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 향하는 은혜
에베소서 4장 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Ephesians 4:22-24 NIV)
뉴잉글랜드는 가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즘은 굳이 New Hampshire의 White Mountain을 가지 않아도 잠시 도회지를 벗어나 시골 호숫가를 거닐기만 해도 마음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이 이렇게도 아름답구나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변화! 아름다움으로의 변화는 무죄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나 딸들이, 또 여러 자매님들이 아름다워지려고 성형을 하거나 화장하는 것에, 머리를 하고 자신을 가꾸는 것에, 그것이 과도한 사치나 혹은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 거부감을 갖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과연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외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서든지 많이 바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 사람도 그렇게 바뀔 수가 있을 까요? 우리가 사는 인생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죽어서도 개버릇 남 못준다’라는 속담처럼 우리 안에 형성된 성격과 습관 때문에 우리의 삶을 바꾸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줄줄히 줄담배를 끼고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보 담배 좀 끊어요. 애들 한테도 안좋고, 당신한테도 안좋잖아요?” 아내가 불평을 할라치면 옆에서 시어머니가 한마디 거듭니다. ‘에미야,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무얼 더 바란다고. 그냥 피우고 살게 내버려둬라.”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는 분명히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이 헌 옷을 입은 사람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라는 전제와 그러기에 우리는 마치 새 옷을 입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질과 생각과 삶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생명으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옛사람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옛사람(old self)의 특징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내 생각과 내 뜻을 따라 나의 욕심대로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는 일면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꾸준한 자기 개발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는 성취감을 맛본다면, 그것도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 개발, 자아 실현, 잠재성 개발 등이라는 표어와 함께 요가, 명상, 음악과 함께 하는 운동, 여행 등을 즐깁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봉사 활동에 자발적으로 잘 참여합니다. 종교적으로 얽매인 것이 없이 자유롭고 부러워 보입니다. 술도, 춤도, 음악도 함께 즐기고 적당히 세상 즐거움에 탐닉합니다. 외견상으로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벗어버려야 할 ‘옛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분명 잘못됐다라는 말입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으로의 변화, 썩어짐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장 6-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내 방식을 따라 산 사람들은 결국 전도서의 말씀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탄식을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27절)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인간 안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일그러지고 왜곡되었습니다. 일면 우리가 보기에 최고로 아름답게 여기던 것들도 어느 한 순간 무너지고 썩어져 버리게 되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의 최고의 노력이 어느 정도는 선을 이끌어 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함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함과 영원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이사야 6장 9절) 죄악으로 인해 마음이 굳어져 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옛자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마치 거울이 우리의 외모의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의 거울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장 15-17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읽고 들으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영에 그 심령이 부딪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라는 사실과 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거하게 되었고, 죄의 종의 굴레 아래 살게 되었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결국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인 사망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필요한 낮은 자리에 위치한 죄인들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골고루 비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둘째로 우리에게 신앙 사건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옛자아에게만 머무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반전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놀라운 계획은 구원이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최고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우리는 절대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해야만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전서 5장 17절)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다가 한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삭개오라는 사람인데 키는 작지만, 세리장, 즉 세무서장 정도 되는 사람으로서 굉장한 부자로 나옵니다. 당시의 세리에 대한 편견 때문에 매국노로 취급 받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살았지만, 그것도 본인 생각하기 나름인지라 부정하게 세금을 착복하면서도 부유하게 나름 잘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즉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 주관대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부와 권세를 누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마음 가운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예수님께서 그 동네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좀 알고 싶어졌습니다. 키가 작은 관계로 예수님을 보러 운집한 많은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발을 치켜세우고 꼿꼿이 서서 볼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뽕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든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보기는 합니다. 아마 그냥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 ‘와 멋있다’ 혹은 ‘정말 인자하게 생기셨네’ 라고 그냥 지나쳤다면 그의 이름도 그의 신앙 사건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혀 만나본 적도 없는 자기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복음 19장 5절) 그때 누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6절) 다른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삭개오 본인은 그전까지 이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양심의 가책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그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집에 영접한 후에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 자신의 자아가 어떠한 모습인지 보게 된 것입니다. 죄된 모습, 함께 하신 예수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옛 자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심령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진정 인생의 바닥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자기를 찾아오시고, 아시고 함께 거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심령이 새롭게 된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장 10절) 예수님을 보고 지나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 삭개오와 그의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 자신도 다시 한번 예수님 만나는 사건을 통해 우리의 옛자아의 모습을 살펴보고 심령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옛 자아를 버리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헌 옷 위에 새 옷을 걸쳐 입는 것이 아니라, 헌 옷은 과감하게 내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새 옷으로 갈아 입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만남 자체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사건을 통해 철저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을 따르는 거룩함으로 변화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 세상 속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에게 더 낮은 자의 삶을 요구합니다. “인생은 인생(人生)이 아니라 천생(天生)입니다”라는 어느 지혜자의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의 주인의 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우리는 낮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때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가족 새생명 전도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서 많은 분들이 저희 교회에 오셨고 새로운 가족이 되었습니다. 서로 모습은 달라도 다같이 보스톤 필그림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우리는 한 가족(One Family) 공동체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진정한 가족은 같은 교회(One Church)를 다닌다는 사실 보다 우리가 한 신앙(One Faith) 안에 있을 때에 더더욱 굳건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옛 자아가 부서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때, 자아라는 교만의 높음에서 믿음이라는 신앙의 낮은 자리로 옮겨간 우리의 속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다시 한번 여러분께 권면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변화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헛된 유혹으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으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함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해 생명으로의 변화를 마음껏 경험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 복음에 대해 다시 한번 동영상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혹 이미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신 분들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시고, 이제 처음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예수님에 대해 알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Ephesians 4:22-24 NIV)
뉴잉글랜드는 가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즘은 굳이 New Hampshire의 White Mountain을 가지 않아도 잠시 도회지를 벗어나 시골 호숫가를 거닐기만 해도 마음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이 이렇게도 아름답구나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변화! 아름다움으로의 변화는 무죄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나 딸들이, 또 여러 자매님들이 아름다워지려고 성형을 하거나 화장하는 것에, 머리를 하고 자신을 가꾸는 것에, 그것이 과도한 사치나 혹은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 거부감을 갖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과연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외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서든지 많이 바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 사람도 그렇게 바뀔 수가 있을 까요? 우리가 사는 인생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죽어서도 개버릇 남 못준다’라는 속담처럼 우리 안에 형성된 성격과 습관 때문에 우리의 삶을 바꾸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줄줄히 줄담배를 끼고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보 담배 좀 끊어요. 애들 한테도 안좋고, 당신한테도 안좋잖아요?” 아내가 불평을 할라치면 옆에서 시어머니가 한마디 거듭니다. ‘에미야,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무얼 더 바란다고. 그냥 피우고 살게 내버려둬라.”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는 분명히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이 헌 옷을 입은 사람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라는 전제와 그러기에 우리는 마치 새 옷을 입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질과 생각과 삶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생명으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옛사람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옛사람(old self)의 특징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내 생각과 내 뜻을 따라 나의 욕심대로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는 일면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꾸준한 자기 개발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는 성취감을 맛본다면, 그것도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 개발, 자아 실현, 잠재성 개발 등이라는 표어와 함께 요가, 명상, 음악과 함께 하는 운동, 여행 등을 즐깁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봉사 활동에 자발적으로 잘 참여합니다. 종교적으로 얽매인 것이 없이 자유롭고 부러워 보입니다. 술도, 춤도, 음악도 함께 즐기고 적당히 세상 즐거움에 탐닉합니다. 외견상으로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벗어버려야 할 ‘옛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분명 잘못됐다라는 말입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으로의 변화, 썩어짐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장 6-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내 방식을 따라 산 사람들은 결국 전도서의 말씀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탄식을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27절)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인간 안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일그러지고 왜곡되었습니다. 일면 우리가 보기에 최고로 아름답게 여기던 것들도 어느 한 순간 무너지고 썩어져 버리게 되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의 최고의 노력이 어느 정도는 선을 이끌어 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함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함과 영원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이사야 6장 9절) 죄악으로 인해 마음이 굳어져 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옛자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마치 거울이 우리의 외모의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의 거울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장 15-17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읽고 들으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영에 그 심령이 부딪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라는 사실과 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거하게 되었고, 죄의 종의 굴레 아래 살게 되었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가 결국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인 사망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필요한 낮은 자리에 위치한 죄인들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골고루 비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둘째로 우리에게 신앙 사건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옛자아에게만 머무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반전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놀라운 계획은 구원이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최고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우리는 절대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해야만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전서 5장 17절)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다가 한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삭개오라는 사람인데 키는 작지만, 세리장, 즉 세무서장 정도 되는 사람으로서 굉장한 부자로 나옵니다. 당시의 세리에 대한 편견 때문에 매국노로 취급 받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살았지만, 그것도 본인 생각하기 나름인지라 부정하게 세금을 착복하면서도 부유하게 나름 잘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즉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 주관대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부와 권세를 누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마음 가운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예수님께서 그 동네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좀 알고 싶어졌습니다. 키가 작은 관계로 예수님을 보러 운집한 많은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발을 치켜세우고 꼿꼿이 서서 볼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뽕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든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보기는 합니다. 아마 그냥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 ‘와 멋있다’ 혹은 ‘정말 인자하게 생기셨네’ 라고 그냥 지나쳤다면 그의 이름도 그의 신앙 사건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혀 만나본 적도 없는 자기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복음 19장 5절) 그때 누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6절) 다른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삭개오 본인은 그전까지 이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양심의 가책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그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집에 영접한 후에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 자신의 자아가 어떠한 모습인지 보게 된 것입니다. 죄된 모습, 함께 하신 예수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옛 자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심령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진정 인생의 바닥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자기를 찾아오시고, 아시고 함께 거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심령이 새롭게 된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장 10절) 예수님을 보고 지나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 삭개오와 그의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 자신도 다시 한번 예수님 만나는 사건을 통해 우리의 옛자아의 모습을 살펴보고 심령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옛 자아를 버리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헌 옷 위에 새 옷을 걸쳐 입는 것이 아니라, 헌 옷은 과감하게 내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새 옷으로 갈아 입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만남 자체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사건을 통해 철저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을 따르는 거룩함으로 변화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 세상 속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에게 더 낮은 자의 삶을 요구합니다. “인생은 인생(人生)이 아니라 천생(天生)입니다”라는 어느 지혜자의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의 주인의 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리고 우리는 낮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때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가족 새생명 전도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서 많은 분들이 저희 교회에 오셨고 새로운 가족이 되었습니다. 서로 모습은 달라도 다같이 보스톤 필그림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우리는 한 가족(One Family) 공동체임을 느낍니다. 그러나 진정한 가족은 같은 교회(One Church)를 다닌다는 사실 보다 우리가 한 신앙(One Faith) 안에 있을 때에 더더욱 굳건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옛 자아가 부서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때, 자아라는 교만의 높음에서 믿음이라는 신앙의 낮은 자리로 옮겨간 우리의 속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다시 한번 여러분께 권면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변화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헛된 유혹으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으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함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해 생명으로의 변화를 마음껏 경험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 복음에 대해 다시 한번 동영상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혹 이미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신 분들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시고, 이제 처음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예수님에 대해 알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