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마태복음 7장 1-5절
사순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 세상적인 많은 부분에서 절제하고 믿음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이 이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모습들이 밝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살아온 걸음걸이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부분보다 우리의 뜻대로 행한 일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도록 우리에게 철저한 회개를 말씀하실 때, 마음이 더 무겁기만 합니다. 지난 주에 어떤 분이 ‘회개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답은 쉽습니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태복음 3장 8절)를 맺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한다는 의미는 예수님께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행위를 바로 아뢰고 용서를 구한 후 바로 주님 안에서 달라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들은 여전히 선입관념으로 우리를 바라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삭개오처럼 남을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 바로 주님께 아뢰고 그 토색한 부분을 피해자들에게 변상하고 다시는 그러한 삶을 되풀이 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혹은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면 주님께 아뢰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러한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과 격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실천이 어렵고 당사자에게 말을 떼기가 어려운 것이지 회개는 어렵지 않습니다. 용기가 들지 않거든 예수님께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혹 자신에게서 자신에게만 적용될 회개가 필요한 부분은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는 한 회개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우리의 신앙 양심이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한 심령의 통회는 기뻐하시지만 외식은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절기를 따라 가장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자비를 행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금식하는 것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 마저도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외식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남들 앞에서 구제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낯을 흐려가며 금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이 바리새인들에게 저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상을 다 받았고, 하늘에서 받을 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볼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5절까지 내용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말씀이 누가복음 6장 37절과 38절에, 그리고 41절과 4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7장 5절과 누가복음 6장 42절에 공통적으로 ‘외식하는 자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외식, 즉 겉으로만 그러한 체 하는 것이 이제는 우리의 언어 생활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산 위에 둘러앉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첫째, ‘비판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조그마한 비판부터 큰 비판까지 비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뉴스를 들어도 그렇고 신문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잘됐다 아니면 이것은 못됐다’ 꼭 평가를 해야만 시원하고, 소위 여론이라고 하는 것에 너무도 민감한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병원을 다녀와도, 자동차를 고치고 와도, 물건을 사고 와도 설문 조사를 합니다. 서비스가 어땠는가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도 비판에 익숙한 데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단순하게 2절에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대답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속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언제 어느 상황에 있든지 우리의 생각이 늘 공격적으로 남을 비판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긍정과 칭찬의 비판이 아니라 부정적인 때론 인신공격적인 비판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나온 ‘비판’이란 단어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판단’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고, 새번역에서는 ‘심판’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본문이 나오는 누가복음에서는 ‘비판’에서 ‘정죄’라는 단어로 발전되는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안에는 남을 비판할 때 칭찬과 격려가 따르는 긍정의 비판보다는 판단과 정죄가 따르는 심판의 비판이 훨씬 더 많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 안에서도 옆 사람을 보면서 맨 먼저 마음 속으로 흘러 나오는 내용이 ‘왜 저분은 저럴까? 옷 차림은 또 뭐람? 오늘도 애들 자랑만 하네. 혼자 신앙생활 다 하는 척하네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혼자 판단하고 혼자 정죄하고 이미 심판까지 다 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비판은 결국 우리 안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이런 비판들은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무섭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심판’이라는 단어가 바로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태복음 13장 38-39절)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했던 판단과 정죄로 동일하게 우리를 비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 사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남에게서 발견되는 단점과 흠들은 많은 부분 우리들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되어지는 단점과 흠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런 비판을 할 때 사실은 그것이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려고 하는 비판을 통해, 판단과 정죄를 통해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두번째 교훈은 바로 우리 안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들보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본문에서 나오는 들보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의 중심이 되는 큰 서까래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하는 것은 그 큰 통나무에서 벗겨 떨어지는 자그마한 나무 껍질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보면 들보와 티는 너무도 대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들보는 다 잘보입니다. 그러나 티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은 아주 애를 써서 남의 티를 아주 주의해서 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에게서 발견한 티를 들보처럼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하게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조법을 썼으니 남의 티보다는 우리의 들보가 훨씬 나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 된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나쁜 것이 내 안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남의 눈의 티를 빼고자 하는 노력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눈의 들보를 볼 수 없을까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 안에 선한 하나님의 이미지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빛과 진리 가운데 있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의 영향 아래 우리는 어둠 속에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있는 연약성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어떤 비판의 출발점이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서 있지 않나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어떤 마을의 제빵업자가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했는데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농장의 버터 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버터 공장 주인을 고발하였습니다. 그 버터 공장 주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사가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소?" 라고 하자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안다는 거요?"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1파운드 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럼 그 1파운드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오는거요?"라고 하자 그 낙농공장 주인은 고소인을 가리키며 "우리는 늘 저 제빵업자 한테서 사다 먹습니다." 결국 버터의 양이 줄어든 이유는 제빵업자의 빵이 줄었기 때문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문제의 시작은 바로 나인데 자꾸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발 그것 좀 먼저 보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이 주는 세번째 교훈은 내 눈의 들보를 빼고 그런 후에 남의 티를 빼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 눈의 들보는 스스로 볼 수 없기에 절대로 자신이 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과실은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신앙 양심에 비추어, 말씀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앞의 문제를 계속해서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나의 모든 들보를 빼낸 후에는 우리는 또 다른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절의 말씀처럼 궁극적으로 ‘비판하지 말라’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5절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밝아진 후에 분명 형제의 과실을 보고 그것을 교정해 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한 편지에서도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형제들에 대해서 그들을 사랑으로 지적하고 권면하여 깨우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을 위한 비판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부분과 관련하여 김동호 목사님께서 페이스북을 통해 남기신 내용(2013년 6월 29일 묵상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5절까지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자기비판을 전혀 할 줄 모르고 남 비판만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고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남의 눈의 티를 지적하고 제거하는 것을 비판이라고 생각할 때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5절 이하 말씀의 결론은 비판을 조심스럽게 잘 하라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수술을 하는 의사에게서 동일하게 배울 수가 있다. 비판을 수술과 동일시해서 본다고 했을 때, 의사는 먼저 수술해야만 하는 암과 같은 조직이 발견되면 덮어두지 않는다. 사정 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그러니 무조건 비판하면 안 된다고 섣부르게 성경을 들이대면 안 된다. 둘째, 자기 전공영역에서만 칼을 든다. 정형외가 의사가 암수술을 하지 않고 일반외과 의사가 정형외과 수술을 하지 않는다. 의사는 수술의 성공률을 높이려고 엄청나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훈련한다. 우리도 누구와 무엇을 비판하려면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기가 잘 아는 부분에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의사는 수술하기 전 환자를 철저히 검사한다. 그래서 환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선 후에 메스를 든다. 의사는 환자를 감으로 수술하지 않는다. 짐작으로 수술하지 않는다. 추측으로 수술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환자(비판의 대상자)의 열 가지 중 한 두개만 알고 그냥 막 비판하는 경우가 많디. 넷째, 수술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병든 부분만 잘라내고 할 수 있는 한 건강한 조직은 건들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비판을 의사처럼 하지 않고 도축사처럼 하는 경우가 많다. 수술할 부분(비판할 부분)을 발견하여 흥분하면 눈에 보이는게 없어지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건들이지 않아도 되는 부분, 한 걸음 더 나아가 건들여서는 안 되는 부분까지 너무 넓고 많은 부분을 수술하여 결국 환자를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수술의 마지막은 잘라냄이 아니다. 꿰맴이다…. 우리는 비판할 때 잘라냄만 생각하고 꿰맴을 잊을 때가 많다. 나도 한가닥 하는 칼잽이가 아닐까? 다음에 수술을 해야 할 때가 생기면 나부터 오늘 이 글 한 번 자세히 읽어보고 조심스럽게 칼을 들어야겠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지키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본문 말씀을 여러분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하여 우리 입술의 외식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이며 저마다의 들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마다 우리 안의 들보를 주님의 이름으로 빼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에 형제의 티를 빼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행한 그대로 비판과 정죄를 받아 심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연습을 행하시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 먼저 거룩함을 회복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다른 형제 자매들을 더욱 긍휼히 여기고 비판보다 이해의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