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 시리즈 1. 소명과 확신 (Calling and Confirmation)
성경본문: 사사기 6장 11-16절 ( Judges 6:11-16)
우리는 종종 신문 지상에서 이런 기사를 많이 봅니다. 유명 아나운서가 뒤늦게 신학을 해서 목회자가 되어 색다른 섬김의 목회를 하게 되었다든지, 큰 기업 회장으로 있던 사람이 모든 것을 접고 아내와 함께 우크라이나나 몽골 혹은 제 3세계 같은 후진국에 가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사랑의 씨앗을 심고 있다라든지, 이제 막 자리 잡은 40대가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 두고 가족끼리 1년 동안 배낭 여행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든지 등등… 이런 기사들 뒤에는 항상 그들을 따라다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가 행해야 할 큰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10대에서 인생을 다 산 칠팔십대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번 이상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방법이 조금 틀립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우리는 자기 기준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자기 의에서 찾거나 혹은 깊은 철학적 성찰에서 찾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별하도록 훈련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깊은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명(使命)이라는 한자어가 내포하듯 목숨을 걸고 하는 하나님의 심부름이 바로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명은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만 받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이 있고 그것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그 소명을 분별하고 확신하며 그것을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 5대 사사인 기드온이 어디에서 어떻게 소명을 받았으며, 자신의 소명을 확신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들을 확신할 수 있는지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전 사사기 본문들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사사로 누구를 세우셔서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서 오늘 본문은 기드온을 부르신 과정이 보다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11절) 당시 이스라엘은 드보라와 바락으로 인해 40년간의 평화시대를 경험했건만 곧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또 다시 범죄했습니다.(1절) 가나안 땅에 함께 거하던 이방 민족과 결혼을 하고 그들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 진노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낙타 부대로 강성했던 미디안 사람들에게 넘기셨습니다.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추수할 때마다 쳐들어와서 곡식과 동물을 약탈했는데 성경은 마치 그들이 메뚜기 떼 같이 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고 수탈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일어설 수 없으며, 압제자에게 그냥 복종을 합니다. 미디안의 통치 정책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철저히 배고프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완전히 복종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칠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이스라엘의 신음과 부르짖음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꾸짖은 후에 또 다시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들키지 않을려고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라는 말에서 그의 직업이 포도원과 밀 농사를 짓는 농부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5절 말씀을 통해 그는 가족과 함께 오브라에 살고 있는 므낫세 지파에 속한 요아스의 가장 어린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형들이 이런 위기 상황 가운데서 어찌 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 집에서 밀을 타작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사자는 오브라의 상수리 나무에 앉아 있었습니다. 상수리 나무 아래는 보통 우상을 세워놓고 그곳에 단을 쌓고 우상을 섬기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기드온이 타작하던 곳과 가까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말씀하며 귀한 사명을 주시는데 그곳은 바로 특별한 곳이라기 보다, 전혀 우리의 일상과는 떨어진 곳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삶을 살고 있는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양을 치던 호렙산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고기를 낚던 바다였습니다. D. L. 무디도 구둣방에서, 아브라함 링컨이나 백화점 왕인 존 워너메이커도 평범한 그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있는 그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아가시고 여러분을 만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드온은 남들과 같이 평범한 한 젊은이였을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13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기드온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향하여 기드온은 불평 어린 항변을 쏟아내로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기드온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다시 말해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신앙의 긴장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대한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현재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시각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그런 생업인, 직업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날마다 우리 안에 믿음의 긴장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은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그 믿음의 긴장 가운데 살면서 희미하나마 이전에 그가 들었던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금 바라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즉 보이는 힘은 없으나 그 심령 속에 의분을 가지고 하나님과 믿음의 씨름을 하던 사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거침없는 항변이 그 속에 섞여있지만, 그의 신앙 안에 녹아있는 믿음의 기대와 소망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믿음의 긴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도 때로는 힘든 현실이지만 그것을 보지 않고 늘 믿음의 긴장을 가지고 씨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믿음의 긴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에 대해서 씨름하며 믿음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소명은 우리의 계획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도다” (12절)라고 선포합니다. “큰 용사”라는 말은 당시 기드온의 모습과 상반대는 모습입니다. 성경에 비친 기드온의 모습은 소심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존감이 정말 없는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때론 패배자 같기도 하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몰래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15절에서 기드온은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나를 큰 용사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나 배포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지파 중에서 제일 작고 우리 집에서도 막내인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바알 신상을 부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대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 중에 하며 그것도 모자라 혼자 하지 못하고 그의 열 종과 더불어 그 일을 행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눈에 비친, 아니 적어도 그 가족의 눈에 비친 기드온의 성품과 자질은 사사가 되기에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성격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실 때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그 부르신 사람에게 당신의 계획과 의지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겠노라는 하나님의 믿음의 선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살인하고 도망쳐서 양이나 치고 있던 나이 든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끌만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홀로 성품이 괴팍하다 못해 자주 투덜대던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많은 목사님들을 보건대 외적으로 보기에 그냥 저런 분이 어떻게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소명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장 26~29절)
일반 사람들은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믿음과 계획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겠노라고 하면 인간적인 걱정을 많이 합니다. 뒤늦게 신학을 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하며 자녀들 교육은 어떻게 하냐는 등, 뒤늦게 선교사를 가면 편히 살지 낯선 곳이 위험하지는 않는지,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먼저 묻습니다. 때론 인신공격도 합니다. 말주변도 없는데, 돈도 없는데, 기술도 없는데 그곳에 회피하려 가지 않냐는 등 말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붙잡으심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과 순종입니다. 사람은 현실을 보시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고자 모든 일을 예배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부담되는 소명을 받을 때마다 근심과 걱정이 앞서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여호와 살롬을 이루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무언가 이루시기를 원하고자 어떻게 부르셨다면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순종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국 기드온의 역사를 살펴볼 때에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갖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그저 부르심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거듭 거듭 자신의 소명을 묻고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을 통해 그것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때론 너무 연약하고 소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확신을 통해서 기드온은 그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고 그의 소명이 더욱더 굳건해짐을 경험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라는 사실이 우리의 막연한 감정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말씀과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거듭 거듭 확인되어지면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주관하심이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세가지 확신을 받게 됩니다. 첫번째는 소명을 받은 직후 하나님의 사자에게 예배(예물)를 드리다가 일어나게 됩니다. 미디안의 압제 가운데 있는 상황 가운데 어쩌면 자신에게 전부였을 염소 새끼와 무교병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드립니다. 기드온이 그것들을 명령대로 반석 위에 두고 국을 쏟은 직후, 하나님의 사자가 지팡이를 그 예물에 대자 불이 반석에서 나와 그것들을 태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이 예물을 태우고 나서야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명확히 깨닫고 대면하여 본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곳에 기드온이 단을 쌓았는데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했습니다. “주 하나님은 평화이시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에게 주신 소명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마음을 힘들게 하는 소명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주시는 평강임을 저에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소명을 하나님께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심령이 더욱 평안하여지고 담대하여 질 것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확신은 바알 신상을 부서 하나님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한 후의 일입니다. 기드온은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확신을 구합니다. 표적이 그에게 주가 아니지만 그가 받은 말씀을 표적을 통해 확증받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요청대로 하나님은 이틀 사이에 양털을 가지고 이슬을 젖게도, 이슬이 없이 마르게도 하심으로 기드온에게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미디안과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기드온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친히 보여주셔서 그로 하여금 그가 받은 말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씀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확신은 이제 막 전쟁을 하기 위해 미디안과 대치 중에 있을 때입니다. 첫번째 확신과 두번째 확신은 기드온의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세번째 확신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요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사람 치듯 하리라’는 하나님의 의지적 표현은 기드온이 300명의 정예 군사를 선발해 놓고 전쟁하기 전 미디안 군대에 잠입했을 때, 미디안 군사들이 꾼 꿈을 통해서 확증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니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사사기 7:13-14) 기드온은 그 꿈을 듣고 하나님의 소명과 미디안과의 전쟁을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다른 사물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확증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서 행하시고 일을 먼저 진행해 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의 계획자도 하나님이요, 진행자도 하나님이시며, 종결자도 하나님이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보스톤 필그림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이 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고 내게 주신 소명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을 때입니다. 교회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많은 교회를 돌아다니며 알아보던 차에 지금 우리가 빌려쓰는 뉴튼 장로교회의 퍼킨스 목사님과 연결되었습니다. 목사님께 사정 이메을을 보내고 한번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에서 퍼킨스 목사님은 미국 교회 교인들과 함께 저희 교회를 배려하시고 이미 계약서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교회로서 편안하게 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렇듯 소명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하는 은혜, 미리 일을 진행시키는 은혜를 저희에게 경험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각각의 서로 다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늘 함께 계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깨어있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사시길 권면합니다. 우리가 받은 소명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담긴 하나님의 믿음임을 서로 고백하며, 믿음의 순종을 통해 그 소명을 이루어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받은 소명에 대해 확증시켜 주십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우리의 소명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확신시키시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은사들을 더욱 견고히 하여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선한 일을 계획하신 이가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 (빌 1:6)을 분명히 알고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을 향한 소명자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길 간구합니다.
성경본문: 사사기 6장 11-16절 ( Judges 6:11-16)
우리는 종종 신문 지상에서 이런 기사를 많이 봅니다. 유명 아나운서가 뒤늦게 신학을 해서 목회자가 되어 색다른 섬김의 목회를 하게 되었다든지, 큰 기업 회장으로 있던 사람이 모든 것을 접고 아내와 함께 우크라이나나 몽골 혹은 제 3세계 같은 후진국에 가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사랑의 씨앗을 심고 있다라든지, 이제 막 자리 잡은 40대가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 두고 가족끼리 1년 동안 배낭 여행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든지 등등… 이런 기사들 뒤에는 항상 그들을 따라다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가 행해야 할 큰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10대에서 인생을 다 산 칠팔십대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번 이상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방법이 조금 틀립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우리는 자기 기준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자기 의에서 찾거나 혹은 깊은 철학적 성찰에서 찾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별하도록 훈련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깊은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명(使命)이라는 한자어가 내포하듯 목숨을 걸고 하는 하나님의 심부름이 바로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명은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만 받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이 있고 그것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그 소명을 분별하고 확신하며 그것을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 5대 사사인 기드온이 어디에서 어떻게 소명을 받았으며, 자신의 소명을 확신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들을 확신할 수 있는지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전 사사기 본문들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사사로 누구를 세우셔서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서 오늘 본문은 기드온을 부르신 과정이 보다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11절) 당시 이스라엘은 드보라와 바락으로 인해 40년간의 평화시대를 경험했건만 곧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또 다시 범죄했습니다.(1절) 가나안 땅에 함께 거하던 이방 민족과 결혼을 하고 그들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 진노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낙타 부대로 강성했던 미디안 사람들에게 넘기셨습니다.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추수할 때마다 쳐들어와서 곡식과 동물을 약탈했는데 성경은 마치 그들이 메뚜기 떼 같이 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고 수탈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일어설 수 없으며, 압제자에게 그냥 복종을 합니다. 미디안의 통치 정책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철저히 배고프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완전히 복종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칠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이스라엘의 신음과 부르짖음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꾸짖은 후에 또 다시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들키지 않을려고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라는 말에서 그의 직업이 포도원과 밀 농사를 짓는 농부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5절 말씀을 통해 그는 가족과 함께 오브라에 살고 있는 므낫세 지파에 속한 요아스의 가장 어린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형들이 이런 위기 상황 가운데서 어찌 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 집에서 밀을 타작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사자는 오브라의 상수리 나무에 앉아 있었습니다. 상수리 나무 아래는 보통 우상을 세워놓고 그곳에 단을 쌓고 우상을 섬기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기드온이 타작하던 곳과 가까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말씀하며 귀한 사명을 주시는데 그곳은 바로 특별한 곳이라기 보다, 전혀 우리의 일상과는 떨어진 곳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삶을 살고 있는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양을 치던 호렙산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고기를 낚던 바다였습니다. D. L. 무디도 구둣방에서, 아브라함 링컨이나 백화점 왕인 존 워너메이커도 평범한 그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있는 그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아가시고 여러분을 만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드온은 남들과 같이 평범한 한 젊은이였을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13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기드온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향하여 기드온은 불평 어린 항변을 쏟아내로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기드온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다시 말해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신앙의 긴장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대한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현재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시각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그런 생업인, 직업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날마다 우리 안에 믿음의 긴장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은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그 믿음의 긴장 가운데 살면서 희미하나마 이전에 그가 들었던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금 바라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즉 보이는 힘은 없으나 그 심령 속에 의분을 가지고 하나님과 믿음의 씨름을 하던 사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거침없는 항변이 그 속에 섞여있지만, 그의 신앙 안에 녹아있는 믿음의 기대와 소망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믿음의 긴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도 때로는 힘든 현실이지만 그것을 보지 않고 늘 믿음의 긴장을 가지고 씨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믿음의 긴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에 대해서 씨름하며 믿음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소명은 우리의 계획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도다” (12절)라고 선포합니다. “큰 용사”라는 말은 당시 기드온의 모습과 상반대는 모습입니다. 성경에 비친 기드온의 모습은 소심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존감이 정말 없는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때론 패배자 같기도 하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몰래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15절에서 기드온은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당신은 나를 큰 용사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나 배포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지파 중에서 제일 작고 우리 집에서도 막내인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바알 신상을 부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대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 중에 하며 그것도 모자라 혼자 하지 못하고 그의 열 종과 더불어 그 일을 행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눈에 비친, 아니 적어도 그 가족의 눈에 비친 기드온의 성품과 자질은 사사가 되기에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성격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실 때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그 부르신 사람에게 당신의 계획과 의지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겠노라는 하나님의 믿음의 선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살인하고 도망쳐서 양이나 치고 있던 나이 든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끌만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홀로 성품이 괴팍하다 못해 자주 투덜대던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많은 목사님들을 보건대 외적으로 보기에 그냥 저런 분이 어떻게 목사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소명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장 26~29절)
일반 사람들은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믿음과 계획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겠노라고 하면 인간적인 걱정을 많이 합니다. 뒤늦게 신학을 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하며 자녀들 교육은 어떻게 하냐는 등, 뒤늦게 선교사를 가면 편히 살지 낯선 곳이 위험하지는 않는지,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먼저 묻습니다. 때론 인신공격도 합니다. 말주변도 없는데, 돈도 없는데, 기술도 없는데 그곳에 회피하려 가지 않냐는 등 말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붙잡으심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과 순종입니다. 사람은 현실을 보시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고자 모든 일을 예배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부담되는 소명을 받을 때마다 근심과 걱정이 앞서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여호와 살롬을 이루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무언가 이루시기를 원하고자 어떻게 부르셨다면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순종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국 기드온의 역사를 살펴볼 때에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갖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그저 부르심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거듭 거듭 자신의 소명을 묻고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을 통해 그것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때론 너무 연약하고 소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확신을 통해서 기드온은 그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고 그의 소명이 더욱더 굳건해짐을 경험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라는 사실이 우리의 막연한 감정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말씀과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거듭 거듭 확인되어지면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주관하심이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세가지 확신을 받게 됩니다. 첫번째는 소명을 받은 직후 하나님의 사자에게 예배(예물)를 드리다가 일어나게 됩니다. 미디안의 압제 가운데 있는 상황 가운데 어쩌면 자신에게 전부였을 염소 새끼와 무교병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드립니다. 기드온이 그것들을 명령대로 반석 위에 두고 국을 쏟은 직후, 하나님의 사자가 지팡이를 그 예물에 대자 불이 반석에서 나와 그것들을 태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이 예물을 태우고 나서야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명확히 깨닫고 대면하여 본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곳에 기드온이 단을 쌓았는데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했습니다. “주 하나님은 평화이시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에게 주신 소명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마음을 힘들게 하는 소명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주시는 평강임을 저에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소명을 하나님께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심령이 더욱 평안하여지고 담대하여 질 것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확신은 바알 신상을 부서 하나님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한 후의 일입니다. 기드온은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확신을 구합니다. 표적이 그에게 주가 아니지만 그가 받은 말씀을 표적을 통해 확증받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요청대로 하나님은 이틀 사이에 양털을 가지고 이슬을 젖게도, 이슬이 없이 마르게도 하심으로 기드온에게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미디안과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기드온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친히 보여주셔서 그로 하여금 그가 받은 말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말씀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확신은 이제 막 전쟁을 하기 위해 미디안과 대치 중에 있을 때입니다. 첫번째 확신과 두번째 확신은 기드온의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세번째 확신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요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사람 치듯 하리라’는 하나님의 의지적 표현은 기드온이 300명의 정예 군사를 선발해 놓고 전쟁하기 전 미디안 군대에 잠입했을 때, 미디안 군사들이 꾼 꿈을 통해서 확증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니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사사기 7:13-14) 기드온은 그 꿈을 듣고 하나님의 소명과 미디안과의 전쟁을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다른 사물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확증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서 행하시고 일을 먼저 진행해 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의 계획자도 하나님이요, 진행자도 하나님이시며, 종결자도 하나님이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보스톤 필그림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이 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고 내게 주신 소명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을 때입니다. 교회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많은 교회를 돌아다니며 알아보던 차에 지금 우리가 빌려쓰는 뉴튼 장로교회의 퍼킨스 목사님과 연결되었습니다. 목사님께 사정 이메을을 보내고 한번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에서 퍼킨스 목사님은 미국 교회 교인들과 함께 저희 교회를 배려하시고 이미 계약서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교회로서 편안하게 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렇듯 소명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하는 은혜, 미리 일을 진행시키는 은혜를 저희에게 경험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각각의 서로 다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늘 함께 계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깨어있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사시길 권면합니다. 우리가 받은 소명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담긴 하나님의 믿음임을 서로 고백하며, 믿음의 순종을 통해 그 소명을 이루어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받은 소명에 대해 확증시켜 주십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우리의 소명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확신시키시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은사들을 더욱 견고히 하여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선한 일을 계획하신 이가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 (빌 1:6)을 분명히 알고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을 향한 소명자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길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