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 시리즈 2. 믿음의 소수: A Few Good Men
성경본문: 사사기 7장 15~18절
우리가 매일 보는 핸드폰(Cellular Phone) 광고는 미국의 대표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광고 중에 Verizon이나 AT&T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Verizon의 경우 대학생 3명을 앉혀놓고 한 사람이 도표를 보여줍니다. 각 회사의 사용자수와 기지국 수와 속도를 그래프로 보여주면서 어떤 회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버라이즌을 선택합니다. AT&T의 경우eh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실에서 선생님 1명과 1학년 정도되는 어린 아이들 4명 정도 등장 시킨 후에 선생님이 이렇게 물어봅니다. “많은 것이 좋습니까? 적은 것이 좋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아이들은 “많은 것이요! more and more better!”: 또 다른 광고는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이 가장 크고 많은 숫자입니까?” “Infinity times infinity.” 현대인들은 보다 많은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집안에 생필품을 쌓아놔야 마음이 놓이고, 자본을 축적해야 안심하며, 젊은이들은 페이스북을 통해서 친구들을 늘리고 정신없이 그들과 소통해야만 사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도 크고 빠른 것을 선호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하나라도 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하나 더 해야만 더 나은 삶을 산다고들 생각합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소유든 일이든 행사든 많으면 많을 수록, 크면 클수록,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 속에 무의식 중에 잠재되어 있는 생각들입니다. 비단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있을려면 땅도 넓고 커야 하고, 국가적인 부(富)와 군사력도 최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바로 이런 것에 기초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들이 주는 편리함과 안전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이런 생각들을 선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잎이 무성한, 건강하고 힘이 있는 나무들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좀 다른 양상을 띱니다. 잎이 무성하고 튼튼한 가지를 자랑하는 외형적인 나무가 되기보다는 항상 그 뿌리가 튼튼하고 깊은 것을 자랑하는 믿음의 역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보다는 소수를, 빠른 것 보다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는 움직임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뿌리가 깊으면 당연히 줄기와 잎이 무성하고 오래간다는 사실을 신앙 여정에 빗대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런 하나님의 생각과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이 민족이 아닌 아브라함 한 개인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듯이, 그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들 민족이 많아진 것도 역시 한 사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70만명이나 되는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의 종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낸 사람은 모세 한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동일한 역사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7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등장하고 있는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라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떻게 이것을 적용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고,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믿음의 소수”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의 생성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사기 6장을 마치면서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다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기 8장 10절에 보니까 그 숫자가 13만 5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전 같았으면 산으로, 동굴로, 혹은 가시 덤불 속으로 몸을 숨기고 살기 위해 도망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여룹바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사 기드온에게 임했고, 그는 전쟁을 알리고 군인들을 소집하는 나팔을 힘있게 불어댔습니다. 그리고 아비에셀 집안을 포함한 므낫세 지파과 아셀과 스블론, 그리고 납달리에서 32,000이나 되는 많은 군사가 모여 미디안 진과 대치하여 남편에 있는 하롯 샘 곁에 진을 치게 됩니다. 얼추해서 4.5 대 1 정도 되는 비율로 군대 진영이 짜여진 것입니다. 사람들 생각에, “그래, 조금 힘이 들어도 해볼 만 하겠어.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고 그래도 내가 한 두 사람 더 막으면 되지.” 이런 생각들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전쟁을 시작하라고 선포하기 보다 다른 명령을 내립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7장 2-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너무 많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장에 “아니, 지금 4.5 대 1로 하는 싸움도 만만찮은 마당에 너무 많다니요?”라는 불평이 터져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했고, 당일에 두려움에 떠는 2만 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고, 만 명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하나님의 첫번째 명령 속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의5대 사사 기드온이 등장하는 사사기 6-8장에서 전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흐르는 정서는 ‘두려움’이라는 단어입니다. 미디안에 대한 두려움, 먹고 살고자 하는 두려움,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두려움, 모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물질적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두려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 실직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자녀들과의 문제가 생길까 봐 염려하는 두려움, 우리의 영이 현 시대를 따라가는 많은 사람과 다를까 하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 두려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있게 만드는 좋은 요소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에 사로 잡히면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무너지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사탄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로 놓친 것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상 것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생기가 없고 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흔들리고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힘에 대해서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시편은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편 34편 9절)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장 28절) 시편과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면 우리가 없어질 것들에 대해서, 보이는 현실에 대해서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가 있으면 정죄함(제약, 굴레, 억압, 징벌)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왜나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외에 다른 무언가에 사로 잡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의 결박을 풀고 참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심으로 복음 안에서 자유하심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금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적인 눈이 닫힌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여러 논란이 일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남은 사람들이나 돌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쏟아졌을 불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불평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돌려 보냈고, 이만 이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실제적인 전쟁이든, 영적인 전쟁이든 하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철저히 Surrender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런 Surrender Test를 일 만명의 군사가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절 말씀에서 그들의 숫자가 아직 많다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하롯샘)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너를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7장 4절) 그래서 기드온 남은 일 만명의 군사들을 물가로 내려가서 두 종류의 부류로 나누게 됩니다. 한 종류의 부류는 정신없이 전쟁에 달려왔기 때문에 개처럼 물을 막 마시거나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마시는 사람들, 그리고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핣는 사람들. 전자는 대다수인 9천 700명이나 되었고, 후자는 아주 작은 300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중에 300명만 남깁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7장 7절) 이들은 목이 말라도 배고 고파도 잠이 쏟아져도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깨닫고 끝까지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군기 테스트를 통과한 최정예 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짜 군인 300명이 남은 것입니다.
결국 미디안의 13만 5천명과 싸우기 위해 300명만이 남았습니다. 4.5 대 1에서 이제 450대 1로 바뀐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큰 일이 아니지 싶습니다. 겨우 해 볼만 했는데, 이제 가능성 제로의 상태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도 남은 300명도 불평하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군대를 감원하기 전에 이렇게 당신의 계획을 밝혀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르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7장 2절)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많은 숫자는 우리들의 교만을 부추길 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신 전쟁을 하는 사람들 의식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는가라는 확신을 저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전쟁의 주관자와 진행자가 하나님이심을 철저하게 신앙으로 고백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숫자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드러나는 이런 역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사무엘상 14장 6-7절)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요나단은 소수의 정예 부대로 블레셋을 물리치게 됩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칼과 창을 자랑하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다윗은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사무엘상 17장 45절). 결과는 다윗의 대승이었습니다. 1967년에 중동과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총 3번에 걸쳐 한국의 강원도 땅덩어리만한 이스라엘과 거대한 중동 연합군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3번 모두 숫자의 양상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한 달 만에, 10 여일 만에 그리고 마지막 3차 전쟁은 6일 만에 중동 연합군을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물질과 소유의 교만에서 벗어나 신앙의 겸손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그들의 대적들을 붙여주시고 큰 승리를 이끌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300명의 최정예 군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랄 것 없는 보리떡 한 덩어리로 비유하신 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300명을 뽑아놓고 바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전쟁의 때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고자 기드온과 그의 부관인 부라에게 적군인 미디안 군사들을 통하여 한 꿈을 보여주십니다.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신중한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적진에 잠입합니다. 그들이 미디안 진지에 도착했을 때 미디안 진영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7장 12절) 수많은 군대와 병거와 약대부대가 총 출동하여 이스라엘을 치고자 모인 모습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니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7장 13-14절) 하나님은 적군들의 꿈을 통해 기드온의 300용사는 ‘보리떡 한 덩어리’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십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라구요? 꿈에 나타난 보리떡 한 덩어리는 일반 보리떡 한 덩어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안에 힘이 실려 있습니다. 크기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굴러서 미디안 장막을 치고 그것을 무너뜨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큰 힘이 그 떡 한 덩어리에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든 보리떡 한 덩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할 큰 힘을 담고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이 꿈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벳세대 들녘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듣고 저녁에 되자 배가 고파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이라고 말씀합니다. “200 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있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라는 제자들의 항변에 베드로는 한 어린 아이의 점심을 가져 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그곳에 앉은 5000명을 먹이시고 남기기까지 합니다. 사복음서에 공통되게 기록된 이 기적(마태복음 14장 13-21절; 마가복음 6장 30-44절; 누가복음 9장 9-17절; 요한복음 6장 1-14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비록 어린 아이가 드린 보리떡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담길 때에는 그것의 형태와 가능성을 뛰어 넘는 큰 일을 한다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조그마한 빵 한 조각이지만, 하나님께서 쓰실 때에는 다함이 없는 빵 공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서 강론하실 때를 떠올립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장 20절) 하나님과 연결된 모든 것에는 그것이 사람이든, 행사이든, 계획이든, 혹은 물질이든 간에 엄청난 가능성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300명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동일한 상황과 형편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그들이 보는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대학원 동기 중에 한 분이 국제 기아대책본부에서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주로 맡고 있는 지역이 아시아 지역인데, 전쟁과 기근, 지진과 홍수 등 여러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나라를 찾아가서 그들을 돕는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이 단체의 구호가 “사랑의 복떡빵”입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의 빵(식량과 구호물품)을 함께 가져가서 그들을 섬기며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를 담당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가는 빵의 크기는 별 것 아니나 늘 그들이 경험하는 빵의 역사는 그들의 기대와 상상을 뛰어넘는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사용하시니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역사가 현장에서 엄청나게 벌어짐을 간증합니다.. ‘사랑의 복떡빵’ 사역은 바로 기드온의 ‘보리떡 한 덩어리’를 연상시킵니다. 확신하건대, 이 사역 또한 기드온과 300용사들의 역사처럼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미 경험하고 있고 더 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도 하나님 안에 있는 ‘보리떡 한 덩어리가’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도 삶 속에서 우리의 대적들을 통해, 혹은 믿음 없는 일반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부여 받았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이 실제적인 상황(현실)에서 어떻게 행동을 했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적군의 꿈과 그 해몽을 듣고 바로 그 날 밤에 기드온과 300 용사는 전쟁에 돌입합니다. 그들 앞에 놓인 13만 5천명의 미디안 연합군대가 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랑하는 약대 군대가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 말씀과 확신에 의지하여 기드온을 따라 하나님의 전쟁을 하게 됩니다. 기드온은 300명을 3대로 나누어 각각의 군인들이 한 손에는 나팔을 한 손에는 횃불을 감춘 항아리를 들고 나아가게 합니다. 당시의 전쟁이 칼과 창을 가지고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이상한 전법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실수가 없고 완벽한 것임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칼과 창은 적군과 직접 부딪혀서 싸울 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군과 직접 부딪히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 진가에 도달했을 때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300 용사도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며 횃불을 들고 나팔을 크게 미디안 진영을 향해 불고 외쳤습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성경은 7장 21-23절에서 그들의 전쟁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 한마디로 기드온과 300용사의 나팔소리로 인하여 미디안 진영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난 것입니다. 같은 군사들끼리 서로 치고 죽입니다. 급기야 서로 도망가기에 급급합니다. 13만 5천이라는 숫자가 무색합니다. 므낫세 족속을 비롯하여 납달리와 아셀 지파가 그들을 좇아 벧 바라와 요단 나루턱에서 진멸합니다. 13만 중 12만 명이 죽고 남은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와 만 오천명의 군대를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쉬지 않고 좇아서 완전히 진멸합니다. 그리함으로 기드온과 300 용사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목하였으모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사십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8장 28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드온의 300 용사가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날의 전쟁에서 피곤하고 지치고, 이만 하면 됐다 싶을 텐데 그들은 미디안 잔당(여전히 그들보다 많은 일만 오천명)을 끝까지 추격해서 섬멸했습니다. 하나님께 부여 받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중도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드온과 300용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야 말로 진짜 신앙의 용사들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사명을 위해 우리의 수고가 아낌없이 쓰여지는 헌신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날의 승리는 오늘날 성경 사역을 하고 있는 기드온 협회의 성경배포 사역과 여러 구제 단체의 보리떡 운동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서 이런 사역자들과 기적을 배푸시길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도전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만을 두려워하고 그 분께 철저히 순종했던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잘 감당했던 기드온의 300 용사 안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의 숫자적 놀음에 놀아나는 힘 없는, 잎만 무성한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신앙의 뿌리가 깊은 진정한 ‘믿음의 소수’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세상 속에 있어야 할 빛과 소금의 양이 먼저 교훈이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빛이지만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처럼, 1000 그램 중에 35그램만 있어도 부패를 방지할 수 있고 그 짠 맛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다 소금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의 가치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진정한 믿음의 소수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의 순전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여전히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본문: 사사기 7장 15~18절
우리가 매일 보는 핸드폰(Cellular Phone) 광고는 미국의 대표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광고 중에 Verizon이나 AT&T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Verizon의 경우 대학생 3명을 앉혀놓고 한 사람이 도표를 보여줍니다. 각 회사의 사용자수와 기지국 수와 속도를 그래프로 보여주면서 어떤 회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버라이즌을 선택합니다. AT&T의 경우eh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실에서 선생님 1명과 1학년 정도되는 어린 아이들 4명 정도 등장 시킨 후에 선생님이 이렇게 물어봅니다. “많은 것이 좋습니까? 적은 것이 좋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아이들은 “많은 것이요! more and more better!”: 또 다른 광고는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이 가장 크고 많은 숫자입니까?” “Infinity times infinity.” 현대인들은 보다 많은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집안에 생필품을 쌓아놔야 마음이 놓이고, 자본을 축적해야 안심하며, 젊은이들은 페이스북을 통해서 친구들을 늘리고 정신없이 그들과 소통해야만 사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도 크고 빠른 것을 선호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하나라도 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하나 더 해야만 더 나은 삶을 산다고들 생각합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소유든 일이든 행사든 많으면 많을 수록, 크면 클수록,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 속에 무의식 중에 잠재되어 있는 생각들입니다. 비단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있을려면 땅도 넓고 커야 하고, 국가적인 부(富)와 군사력도 최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바로 이런 것에 기초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들이 주는 편리함과 안전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이런 생각들을 선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잎이 무성한, 건강하고 힘이 있는 나무들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좀 다른 양상을 띱니다. 잎이 무성하고 튼튼한 가지를 자랑하는 외형적인 나무가 되기보다는 항상 그 뿌리가 튼튼하고 깊은 것을 자랑하는 믿음의 역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보다는 소수를, 빠른 것 보다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는 움직임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뿌리가 깊으면 당연히 줄기와 잎이 무성하고 오래간다는 사실을 신앙 여정에 빗대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런 하나님의 생각과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이 민족이 아닌 아브라함 한 개인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듯이, 그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들 민족이 많아진 것도 역시 한 사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70만명이나 되는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의 종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낸 사람은 모세 한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동일한 역사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7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등장하고 있는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라 무엇이며 우리 삶에 어떻게 이것을 적용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고,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믿음의 소수”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의 생성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사기 6장을 마치면서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다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기 8장 10절에 보니까 그 숫자가 13만 5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전 같았으면 산으로, 동굴로, 혹은 가시 덤불 속으로 몸을 숨기고 살기 위해 도망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여룹바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사 기드온에게 임했고, 그는 전쟁을 알리고 군인들을 소집하는 나팔을 힘있게 불어댔습니다. 그리고 아비에셀 집안을 포함한 므낫세 지파과 아셀과 스블론, 그리고 납달리에서 32,000이나 되는 많은 군사가 모여 미디안 진과 대치하여 남편에 있는 하롯 샘 곁에 진을 치게 됩니다. 얼추해서 4.5 대 1 정도 되는 비율로 군대 진영이 짜여진 것입니다. 사람들 생각에, “그래, 조금 힘이 들어도 해볼 만 하겠어.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고 그래도 내가 한 두 사람 더 막으면 되지.” 이런 생각들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전쟁을 시작하라고 선포하기 보다 다른 명령을 내립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7장 2-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너무 많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장에 “아니, 지금 4.5 대 1로 하는 싸움도 만만찮은 마당에 너무 많다니요?”라는 불평이 터져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했고, 당일에 두려움에 떠는 2만 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고, 만 명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하나님의 첫번째 명령 속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의5대 사사 기드온이 등장하는 사사기 6-8장에서 전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흐르는 정서는 ‘두려움’이라는 단어입니다. 미디안에 대한 두려움, 먹고 살고자 하는 두려움,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두려움, 모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물질적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두려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 실직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자녀들과의 문제가 생길까 봐 염려하는 두려움, 우리의 영이 현 시대를 따라가는 많은 사람과 다를까 하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 두려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있게 만드는 좋은 요소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에 사로 잡히면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무너지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사탄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로 놓친 것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상 것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생기가 없고 죽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흔들리고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힘에 대해서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시편은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편 34편 9절)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장 28절) 시편과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면 우리가 없어질 것들에 대해서, 보이는 현실에 대해서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가 있으면 정죄함(제약, 굴레, 억압, 징벌)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왜나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외에 다른 무언가에 사로 잡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의 결박을 풀고 참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심으로 복음 안에서 자유하심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금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적인 눈이 닫힌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여러 논란이 일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남은 사람들이나 돌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쏟아졌을 불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불평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돌려 보냈고, 이만 이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실제적인 전쟁이든, 영적인 전쟁이든 하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철저히 Surrender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런 Surrender Test를 일 만명의 군사가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절 말씀에서 그들의 숫자가 아직 많다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하롯샘)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너를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7장 4절) 그래서 기드온 남은 일 만명의 군사들을 물가로 내려가서 두 종류의 부류로 나누게 됩니다. 한 종류의 부류는 정신없이 전쟁에 달려왔기 때문에 개처럼 물을 막 마시거나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마시는 사람들, 그리고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핣는 사람들. 전자는 대다수인 9천 700명이나 되었고, 후자는 아주 작은 300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중에 300명만 남깁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임이니라.”(7장 7절) 이들은 목이 말라도 배고 고파도 잠이 쏟아져도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깨닫고 끝까지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군기 테스트를 통과한 최정예 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짜 군인 300명이 남은 것입니다.
결국 미디안의 13만 5천명과 싸우기 위해 300명만이 남았습니다. 4.5 대 1에서 이제 450대 1로 바뀐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큰 일이 아니지 싶습니다. 겨우 해 볼만 했는데, 이제 가능성 제로의 상태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도 남은 300명도 불평하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군대를 감원하기 전에 이렇게 당신의 계획을 밝혀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르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7장 2절)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많은 숫자는 우리들의 교만을 부추길 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신 전쟁을 하는 사람들 의식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는가라는 확신을 저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전쟁의 주관자와 진행자가 하나님이심을 철저하게 신앙으로 고백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숫자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드러나는 이런 역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사무엘상 14장 6-7절)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요나단은 소수의 정예 부대로 블레셋을 물리치게 됩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칼과 창을 자랑하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다윗은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사무엘상 17장 45절). 결과는 다윗의 대승이었습니다. 1967년에 중동과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총 3번에 걸쳐 한국의 강원도 땅덩어리만한 이스라엘과 거대한 중동 연합군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3번 모두 숫자의 양상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한 달 만에, 10 여일 만에 그리고 마지막 3차 전쟁은 6일 만에 중동 연합군을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물질과 소유의 교만에서 벗어나 신앙의 겸손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그들의 대적들을 붙여주시고 큰 승리를 이끌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300명의 최정예 군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랄 것 없는 보리떡 한 덩어리로 비유하신 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300명을 뽑아놓고 바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전쟁의 때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고자 기드온과 그의 부관인 부라에게 적군인 미디안 군사들을 통하여 한 꿈을 보여주십니다.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신중한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적진에 잠입합니다. 그들이 미디안 진지에 도착했을 때 미디안 진영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7장 12절) 수많은 군대와 병거와 약대부대가 총 출동하여 이스라엘을 치고자 모인 모습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니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7장 13-14절) 하나님은 적군들의 꿈을 통해 기드온의 300용사는 ‘보리떡 한 덩어리’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십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라구요? 꿈에 나타난 보리떡 한 덩어리는 일반 보리떡 한 덩어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안에 힘이 실려 있습니다. 크기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굴러서 미디안 장막을 치고 그것을 무너뜨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큰 힘이 그 떡 한 덩어리에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든 보리떡 한 덩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할 큰 힘을 담고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이 꿈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벳세대 들녘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리게 합니다. 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듣고 저녁에 되자 배가 고파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이라고 말씀합니다. “200 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있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라는 제자들의 항변에 베드로는 한 어린 아이의 점심을 가져 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그곳에 앉은 5000명을 먹이시고 남기기까지 합니다. 사복음서에 공통되게 기록된 이 기적(마태복음 14장 13-21절; 마가복음 6장 30-44절; 누가복음 9장 9-17절; 요한복음 6장 1-14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비록 어린 아이가 드린 보리떡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담길 때에는 그것의 형태와 가능성을 뛰어 넘는 큰 일을 한다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조그마한 빵 한 조각이지만, 하나님께서 쓰실 때에는 다함이 없는 빵 공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서 강론하실 때를 떠올립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장 20절) 하나님과 연결된 모든 것에는 그것이 사람이든, 행사이든, 계획이든, 혹은 물질이든 간에 엄청난 가능성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300명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동일한 상황과 형편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그들이 보는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대학원 동기 중에 한 분이 국제 기아대책본부에서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주로 맡고 있는 지역이 아시아 지역인데, 전쟁과 기근, 지진과 홍수 등 여러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나라를 찾아가서 그들을 돕는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이 단체의 구호가 “사랑의 복떡빵”입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의 빵(식량과 구호물품)을 함께 가져가서 그들을 섬기며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를 담당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가는 빵의 크기는 별 것 아니나 늘 그들이 경험하는 빵의 역사는 그들의 기대와 상상을 뛰어넘는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사용하시니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역사가 현장에서 엄청나게 벌어짐을 간증합니다.. ‘사랑의 복떡빵’ 사역은 바로 기드온의 ‘보리떡 한 덩어리’를 연상시킵니다. 확신하건대, 이 사역 또한 기드온과 300용사들의 역사처럼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미 경험하고 있고 더 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도 하나님 안에 있는 ‘보리떡 한 덩어리가’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도 삶 속에서 우리의 대적들을 통해, 혹은 믿음 없는 일반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부여 받았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이 실제적인 상황(현실)에서 어떻게 행동을 했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적군의 꿈과 그 해몽을 듣고 바로 그 날 밤에 기드온과 300 용사는 전쟁에 돌입합니다. 그들 앞에 놓인 13만 5천명의 미디안 연합군대가 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랑하는 약대 군대가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 말씀과 확신에 의지하여 기드온을 따라 하나님의 전쟁을 하게 됩니다. 기드온은 300명을 3대로 나누어 각각의 군인들이 한 손에는 나팔을 한 손에는 횃불을 감춘 항아리를 들고 나아가게 합니다. 당시의 전쟁이 칼과 창을 가지고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이상한 전법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실수가 없고 완벽한 것임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칼과 창은 적군과 직접 부딪혀서 싸울 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군과 직접 부딪히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 진가에 도달했을 때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300 용사도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며 횃불을 들고 나팔을 크게 미디안 진영을 향해 불고 외쳤습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성경은 7장 21-23절에서 그들의 전쟁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 한마디로 기드온과 300용사의 나팔소리로 인하여 미디안 진영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난 것입니다. 같은 군사들끼리 서로 치고 죽입니다. 급기야 서로 도망가기에 급급합니다. 13만 5천이라는 숫자가 무색합니다. 므낫세 족속을 비롯하여 납달리와 아셀 지파가 그들을 좇아 벧 바라와 요단 나루턱에서 진멸합니다. 13만 중 12만 명이 죽고 남은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와 만 오천명의 군대를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쉬지 않고 좇아서 완전히 진멸합니다. 그리함으로 기드온과 300 용사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목하였으모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사십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8장 28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드온의 300 용사가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날의 전쟁에서 피곤하고 지치고, 이만 하면 됐다 싶을 텐데 그들은 미디안 잔당(여전히 그들보다 많은 일만 오천명)을 끝까지 추격해서 섬멸했습니다. 하나님께 부여 받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중도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드온과 300용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야 말로 진짜 신앙의 용사들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사명을 위해 우리의 수고가 아낌없이 쓰여지는 헌신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날의 승리는 오늘날 성경 사역을 하고 있는 기드온 협회의 성경배포 사역과 여러 구제 단체의 보리떡 운동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서 이런 사역자들과 기적을 배푸시길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도전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만을 두려워하고 그 분께 철저히 순종했던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잘 감당했던 기드온의 300 용사 안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의 숫자적 놀음에 놀아나는 힘 없는, 잎만 무성한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신앙의 뿌리가 깊은 진정한 ‘믿음의 소수’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세상 속에 있어야 할 빛과 소금의 양이 먼저 교훈이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빛이지만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처럼, 1000 그램 중에 35그램만 있어도 부패를 방지할 수 있고 그 짠 맛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다 소금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의 가치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진정한 믿음의 소수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의 순전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여전히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