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하나님을 보라” (Here is Your God)
성경본문: 이사야 40장 1-11절
“나는 일생 동안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필요하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흑백 분리 차별정책인 아파르헤이트에 대항하여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1964년 4월에 국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후 넬슨 만델라가 법정에서 최후 진술한 것입니다. 그는 199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남아공의 흑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동시에 차별과 구금과 폭력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암흑 같은 시간이 언제 끝날까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극도로 지키고 정신은 피폐해져 갔으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나날이 날카로워져만 갔습니다. 절망과 근심의 무게에, 암담한 미래의 무게에, 미움과 의심의 무게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내용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도 지독하던 앗수르에서 벗어나는 듯 싶더니 히스기야 왕의 실수로 인해 앗수르보다 더한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철저히 유린당하고 나라도 빼았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출애굽의 하나님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머나먼 이방 땅에서 고향을 소망하여 살아온 지 꽤 오랩니다. 실날 같은 소망도 절망의 그림자에 막혀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고난과 문제의 연속이라고들 합니다. 하나의 문제 넘어 또 하나의 문제가 일평생 가는 동안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고비 넘고 한 숨 쉬고 또 한 고비를 맞습니다. 자녀에 대해서, 사업에 대해서, 학업과 연구에 대해서 때론 잘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빠듯합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으면서도 순간 불안함이 엄습해 옵니다. 만약 우리 안에 신앙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지칠 때마다 자족 섞인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기에 있는 암울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40장 1-2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날은 언제일까요? 아마도 그들의 죄가 사함 받고 현실적인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온 백성이 마음껏 예배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이사야서 39장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겪는 포로 생활은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약자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이제 그런 그들에게 의미 있는 단어를 던집니다. ‘예루살렘’과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이라고 지칭합니다. 마음 속에서 잊혀져 버렸을 것만 같았던 그들의 마음의 고향, 정신적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다시금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됨을 확인해 주는 단어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시면서 지금 정답게 말씀하십니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숨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게 만듭니다.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마음이 굳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굳어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 보다는 우리의 회복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냥 형벌을 받고 그곳으로 그치기만 바라지는 않습니다. 내내 그런 징벌과 고난에 침묵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신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애굽기 2장 23-25절)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들의 죄 값을 배나 치룬 이스라엘에게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도무지 들릴 것 같지 않는 먼 원방의 나라에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문제나 고통이 나 때문이든 혹은 우리 가족 때문이든, 때론 우리 공동체나 민족 때문이거든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장 8절)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회개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들으실 줄 아는 부드러운 마음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회복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이어 나온 말씀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3-5절까지는 ‘여호와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입니다. 6-8절까지는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9-11절에서는 “주 여호와의 통치가 임할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마치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와 통치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신약으로 오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했던 말씀(누가복음 3장 4-6절)과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성(베드로전서 1장 24-25절)을 사모하면서 보냈던 편지 속에 고스란히 이루어집니다. 그 약속의 신실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영원한 통치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 하나님을 보라(Here is your God)”입니다. 아무리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도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우리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는 외침이 우리의 모든 절망의 구름의 절규라면 “너희 하나님을 보라”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뚫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터져 나오는 영광의 함성입니다. 멀리만 계신 것 같았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직접 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 사건 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예수님이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올라간 그대로 오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10절과 11절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에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로로다.”
27년 간의 감옥생활에도 만델라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룰 자유와 평등의 날을 꿈꿨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 앞에 이루어졌습니다. 아파르헤이트(apartheid)는 종식되고 선거를 통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새로 태어난 자유에 영광과 희망을 돌린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법자 신세였던 우리는 오늘 우리의 땅에 세계 각국을 초청하는 귀중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우리는 결국 정치적 해방을 이뤄냈다. 우리는 아직도 빈곤과 박탈, 성차별 등 여러 차별에 묶여 있는 우리 국민을 해방시킬 것임을 맹세한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하자.” (1994년 5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기 너희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이사야의 선포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회복을 믿었습니다. 지난 12월 5일 95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기기까지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루어질 메시야의 나라를 꿈꾸고 그것을 계속해서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내가 고통 당할 때 어디 있습니까? 지난 1년 동안 내가 너무 힘들었는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 막막했는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아직도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여기 당신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Here is Your God).” 인생의 환난과 고통을 다윗만큼 경험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그 고통의 자리에, 그 힘듦의 자리에 자기와 언제나 함께 하셨던 그것을 경험한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너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 18편 1-2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강절 주일을 맞아 여기 앞의 다섯 개의 촛불 가운데 우리는 세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높은 산들처럼, 때론 광야 길의 거친 비탈길처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더욱 강팍하게 하는 시험이나 환난을 겪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힘조차 없으신지요? 이 촛불들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더불어 어떠한 상황에든지 그 영광을 기다리고,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선포한 이사야의 희망에 메시지를 듣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느끼며 체험하기를 원하는 저희들의 결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친히 영광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시키시며 은혜와 공의로 이 땅을 통치하실 메시야를 간절히 사모하시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잘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본문: 이사야 40장 1-11절
“나는 일생 동안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필요하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흑백 분리 차별정책인 아파르헤이트에 대항하여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1964년 4월에 국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후 넬슨 만델라가 법정에서 최후 진술한 것입니다. 그는 199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남아공의 흑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동시에 차별과 구금과 폭력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암흑 같은 시간이 언제 끝날까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극도로 지키고 정신은 피폐해져 갔으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나날이 날카로워져만 갔습니다. 절망과 근심의 무게에, 암담한 미래의 무게에, 미움과 의심의 무게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내용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도 지독하던 앗수르에서 벗어나는 듯 싶더니 히스기야 왕의 실수로 인해 앗수르보다 더한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철저히 유린당하고 나라도 빼았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출애굽의 하나님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머나먼 이방 땅에서 고향을 소망하여 살아온 지 꽤 오랩니다. 실날 같은 소망도 절망의 그림자에 막혀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고난과 문제의 연속이라고들 합니다. 하나의 문제 넘어 또 하나의 문제가 일평생 가는 동안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고비 넘고 한 숨 쉬고 또 한 고비를 맞습니다. 자녀에 대해서, 사업에 대해서, 학업과 연구에 대해서 때론 잘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빠듯합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으면서도 순간 불안함이 엄습해 옵니다. 만약 우리 안에 신앙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지칠 때마다 자족 섞인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기에 있는 암울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40장 1-2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날은 언제일까요? 아마도 그들의 죄가 사함 받고 현실적인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온 백성이 마음껏 예배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이사야서 39장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겪는 포로 생활은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약자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이제 그런 그들에게 의미 있는 단어를 던집니다. ‘예루살렘’과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이라고 지칭합니다. 마음 속에서 잊혀져 버렸을 것만 같았던 그들의 마음의 고향, 정신적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다시금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됨을 확인해 주는 단어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시면서 지금 정답게 말씀하십니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숨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게 만듭니다.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마음이 굳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굳어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 보다는 우리의 회복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냥 형벌을 받고 그곳으로 그치기만 바라지는 않습니다. 내내 그런 징벌과 고난에 침묵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신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애굽기 2장 23-25절)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들의 죄 값을 배나 치룬 이스라엘에게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도무지 들릴 것 같지 않는 먼 원방의 나라에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문제나 고통이 나 때문이든 혹은 우리 가족 때문이든, 때론 우리 공동체나 민족 때문이거든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장 8절)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회개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들으실 줄 아는 부드러운 마음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회복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이어 나온 말씀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3-5절까지는 ‘여호와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입니다. 6-8절까지는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9-11절에서는 “주 여호와의 통치가 임할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마치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와 통치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신약으로 오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했던 말씀(누가복음 3장 4-6절)과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성(베드로전서 1장 24-25절)을 사모하면서 보냈던 편지 속에 고스란히 이루어집니다. 그 약속의 신실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영원한 통치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 하나님을 보라(Here is your God)”입니다. 아무리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도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우리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는 외침이 우리의 모든 절망의 구름의 절규라면 “너희 하나님을 보라”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뚫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터져 나오는 영광의 함성입니다. 멀리만 계신 것 같았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직접 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 사건 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예수님이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올라간 그대로 오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10절과 11절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에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로로다.”
27년 간의 감옥생활에도 만델라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룰 자유와 평등의 날을 꿈꿨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 앞에 이루어졌습니다. 아파르헤이트(apartheid)는 종식되고 선거를 통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새로 태어난 자유에 영광과 희망을 돌린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법자 신세였던 우리는 오늘 우리의 땅에 세계 각국을 초청하는 귀중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우리는 결국 정치적 해방을 이뤄냈다. 우리는 아직도 빈곤과 박탈, 성차별 등 여러 차별에 묶여 있는 우리 국민을 해방시킬 것임을 맹세한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하자.” (1994년 5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기 너희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이사야의 선포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회복을 믿었습니다. 지난 12월 5일 95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기기까지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루어질 메시야의 나라를 꿈꾸고 그것을 계속해서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내가 고통 당할 때 어디 있습니까? 지난 1년 동안 내가 너무 힘들었는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 막막했는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아직도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여기 당신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Here is Your God).” 인생의 환난과 고통을 다윗만큼 경험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그 고통의 자리에, 그 힘듦의 자리에 자기와 언제나 함께 하셨던 그것을 경험한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너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 18편 1-2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강절 주일을 맞아 여기 앞의 다섯 개의 촛불 가운데 우리는 세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높은 산들처럼, 때론 광야 길의 거친 비탈길처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더욱 강팍하게 하는 시험이나 환난을 겪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힘조차 없으신지요? 이 촛불들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더불어 어떠한 상황에든지 그 영광을 기다리고,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선포한 이사야의 희망에 메시지를 듣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느끼며 체험하기를 원하는 저희들의 결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친히 영광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시키시며 은혜와 공의로 이 땅을 통치하실 메시야를 간절히 사모하시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잘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