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5: On Marriage and Celibacy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7장 3-5절
지난 번 밴쿠버에 머물던 마지막 날 저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도시 구경을 하고, 귀국을 위해 이것 저것을 다 챙기신 부모님과 두분 친구분들 내외가 저와 함께 나란히 식탁에 앉았습니다. 말하자면 이삼십년 만에 만난 고향지기들이 10여일간의 긴 여행을 정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캐나다에 사시는 아버님 친구분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꺼냅니다. “아들 같지만, 그래도 이 시간 목사로도 우리한테 왔으니 목사님으로서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무거운 주제가 나와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글쎄요. 각자가 처한 상황과 형편을 먼저 들여다 봐야겠지요.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이혼을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성경의 몇 구절과 사례 몇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다른 친구 분은 ‘뭐 이렇게 좋은 날에 여행을 정리하고 친구들끼리 다음을 기약하고 칠십 넘은 우리의 생애를 어떻게 잘 마무리할까를 의논해야지 목사 아들이 왔다고 갑자기 뭔 이혼이냐?’고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내 마음 속으로는 오히려 서울 친구 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서 그냥 짧게 간단히 말씀 드렸습니다. 오히려 그분들 좋은 분위기를 제가 끼어 듦으로 인해 할배들 속에 잔심부름이나 하는 짐꾼 혹은 그저 편한 아들이 아닌 그분들 잠재의식 속에 ‘목사님’이란 적지 않은 부담감과 실재에 대한 질문을 편하게 묻고 싶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스톤에 돌아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왜 그분은 그런 질문을 했을까? 너무 좋아 보이는 그 두 부부가 황혼 이혼할 것도 아닌 것 같고, 자녀들도 아직 결혼하지 아니 했으니 그렇고… 그래도 주변에 소중한 사람이 어려운 과정을 겪는데 그래도 교회에는 나가시니 조그마한 신앙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와 줄려고 하고 있나 보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고3 부모라 학교에서 하는 Financial Aid Nights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지원하는데 연방정부와 Massachusetts의 Loan 프로그램 신청방법을 자세히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과정을 명쾌하게 듣던 중 발표자와 학부모들의 질의 시간이 있었는데 제 시선을 끄는, 이제는 제법 여기 보스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것이 되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신청서란에 부모의 인적 사항을 적는 난이 있는데, 부모가 누군지에 대해서 발표자가 진짜 함께 사는 생물학적인 부모, 입양 부모, 동거하는 부모, 이혼과 재혼으로 생기는 Stepdad, Stepmom, 그리고 동성결혼으로 함께 사는 아빠와 stepfather, 엄마와 stepmom이 그것이었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 범주가 한 두 가지였을 그것이 상당히 복잡해지고 많아졌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뭔가? 우리에게는 흔하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가까이 왔구나. 문제가 무엇일까? 결혼은 무엇이고 혼자 살면서 자녀를 입양해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그전부터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주제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현실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더욱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한번쯤은 말씀을 통해서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입니다. 얼핏 보면 결혼한 부부간에 의무를 다하라는 좁은 의미로 비쳐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는 보다 넓은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7장과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한 권면이 자세히 들어 있는 에베소서 5장을 함께 펴놓고 말씀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린도교회의 가정의 모습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몇 가지 현실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2절에 나오는 ‘음행’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표면적으로 결혼을 장려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이방 신들(아프로디테 등등)에 대한 제의 축제가 활발해 성적문란을 조장했던 로마 시대의 사회 문화적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내적으로는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가만히 스며든 이단인 영지주의의 폐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영은 거룩하고 육은 나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 하는 성적인 방종은 신앙적으로 괜찮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차피 썩어지고 없어지며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기에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결혼한 사람도 외도가 자연스러웠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동거나 성적인 문란함이 많았다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현실은 결혼한 사람들 간의 문제입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 나오는 단어 중에, ‘갈리운다’라는 단어와 ‘믿지 않는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 믿지 않는 일반 세상 사람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신앙과 가치관의 충돌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혼이라는 문제가 실제적으로 많이 불거졌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지 않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15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모습은 고린도교회 내에 상당부분 결혼하지 않는 독신자들(주로 처녀들)과 (주로 이혼이나 사별한) 과부들이 많이 존재했다라는 사실입니다. 34절과 36절을 보면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 그리고 36-37절에 ‘혼기도 지난 처녀 딸’이란 말과 ‘남편이 죽으면’이란 단어를 통해 그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정욕이나 음행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결혼하되(2절, 9절) 되도록이면 주의 일을 염려하여 자기와 같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유익하며(8절, 26절) 결혼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16절),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2절, 27절)이 성도의 삶이라고 고린도전서 7장에서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형편에 처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근본적으로 주고자 한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7장 7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결혼과 독신이라는 두 형태에 대해서는 (물론 혼기에 찬 자녀를 두신 부모님이나 혼기를 놓친 형제 자매님들에겐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은 꼭 해야 돼.’라는 필수요건이 아니라, 결혼이든 독신이든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입니다. 은사(gift)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는 single로 사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면 그들의 삶을 존중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결혼을 훨씬 더 권장하지만,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님 만을 소망하고 경건하게 하나님 뜻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면 그들의 의지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사람이든 독신자이든 간에 우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들로서 주어진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나오는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요한계시록 14장 4-5절)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따라 동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한 신부들로서 살아야 되는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린도후서 11장 2절) 우리는 모두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독신의 모습으로든 혹은 결혼한 부부의 모습으로든 그 각각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셨듯이 우리도 거룩한 신부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그런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번째로, 이미 결혼하신 분들과 결혼하실 분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결혼이 꼭 음행과 정욕의 시험을 피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결혼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7장 10절에서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3-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결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제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떠남”으로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두 부부가 연애든 중매든 일정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여 ‘연합’을 이루고, 결혼을 통한 성적 연합을 통해 마치 아교를 붙여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라기 2장에서는 결혼을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맺어 주신 언약(covenant)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the wife of your marriage covenant)로되 ….”(말라기 2장 14절)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때 목사님 앞에서 서로 선서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많은 가족들과 회중들 앞에서 서로 상대방을 향해, “나 OOO는 OOO를 아내/남편으로 맞아 죽음이 삶을 갈라 놓을 때까지 젊을 때나 늙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서약합니다.”라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특성상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절대적인 구속력이 있기에 결혼을 소중히 하고 그것을 지키기에 끝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마치 물건처럼 구입하고 마음에 안 들면 갈아치우는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부족하여도, 모자라도, 아교로 붙인 것처럼 정말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의 관계를 이루는 거룩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맺은 언약의 관계는 결혼한 부부에게 서로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7장 3절에서,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무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구체적인 결혼 생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결혼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중요한 의무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giving’(주심)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결혼한 현재로부터 미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내어 주셨듯이 부부도 서로 서로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합니다. ‘남편들아’라는 말을 보니 주로 남편들이 그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다 주고도 그것을 되갚으라고 요구하지 않듯이 결혼한 부부가 서로 서로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모든 부분까지 용납하고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주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이나 보스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개인적인 성향과 문화적인 의미로 동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연합의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겠다라는 말 속에는 다른 것은 다 주겠는데, 정작 필요하고 중요할 때 나는 나를 너에게 주지 않겠노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중에 동거하고 있는 자녀들이 있다면 이 점을 상기시키어 빨리 결혼하도록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한가지 의무는 에베소서 5장 28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앞선 구절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모습은 남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흔히 결혼은 사랑의 느낌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느낌은 평생 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action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두 부부가 그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사랑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즘의 속된 말처럼 자식들 다 키우고 60넘어 은퇴하고 무능력해진 남편에게 황혼이혼을 선언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경험하기 보다, 결혼 하셨다면 매년 매년의 결혼이 더욱 아름답고 성숙할 수 있도록 깊은 사랑을 계속해야만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TV 광고에서 보는 것처럼 맞잡고 가로수 길을 걷는 노부부를 보고 다시 손을 잡은 젋은 부부의 힘찬 발걸음과 사랑에 대한 맹세처럼 여러분의 부부의 모습이 더더욱 아름다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혼과 재혼을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7-9절에서 바리새인과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바리새인이)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사도 바울도 불신자와의 이혼에 대해서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7장 15절) 일면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 인정을 하십니다. 그래도 믿음의 가정들은 이혼률이 적고 가정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어도 우리 주변에 너무도 흔한 것이 이혼과 재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출발점이 우리 마음의 완악함과 음행/정욕에 대한 시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하면, 그리고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는 26절 말씀처럼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가정 선교사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혼에 대해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동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7장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사단의 끊임없는 시험에 이기지 못하여 정말로 부부간에 많은 고통과 상처를 경험하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별거나 이혼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 이혼에 대해서 사람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교회의 책임이 먼저임을 자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지고 조각난 가정을 가진 주의 형제 자매들이 다시금 말씀을 통해 회복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을 때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제 2의 선물로 주어진 그 부부관계와 가정을 소중히 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독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때가 점점 가까이 옴으로 하나님과 주님에 대해서 거룩한 신부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부부 간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희생과 생이 다하기까지 서로 아낌없이 노력하는 사랑의 행위로 여러분의 결혼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혹 하나님의 은사가 있어 독신으로 살면서 거룩함을 지키고자 하는 분의 의사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정말 많은 고통 중에 스스로와 서로간의 노력에 반해 그래도 인생의 생체기가 될 그런 이혼을 하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그런 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먼저 헤아려 주시고 그런 분들이 믿음과 말씀으로 새롭게 가정을 꾸리고 재혼함으로 부부관계를 맺을 때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7장 3-5절
지난 번 밴쿠버에 머물던 마지막 날 저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도시 구경을 하고, 귀국을 위해 이것 저것을 다 챙기신 부모님과 두분 친구분들 내외가 저와 함께 나란히 식탁에 앉았습니다. 말하자면 이삼십년 만에 만난 고향지기들이 10여일간의 긴 여행을 정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캐나다에 사시는 아버님 친구분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꺼냅니다. “아들 같지만, 그래도 이 시간 목사로도 우리한테 왔으니 목사님으로서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무거운 주제가 나와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글쎄요. 각자가 처한 상황과 형편을 먼저 들여다 봐야겠지요.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이혼을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성경의 몇 구절과 사례 몇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다른 친구 분은 ‘뭐 이렇게 좋은 날에 여행을 정리하고 친구들끼리 다음을 기약하고 칠십 넘은 우리의 생애를 어떻게 잘 마무리할까를 의논해야지 목사 아들이 왔다고 갑자기 뭔 이혼이냐?’고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내 마음 속으로는 오히려 서울 친구 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서 그냥 짧게 간단히 말씀 드렸습니다. 오히려 그분들 좋은 분위기를 제가 끼어 듦으로 인해 할배들 속에 잔심부름이나 하는 짐꾼 혹은 그저 편한 아들이 아닌 그분들 잠재의식 속에 ‘목사님’이란 적지 않은 부담감과 실재에 대한 질문을 편하게 묻고 싶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스톤에 돌아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왜 그분은 그런 질문을 했을까? 너무 좋아 보이는 그 두 부부가 황혼 이혼할 것도 아닌 것 같고, 자녀들도 아직 결혼하지 아니 했으니 그렇고… 그래도 주변에 소중한 사람이 어려운 과정을 겪는데 그래도 교회에는 나가시니 조그마한 신앙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와 줄려고 하고 있나 보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고3 부모라 학교에서 하는 Financial Aid Nights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지원하는데 연방정부와 Massachusetts의 Loan 프로그램 신청방법을 자세히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과정을 명쾌하게 듣던 중 발표자와 학부모들의 질의 시간이 있었는데 제 시선을 끄는, 이제는 제법 여기 보스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것이 되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신청서란에 부모의 인적 사항을 적는 난이 있는데, 부모가 누군지에 대해서 발표자가 진짜 함께 사는 생물학적인 부모, 입양 부모, 동거하는 부모, 이혼과 재혼으로 생기는 Stepdad, Stepmom, 그리고 동성결혼으로 함께 사는 아빠와 stepfather, 엄마와 stepmom이 그것이었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 범주가 한 두 가지였을 그것이 상당히 복잡해지고 많아졌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뭔가? 우리에게는 흔하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가까이 왔구나. 문제가 무엇일까? 결혼은 무엇이고 혼자 살면서 자녀를 입양해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그전부터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주제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현실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더욱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한번쯤은 말씀을 통해서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입니다. 얼핏 보면 결혼한 부부간에 의무를 다하라는 좁은 의미로 비쳐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는 보다 넓은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7장과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한 권면이 자세히 들어 있는 에베소서 5장을 함께 펴놓고 말씀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린도교회의 가정의 모습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몇 가지 현실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2절에 나오는 ‘음행’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표면적으로 결혼을 장려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이방 신들(아프로디테 등등)에 대한 제의 축제가 활발해 성적문란을 조장했던 로마 시대의 사회 문화적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내적으로는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가만히 스며든 이단인 영지주의의 폐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영은 거룩하고 육은 나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 하는 성적인 방종은 신앙적으로 괜찮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차피 썩어지고 없어지며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기에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결혼한 사람도 외도가 자연스러웠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동거나 성적인 문란함이 많았다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현실은 결혼한 사람들 간의 문제입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 나오는 단어 중에, ‘갈리운다’라는 단어와 ‘믿지 않는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 믿지 않는 일반 세상 사람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신앙과 가치관의 충돌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혼이라는 문제가 실제적으로 많이 불거졌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지 않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15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모습은 고린도교회 내에 상당부분 결혼하지 않는 독신자들(주로 처녀들)과 (주로 이혼이나 사별한) 과부들이 많이 존재했다라는 사실입니다. 34절과 36절을 보면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 그리고 36-37절에 ‘혼기도 지난 처녀 딸’이란 말과 ‘남편이 죽으면’이란 단어를 통해 그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정욕이나 음행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결혼하되(2절, 9절) 되도록이면 주의 일을 염려하여 자기와 같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유익하며(8절, 26절) 결혼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16절),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2절, 27절)이 성도의 삶이라고 고린도전서 7장에서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형편에 처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근본적으로 주고자 한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7장 7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결혼과 독신이라는 두 형태에 대해서는 (물론 혼기에 찬 자녀를 두신 부모님이나 혼기를 놓친 형제 자매님들에겐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은 꼭 해야 돼.’라는 필수요건이 아니라, 결혼이든 독신이든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입니다. 은사(gift)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는 single로 사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면 그들의 삶을 존중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결혼을 훨씬 더 권장하지만,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님 만을 소망하고 경건하게 하나님 뜻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면 그들의 의지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사람이든 독신자이든 간에 우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들로서 주어진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나오는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요한계시록 14장 4-5절)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따라 동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한 신부들로서 살아야 되는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린도후서 11장 2절) 우리는 모두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독신의 모습으로든 혹은 결혼한 부부의 모습으로든 그 각각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셨듯이 우리도 거룩한 신부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그런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번째로, 이미 결혼하신 분들과 결혼하실 분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결혼이 꼭 음행과 정욕의 시험을 피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결혼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7장 10절에서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3-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결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제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떠남”으로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두 부부가 연애든 중매든 일정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여 ‘연합’을 이루고, 결혼을 통한 성적 연합을 통해 마치 아교를 붙여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라기 2장에서는 결혼을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맺어 주신 언약(covenant)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the wife of your marriage covenant)로되 ….”(말라기 2장 14절)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때 목사님 앞에서 서로 선서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많은 가족들과 회중들 앞에서 서로 상대방을 향해, “나 OOO는 OOO를 아내/남편으로 맞아 죽음이 삶을 갈라 놓을 때까지 젊을 때나 늙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서약합니다.”라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특성상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절대적인 구속력이 있기에 결혼을 소중히 하고 그것을 지키기에 끝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마치 물건처럼 구입하고 마음에 안 들면 갈아치우는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부족하여도, 모자라도, 아교로 붙인 것처럼 정말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의 관계를 이루는 거룩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맺은 언약의 관계는 결혼한 부부에게 서로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7장 3절에서,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무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구체적인 결혼 생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결혼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중요한 의무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giving’(주심)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결혼한 현재로부터 미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내어 주셨듯이 부부도 서로 서로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합니다. ‘남편들아’라는 말을 보니 주로 남편들이 그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다 주고도 그것을 되갚으라고 요구하지 않듯이 결혼한 부부가 서로 서로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모든 부분까지 용납하고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주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이나 보스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개인적인 성향과 문화적인 의미로 동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연합의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겠다라는 말 속에는 다른 것은 다 주겠는데, 정작 필요하고 중요할 때 나는 나를 너에게 주지 않겠노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중에 동거하고 있는 자녀들이 있다면 이 점을 상기시키어 빨리 결혼하도록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한가지 의무는 에베소서 5장 28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앞선 구절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모습은 남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흔히 결혼은 사랑의 느낌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느낌은 평생 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action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두 부부가 그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사랑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즘의 속된 말처럼 자식들 다 키우고 60넘어 은퇴하고 무능력해진 남편에게 황혼이혼을 선언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경험하기 보다, 결혼 하셨다면 매년 매년의 결혼이 더욱 아름답고 성숙할 수 있도록 깊은 사랑을 계속해야만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TV 광고에서 보는 것처럼 맞잡고 가로수 길을 걷는 노부부를 보고 다시 손을 잡은 젋은 부부의 힘찬 발걸음과 사랑에 대한 맹세처럼 여러분의 부부의 모습이 더더욱 아름다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혼과 재혼을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7-9절에서 바리새인과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바리새인이)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사도 바울도 불신자와의 이혼에 대해서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7장 15절) 일면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 인정을 하십니다. 그래도 믿음의 가정들은 이혼률이 적고 가정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어도 우리 주변에 너무도 흔한 것이 이혼과 재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출발점이 우리 마음의 완악함과 음행/정욕에 대한 시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하면, 그리고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는 26절 말씀처럼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가정 선교사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혼에 대해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동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7장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사단의 끊임없는 시험에 이기지 못하여 정말로 부부간에 많은 고통과 상처를 경험하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별거나 이혼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 이혼에 대해서 사람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교회의 책임이 먼저임을 자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지고 조각난 가정을 가진 주의 형제 자매들이 다시금 말씀을 통해 회복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을 때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제 2의 선물로 주어진 그 부부관계와 가정을 소중히 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독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때가 점점 가까이 옴으로 하나님과 주님에 대해서 거룩한 신부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부부 간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희생과 생이 다하기까지 서로 아낌없이 노력하는 사랑의 행위로 여러분의 결혼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혹 하나님의 은사가 있어 독신으로 살면서 거룩함을 지키고자 하는 분의 의사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정말 많은 고통 중에 스스로와 서로간의 노력에 반해 그래도 인생의 생체기가 될 그런 이혼을 하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그런 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먼저 헤아려 주시고 그런 분들이 믿음과 말씀으로 새롭게 가정을 꾸리고 재혼함으로 부부관계를 맺을 때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