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강해 5: 세상을 이기는 믿음
성경본문: 요한일서 5장 4절 (1John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도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비단 사도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세상을 이긴다구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저 그 말씀이 제 마음에 조금 위로를 줄뿐 사실 제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고, 더 나빠져 가기만 하던걸요.”라는 푸념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각각 뿔뿔이 흩어질 제자들을 보면서 분명하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됐단 말입니까? 이제 막 형성된 옅은 믿음의 공동체들에게 요한서신을 마감하면서 그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처럼 외친 사도 요한의 확신이 잘못됐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요한일서를 마감하면서 사도 요한은 분명히 외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우리들은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이런 선포에 대한 의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로 인해 복음이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써먹지 못하고 그저 주저 않는 불쌍한 영혼들이란 말입니다.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 맨 밑바닥에 자리 잡아 우리를 신앙을 항상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사단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종종 우리들이 이단들의 접근에 대해, 그들의 확신 있는 질문과 선포에 대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결국에는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의심을 깨뜨리고 다시금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 있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다섯 가지 분명한 확신을 반복해서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다섯 가지 확신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13절부터 20절까지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13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주(메시야)로 영접한 순간 우리에게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첫 번째 확신은 늘 우리에게 제기되는 두 가지 질문을 상기 시킵니다. 첫째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과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구원 자체와 또한 구원 받은 사실에 대해서 많이 의심하고 있음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외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구원과 구원의 확신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하나님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에 의지하여 구원에 대해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제기되는 질문은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질적인 문제와 양적인 문제가 대두됩니다. ‘영생을 얻는다’, ‘영생 안에 산다’라는 말은 결코 변하지 않는 최고의, 최상의 조건 속에서 저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라는 말을 의미합니다. 육신으로서 우리의 인생의 항해가 끝나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다시금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눈물도 슬픔도 그리고 고통도 없는 그런 영원한 삶을 저희가 누리게 될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초대교회 사람들이 살았고, 우리 모두도 이런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소원합니다.
두 번째 확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 우리에게 특권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그 특권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은 우리를 아신다는 말이며, 우리의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의를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정욕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간절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방법과 때를 따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볼 단어가 하나 있는데 ‘담대함’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함, 의심과 불안에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당당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저 응답해 감사하고 안들어 주시면 안들어 주시는 대로 체념하는 믿음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이 특권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번째 확신은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로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앞서 있는 3장 6-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르킵니다. 악한 영이, 사탄의 권세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키시기에 우리가 범죄할 수 없고, 영원히 그것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노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죄의 유혹의 손길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확신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네번째 확신은 우리는 누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으며, 누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 말씀은 우리의 소속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다’라는 말은 사탄이 도무지 침범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릴 때 보면 보이는 환경은 그러할 수 없지만, 그 평안과 기쁨과 감사는 도무지 다른 것이 침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편견과 눈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그에게 속했기에 하나님의 식과 방법을 고집하는 중요하지,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좌지우지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섯번째 확신으로 넘어갑니다. 우리에게 주신 다섯번째 확신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절) 사실 13절부터 20절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확신까지는 모두 ‘오이다’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라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해서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우리 안에 확신을 심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20절에 쓰인 ‘안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그노스코’입니다. 경험적, 습득적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들을 보다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우리를 향한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마음 속 깊이 각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5)
사도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확신들에 대해 재차 강조하면서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권면을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던집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21절). 얼핏 보면 불쑥 튀어 나온 말이고, 편지의 맺음말로 보기에 다소 엉뚱한 것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앞의 다섯 가지 확신의 가장 기초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진 믿음은 결국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를 질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분명할 때 그것은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안에 잘못된 믿음의 대상들(이것들이 우상이지요)을 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세상에 져서 괴롭고 왜곡된 삶을 살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준 권면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되 우리의 모습과 형편과 처지가 제각각 다르지만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다면 우리가 세상의 편견과 자존심 싸움에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그 믿음이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로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망하여 자녀들 때문에 행상을 해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금 그전의 부의 노예가 아닌 믿음의 자유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증폭되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인생 가운데 펼쳐지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혹 우리의 믿음을 연약하게 하는 우상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숨긴채 우리 안에 계속 담고 있지 않습니까? 혹 그것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믿음 안에서 이런 우상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역사해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간섭을 경험해서 아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성경본문: 요한일서 5장 4절 (1John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도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비단 사도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세상을 이긴다구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저 그 말씀이 제 마음에 조금 위로를 줄뿐 사실 제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고, 더 나빠져 가기만 하던걸요.”라는 푸념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각각 뿔뿔이 흩어질 제자들을 보면서 분명하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됐단 말입니까? 이제 막 형성된 옅은 믿음의 공동체들에게 요한서신을 마감하면서 그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처럼 외친 사도 요한의 확신이 잘못됐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요한일서를 마감하면서 사도 요한은 분명히 외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우리들은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이런 선포에 대한 의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로 인해 복음이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써먹지 못하고 그저 주저 않는 불쌍한 영혼들이란 말입니다.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 맨 밑바닥에 자리 잡아 우리를 신앙을 항상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사단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종종 우리들이 이단들의 접근에 대해, 그들의 확신 있는 질문과 선포에 대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결국에는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의심을 깨뜨리고 다시금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 있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다섯 가지 분명한 확신을 반복해서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다섯 가지 확신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13절부터 20절까지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13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주(메시야)로 영접한 순간 우리에게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첫 번째 확신은 늘 우리에게 제기되는 두 가지 질문을 상기 시킵니다. 첫째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과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구원 자체와 또한 구원 받은 사실에 대해서 많이 의심하고 있음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외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구원과 구원의 확신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하나님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에 의지하여 구원에 대해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제기되는 질문은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질적인 문제와 양적인 문제가 대두됩니다. ‘영생을 얻는다’, ‘영생 안에 산다’라는 말은 결코 변하지 않는 최고의, 최상의 조건 속에서 저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라는 말을 의미합니다. 육신으로서 우리의 인생의 항해가 끝나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다시금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눈물도 슬픔도 그리고 고통도 없는 그런 영원한 삶을 저희가 누리게 될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초대교회 사람들이 살았고, 우리 모두도 이런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소원합니다.
두 번째 확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 우리에게 특권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그 특권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은 우리를 아신다는 말이며, 우리의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의를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정욕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간절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방법과 때를 따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볼 단어가 하나 있는데 ‘담대함’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함, 의심과 불안에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당당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저 응답해 감사하고 안들어 주시면 안들어 주시는 대로 체념하는 믿음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이 특권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번째 확신은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로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앞서 있는 3장 6-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르킵니다. 악한 영이, 사탄의 권세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키시기에 우리가 범죄할 수 없고, 영원히 그것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노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죄의 유혹의 손길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확신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네번째 확신은 우리는 누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으며, 누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 말씀은 우리의 소속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다’라는 말은 사탄이 도무지 침범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릴 때 보면 보이는 환경은 그러할 수 없지만, 그 평안과 기쁨과 감사는 도무지 다른 것이 침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편견과 눈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그에게 속했기에 하나님의 식과 방법을 고집하는 중요하지,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좌지우지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섯번째 확신으로 넘어갑니다. 우리에게 주신 다섯번째 확신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절) 사실 13절부터 20절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확신까지는 모두 ‘오이다’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라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해서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우리 안에 확신을 심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20절에 쓰인 ‘안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그노스코’입니다. 경험적, 습득적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들을 보다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우리를 향한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마음 속 깊이 각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5)
사도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확신들에 대해 재차 강조하면서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권면을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던집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21절). 얼핏 보면 불쑥 튀어 나온 말이고, 편지의 맺음말로 보기에 다소 엉뚱한 것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앞의 다섯 가지 확신의 가장 기초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진 믿음은 결국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를 질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분명할 때 그것은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안에 잘못된 믿음의 대상들(이것들이 우상이지요)을 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세상에 져서 괴롭고 왜곡된 삶을 살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준 권면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되 우리의 모습과 형편과 처지가 제각각 다르지만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다면 우리가 세상의 편견과 자존심 싸움에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그 믿음이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로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망하여 자녀들 때문에 행상을 해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금 그전의 부의 노예가 아닌 믿음의 자유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증폭되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인생 가운데 펼쳐지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혹 우리의 믿음을 연약하게 하는 우상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숨긴채 우리 안에 계속 담고 있지 않습니까? 혹 그것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믿음 안에서 이런 우상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역사해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간섭을 경험해서 아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