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4:
법정에 선 그리스도인들 Believers at Court
성경본문: 마태복음 5장 22-25절, 고린도전서 6장 1-11절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들은 교회를 생각하면 사랑과 용서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 집(home) 외에 그 누구든지 찾아 갈 수 있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안아 주시고 쉬게 하시는 곳.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용납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십니다. 우리의 거칠고 피곤한 심신을 쉬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동일한 양이고 자녀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무언가 가슴에, 어깨에 그리고 생각 속에 메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 그것들을 좀 내려 놓고 주님 안에서 좀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주 품에 안겨 거친 파도 가운데서도, 폭풍 가운데서도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잠잠히 주님과 날아오르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운전을 합니다. 운전을 하다 좀 신경 쓰일 때가 있습니다. 앞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든지, 아니면 뒤에서 뭔가 뻑뻑하게 돌아간다든지, 차에서 이상한 흔들림이 느껴지면 우리는 차량 정비소(Car Care Center)를 찾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나, 휠 발란스가 나갔나 하며 혼자 생각을 하는데 가끔 조그마한 이상 징후가 더 큰 일들이 벌어지기 직전 우리에게 경고신호를 보냈다라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도가 갑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니 냉각수가 떨어졌나 보다 했는데 실상은 Radiator가 나간 경우, 오일이 자꾸 새서 열어봤더니 엔진이 이상한 경우 등등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부흥의 조짐으로 성도들이 평안해 하고 잘 모이는 것아 보이지만 실상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작은 일들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큰 곤란을 겪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 1-11절 말씀과 더불어 함께 마태복음 5장 22-25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일이 더 나빠지기 전에, 그리고 우리에게서 교회의 모습이 손상되기 전에 과감히 끼어 들고 그런 일들을 해결하라고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훈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감지한 고린도교회의 이상 징후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전서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말이 좀 애매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좀더 자세하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메시지(The Message)”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 대범하게도 서로 서로를 법정에 고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좀 잘못됐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그리스도의 가족들 대신에 하나님의 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세상 법정에 가져가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다른 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대담하게 도전적일 수 있습니까? 어찌 믿는 성도들끼리 서로 서로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소함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부끄러운 그런 일들을 행하신단 말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믿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다투면서 이것을 세상 법정에 가져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첫째, 하나님의 형제 자매들을 서로 다투지 않고 송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라고 왜 다툼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이유가 가지 각색 입니다. ‘순전히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돈을 얼마 빌려 줬는데 갚지 않는다,’ 심지어는 ‘저 사람이 내 아내에게 집적거린다,’ ‘거짓말을 했다’ 등등… 목사와 목사끼리, 목사와 성도끼리, 그리고 성도와 성도끼리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싸움은 교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목사와 성도들의 믿음과 신뢰를 이간질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를 방해하는 눈 앞의 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그룹화 함으로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2-24절)
즉 믿는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던지울 정도로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툼이나 원망이 생길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예배보다 우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서로 그런 마음을 갖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향한 최고의 존중과 격려와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연약한 죄성을 가진 존재들이기에 서로 다툴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가 먼저 화해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노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내에 다툼보다, 싸움보다 한 형제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세상 법정 보다 교회를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특별히 교인들간의 고소 문제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2절에서 6절에 이렇게 고린도교인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온 세상을 심판하게 될 여러분이 그 정도의 사건 하나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일쯤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자들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신자가 신자를 고소하여,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의 질책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즉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이런 분쟁과 소송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로서 타락한 천사들까지 우리가 함께 심판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오직 (우리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장 9-10절) 입니다. 하다 못해 바울이 6장 11절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의롭다 함을 얻은 백성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절대 우위의 위치를 점하건만, 믿는 사람들끼리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한다는 사실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6장 7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형제의 허물을 지긋이 눈감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아 주는 그런 손해 봄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툭하면 “I will sue.” “Let’s see in court”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법정 분쟁이 일상화되어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문제를 가지고 목회자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재판하는 것도 우리는 심심찮게 봅니다. 과연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행위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웃음거리이고 조롱거리이고 오히려 전도가 막히게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이런 법정 고소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이 닫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열린 공간인 시장이나 광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반 시민들 사이에 공개적인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파장력이 강했습니다 세워진 재판관과 방청객들은 대부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이었습니다. 작은 사건은 적은 수의 시민들로 구성됐지만, 사안에 따라 때로 60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한 기록들을 보면 우리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법적인 해박함이 있었고,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세상 법정을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당시 법에 해박했던 바울도 법의 여러 혜택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형사법 같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협조하고 또한 필요를 따라 이민법이라든가 노동법 같은 것들은 세상 법정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성도간의 다툼의 원인들은 오히려 민사적인 성격이 짙습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구나.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장 8-10절)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불의한 일들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음란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우상숭배, 동성애, 정직하지 못하고 도적질 한 일들, 남을 해치고 욕심을 부리는 일들로 인해 같은 교인들에게 손해와 피해를 입혔던 것입니다. 그런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서로 싸우고 세상 법정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런 일들을 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받는 다는 것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 내의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갈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교회가 해결할 수 있다라고 믿으십니까? 앞서 열거된 불의한 일들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중재 능력이 있고 또 화해 능력이 있단 말입니까? 교회는 강제력도 없고 다들 듣기 싫은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오늘날의 교회가 더욱 불의를 눈감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다양한 공격들이 교회를 향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전제는 교회는 그런 문제와 분쟁들을 해결할 영적인 권위와 그런 성숙한 믿음을 가진 목회자와 중재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기 전에 일이 더욱 커지기 전에, 일이 더욱 악화되기 전에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성도들이 이것을 듣고 판단하여 해결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 모든 허물을 무조건 덮을 수만은 없지만, 불의로 인해 완악해지고 영적으로 어두워진 형제 자매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우리는 권면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교회가 키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에 나오는 ‘빚진 자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고 은혜 안에 거한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대한다면 두렵고 떨리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영적으로 훈계할 때 여러분이 들으실 수 있을 지 걱정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을 드렸을 때 여러분이 그것들의 불의를 빨리 깨닫고 돌아 오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도 간에 법정 분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 내에 생기는여러 가지 불의 때문에 서로 서로 다투고 관계가 악화되어 개인과 개인 사이를 넘어 교회마저도 더 큰 안 좋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누구인지 먼저 자각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교회에서 해결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기르고 교회 내에 그런 성숙한 신앙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혹 아직도 우리 안에 꼭 우리 안에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믿는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고 혹은 과거의 다툰 상처 때문에 벼르고 계시다면 우리가 제단 앞에 있는데 먼저 화해하고 해결하고 주님 앞에 서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안에 혹 이상 징후가 나타나거들랑 무시하지 말고 말씀과 사랑으로 잘 해결해서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법정에 선 그리스도인들 Believers at Court
성경본문: 마태복음 5장 22-25절, 고린도전서 6장 1-11절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들은 교회를 생각하면 사랑과 용서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 집(home) 외에 그 누구든지 찾아 갈 수 있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안아 주시고 쉬게 하시는 곳.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용납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십니다. 우리의 거칠고 피곤한 심신을 쉬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동일한 양이고 자녀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무언가 가슴에, 어깨에 그리고 생각 속에 메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 그것들을 좀 내려 놓고 주님 안에서 좀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주 품에 안겨 거친 파도 가운데서도, 폭풍 가운데서도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잠잠히 주님과 날아오르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운전을 합니다. 운전을 하다 좀 신경 쓰일 때가 있습니다. 앞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든지, 아니면 뒤에서 뭔가 뻑뻑하게 돌아간다든지, 차에서 이상한 흔들림이 느껴지면 우리는 차량 정비소(Car Care Center)를 찾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나, 휠 발란스가 나갔나 하며 혼자 생각을 하는데 가끔 조그마한 이상 징후가 더 큰 일들이 벌어지기 직전 우리에게 경고신호를 보냈다라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도가 갑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니 냉각수가 떨어졌나 보다 했는데 실상은 Radiator가 나간 경우, 오일이 자꾸 새서 열어봤더니 엔진이 이상한 경우 등등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부흥의 조짐으로 성도들이 평안해 하고 잘 모이는 것아 보이지만 실상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작은 일들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큰 곤란을 겪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 1-11절 말씀과 더불어 함께 마태복음 5장 22-25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일이 더 나빠지기 전에, 그리고 우리에게서 교회의 모습이 손상되기 전에 과감히 끼어 들고 그런 일들을 해결하라고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훈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감지한 고린도교회의 이상 징후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전서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말이 좀 애매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좀더 자세하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메시지(The Message)”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 대범하게도 서로 서로를 법정에 고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좀 잘못됐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그리스도의 가족들 대신에 하나님의 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세상 법정에 가져가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다른 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대담하게 도전적일 수 있습니까? 어찌 믿는 성도들끼리 서로 서로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소함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부끄러운 그런 일들을 행하신단 말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믿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다투면서 이것을 세상 법정에 가져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첫째, 하나님의 형제 자매들을 서로 다투지 않고 송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라고 왜 다툼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이유가 가지 각색 입니다. ‘순전히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돈을 얼마 빌려 줬는데 갚지 않는다,’ 심지어는 ‘저 사람이 내 아내에게 집적거린다,’ ‘거짓말을 했다’ 등등… 목사와 목사끼리, 목사와 성도끼리, 그리고 성도와 성도끼리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싸움은 교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목사와 성도들의 믿음과 신뢰를 이간질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를 방해하는 눈 앞의 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그룹화 함으로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2-24절)
즉 믿는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던지울 정도로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툼이나 원망이 생길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예배보다 우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서로 그런 마음을 갖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향한 최고의 존중과 격려와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연약한 죄성을 가진 존재들이기에 서로 다툴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가 먼저 화해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노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내에 다툼보다, 싸움보다 한 형제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세상 법정 보다 교회를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특별히 교인들간의 고소 문제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2절에서 6절에 이렇게 고린도교인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온 세상을 심판하게 될 여러분이 그 정도의 사건 하나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일쯤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자들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신자가 신자를 고소하여,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의 질책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즉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이런 분쟁과 소송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로서 타락한 천사들까지 우리가 함께 심판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오직 (우리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장 9-10절) 입니다. 하다 못해 바울이 6장 11절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의롭다 함을 얻은 백성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절대 우위의 위치를 점하건만, 믿는 사람들끼리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한다는 사실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6장 7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형제의 허물을 지긋이 눈감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아 주는 그런 손해 봄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툭하면 “I will sue.” “Let’s see in court”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법정 분쟁이 일상화되어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문제를 가지고 목회자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재판하는 것도 우리는 심심찮게 봅니다. 과연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행위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웃음거리이고 조롱거리이고 오히려 전도가 막히게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이런 법정 고소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이 닫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열린 공간인 시장이나 광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반 시민들 사이에 공개적인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파장력이 강했습니다 세워진 재판관과 방청객들은 대부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이었습니다. 작은 사건은 적은 수의 시민들로 구성됐지만, 사안에 따라 때로 60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한 기록들을 보면 우리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법적인 해박함이 있었고,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세상 법정을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당시 법에 해박했던 바울도 법의 여러 혜택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형사법 같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협조하고 또한 필요를 따라 이민법이라든가 노동법 같은 것들은 세상 법정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성도간의 다툼의 원인들은 오히려 민사적인 성격이 짙습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구나.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장 8-10절)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불의한 일들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음란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우상숭배, 동성애, 정직하지 못하고 도적질 한 일들, 남을 해치고 욕심을 부리는 일들로 인해 같은 교인들에게 손해와 피해를 입혔던 것입니다. 그런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서로 싸우고 세상 법정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런 일들을 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받는 다는 것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 내의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갈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교회가 해결할 수 있다라고 믿으십니까? 앞서 열거된 불의한 일들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중재 능력이 있고 또 화해 능력이 있단 말입니까? 교회는 강제력도 없고 다들 듣기 싫은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오늘날의 교회가 더욱 불의를 눈감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다양한 공격들이 교회를 향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전제는 교회는 그런 문제와 분쟁들을 해결할 영적인 권위와 그런 성숙한 믿음을 가진 목회자와 중재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기 전에 일이 더욱 커지기 전에, 일이 더욱 악화되기 전에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성도들이 이것을 듣고 판단하여 해결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 모든 허물을 무조건 덮을 수만은 없지만, 불의로 인해 완악해지고 영적으로 어두워진 형제 자매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우리는 권면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교회가 키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에 나오는 ‘빚진 자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고 은혜 안에 거한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대한다면 두렵고 떨리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영적으로 훈계할 때 여러분이 들으실 수 있을 지 걱정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을 드렸을 때 여러분이 그것들의 불의를 빨리 깨닫고 돌아 오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도 간에 법정 분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 내에 생기는여러 가지 불의 때문에 서로 서로 다투고 관계가 악화되어 개인과 개인 사이를 넘어 교회마저도 더 큰 안 좋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누구인지 먼저 자각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교회에서 해결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기르고 교회 내에 그런 성숙한 신앙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혹 아직도 우리 안에 꼭 우리 안에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믿는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고 혹은 과거의 다툰 상처 때문에 벼르고 계시다면 우리가 제단 앞에 있는데 먼저 화해하고 해결하고 주님 앞에 서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안에 혹 이상 징후가 나타나거들랑 무시하지 말고 말씀과 사랑으로 잘 해결해서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