음식과 고기들을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음식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들 속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어도 여전히 애굽의 이방 풍속을 그리워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고 하나님을 구원을 의심하며 원망했듯이 그러한 옛사람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직업을 따라 참여했던 아프로디테와 각종 이방 신들에 대한 제의가 더 이상 우상숭배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러워했고 선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 중에 신전 창기들과 간음을 행한 옛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례 받았으니까, 우리는 성만찬을 하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으니까 괜찮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그들의 현세적 삶을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데 이만큼 타협한다고 뭐 어때? 세상을 살면서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아. 예수 믿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때론 예수님도 이렇게 했잖아. 성경에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잖아?’ 우리들도 역시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을 얼마나 우리의 신앙의 지식으로 정당화하고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믿음의 지식으로 굳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지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겸손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들을 판단과 우리 삶의 정당화의 잣대로 들이 내밀지 마시고. 오히려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지 우리를 온전히 세울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또 10장 23-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들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덕을 세우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우리가 누릴 자유는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얻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전도와 믿음의 덕을 세울 줄 아는 사랑의 매임이 필요합니다. 사실 자원하여 매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매칠년 안식년 때에 해방된 종들이 주인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고마워 자발적인 종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귀를 뚦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하대하거나 막대하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종이지만 그들 아들처럼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상호이해가 성립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에 매여 자발적으로 섬김의 종이 되는 경우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합니다.
서른 셋 나이로 200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깊은 신앙의 감동을 남겨주고 떠난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인 안수현 형제입니다. 2000년도에 한국에 의약분업 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병원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다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설령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밤에 몰래 와서 진찰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당시 대세는 파업이었습니다. 특별히 위계질서가 엄한 병원에서 개인행동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 안암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였던 안수현 형제는 홀로 남아서 끼니를 걸러가며 밤을 새우며 환자들을 지켰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의 명분이 많이 있었지만, 의사란 환자 곁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소신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앞으로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파업 병동을 지켰습니다. 이때 사람들 중에 드러내놓고 혼자 튄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 논리에 밀려 위로 받지 못하고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병원에서 도움이 될 길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위해 기도하면서 병원에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고대병원 내과 R2 스티그마 안수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양심에 비추어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혹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음식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밝히면 그것을 먹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린도전서 10장 29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같이,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 같이 된다는 말은 사랑에 근거한 자유함의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신 방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얻기 위한 낮아짐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요 희생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오늘 똑 같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신 내용 가운데 저의 마음을 사로 잡는 예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이곳 보스톤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계셨던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로버스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고 철저한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브룩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이라는 푯말을 걸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 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이 실화는 참으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복음을 위해 사랑과 섬김의 자발적인 종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복음의 지식으로 자유함을 누리지만 그 풍성한 지식에는 늘 겸손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절제함과 담대함이 드러나 사랑에 매인 종이 되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복음의 종이 된 자유인 Being a Servant for the Gospel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9장 19-23절 (1 Corinthians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종종 종이 된다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일본의 종이 되어 오랫동안 살아왔던 역사적 피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찌됐든 외면적으로 종이 된다는 말에는 남의 밑에 들어가서 복종해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감과 자유를 제한당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싫어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19절) 그 이유로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고린도교인들에게 이 말을 했을까요?
우선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논쟁점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논의의 주제는 우상숭배와 음식 나눔으로 인한 교회의 시험이 주요 주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입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제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니 우리에게 이 세상의 우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자유자로서 당시 주변 환경과 풍속과 음식등에 거리낄 것이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제의에 참석은 하지만 문화의 하나로서 그것을 넘어서고 신앙 양심에 거칠 것이 못되고,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들이 시장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접할 때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세례와 성만찬을 매번 하기 때문에 구원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소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믿기로 시작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우리가 이방 신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옳은지, 혹 남의 초대를 받고서도 눈 앞에 차려진 음식들과 고기들을 보고 혹시나 이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시장에 가서도 그들 앞에 놓인 고기가 신전 제의에 사용된 것이었는지 늘 물어보며 염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이런 믿음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오는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이 주변 세상 문화에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각각이고 그 태도에서 누리는 자유함의 강도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어떤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뚜렷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유인으로서 지식에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지식의 종이 되어 교만과 방종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국은 구원의 패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약과 연결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세례와 매 모임마다 함께 하는 성만찬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면 신학적으로는 이런 그들의 모습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온 음식과 고기들을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음식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들 속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어도 여전히 애굽의 이방 풍속을 그리워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고 하나님을 구원을 의심하며 원망했듯이 그러한 옛사람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직업을 따라 참여했던 아프로디테와 각종 이방 신들에 대한 제의가 더 이상 우상숭배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러워했고 선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 중에 신전 창기들과 간음을 행한 옛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례 받았으니까, 우리는 성만찬을 하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으니까 괜찮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그들의 현세적 삶을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데 이만큼 타협한다고 뭐 어때? 세상을 살면서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아. 예수 믿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때론 예수님도 이렇게 했잖아. 성경에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잖아?’ 우리들도 역시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을 얼마나 우리의 신앙의 지식으로 정당화하고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믿음의 지식으로 굳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지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겸손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들을 판단과 우리 삶의 정당화의 잣대로 들이 내밀지 마시고. 오히려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지 우리를 온전히 세울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또 10장 23-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들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덕을 세우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우리가 누릴 자유는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얻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전도와 믿음의 덕을 세울 줄 아는 사랑의 매임이 필요합니다. 사실 자원하여 매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매칠년 안식년 때에 해방된 종들이 주인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고마워 자발적인 종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귀를 뚦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하대하거나 막대하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종이지만 그들 아들처럼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상호이해가 성립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에 매여 자발적으로 섬김의 종이 되는 경우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합니다.
서른 셋 나이로 200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깊은 신앙의 감동을 남겨주고 떠난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인 안수현 형제입니다. 2000년도에 한국에 의약분업 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병원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다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설령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밤에 몰래 와서 진찰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당시 대세는 파업이었습니다. 특별히 위계질서가 엄한 병원에서 개인행동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 안암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였던 안수현 형제는 홀로 남아서 끼니를 걸러가며 밤을 새우며 환자들을 지켰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의 명분이 많이 있었지만, 의사란 환자 곁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소신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앞으로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파업 병동을 지켰습니다. 이때 사람들 중에 드러내놓고 혼자 튄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 논리에 밀려 위로 받지 못하고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병원에서 도움이 될 길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위해 기도하면서 병원에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고대병원 내과 R2 스티그마 안수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양심에 비추어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혹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음식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밝히면 그것을 먹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린도전서 10장 29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같이,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 같이 된다는 말은 사랑에 근거한 자유함의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신 방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얻기 위한 낮아짐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요 희생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오늘 똑 같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신 내용 가운데 저의 마음을 사로 잡는 예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이곳 보스톤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계셨던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로버스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고 철저한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브룩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이라는 푯말을 걸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 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이 실화는 참으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복음을 위해 사랑과 섬김의 자발적인 종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복음의 지식으로 자유함을 누리지만 그 풍성한 지식에는 늘 겸손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절제함과 담대함이 드러나 사랑에 매인 종이 되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