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3: On Sexual Immorality
순결한 그리스도인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I Corinthians 3:16-17)
연세가 많은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항상 기도에 열심이시고 여러 가지 봉사에도 열심이신 분입니다.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면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딸처럼 귀엽게 느껴지게 됩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새벽기도회의 인도를 마치고 조용히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권사님이 사무실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 시간에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권사님은 목사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저 목사님을 참 사랑해요” 거기까지는 가볍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이 문제였습니다. “저 한번 안아주세요”
다른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새벽예배를 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도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몇분 성도님들이 함께 새벽예배를 했습니다. 그 중에 좀 유별난 여자 성도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미국분과 결혼하신 분이었는데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새벽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꼭 목사님을 대접했습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대접하더니 점차 목사님 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모님의 눈치야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 음식을 하시고 목사님을 대접했습니다. 결국 남편과는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목사님 가정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가정도 순탄치 못해 결국 그곳에서 목회를 그만 두시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들 중에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성적인 유혹과 음란에 관한 것입니다. 몇 해 전 서울의 유명한 목사님이 성도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큰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이곳 보스톤에서도 몇 해 전에 실제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어떤 교회가 시험이 들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문제는 장소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음란의 영은 육체적 노출을 너무도 자연시 하는 미국 문화와 더불어 우리 곁에 너무도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교회가 도전한 두번째 문제가 바로 성적인 타락 문제였습니다.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2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아버지의 첩을 상대로 관계하던 음란한 고린도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고 기도하던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5장에서 다루면서 그들에게 이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도록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험을 이기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요? 고린도교회의 성적인 부도덕과 관련하여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매일 묵상해 갈 때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멀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각인시켜 줍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장 1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바울은 재차 이것을 확인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값을 주고 하나님께서 사신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저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거룩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절대로 죄와는 공존하지 말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또 다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 죄를 범함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적인 유혹은 이런 우리의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상관없이, 혹은 깊이기도하는 우리의 영적인 진지한 상태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유명한 많은 목사님들도 한 순간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이란 책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은 마치 강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강물이 제방 위를 넘을 때는 위험한 것이다. 그릇된 성적 욕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방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일생 동안 결혼 생활을 통하여 함께 사는 것이다. … (기도를 통해) 강물이 제방을 넘쳐 흐르는 것을 영상으르 그리면서 주님께 그 강물이 본래의 통로로 돌아가도록 해주시기를 요청해야 한다.” 성적인 유혹을 따라 죄를 피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언들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일단 그런 장소와 환경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호젓한 곳에서 함께 있는 것을 피한다든지, 혹은 배우자보다 더 친밀한 이성친구를 두지 말라든지 (이것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Office Wife/ Office Husband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겠습니다), 영화나 단순히 음란한 상상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하고 깨끗하며 운동에 열심이어야 한다든지 실제적인 예들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음란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 올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날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유혹으로 인한 사망의 사슬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툴리안 차비진(Tullian Tchividjian) 목사님은 [예수로 충분합니다 Jesus All] 이란 책에서 이런 예화를 들어 줍니다. 친구 중에 Steven Brown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g그에게는 영문학 수업으로 너무 고생하고 있는 로빈 Robin 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너무 어려워 낙제할 두려움에 휩싸여 공부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딸의 힘듦을 보다 못해 아버지는 영어학과 학과장을 만나러 갑니다. 영어학과 학과장은 유태인 여성으로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 영문학 수업이 너무 힘들어 수업을 철회하고자 왔노라는 아버지와 딸의 울음섞인 얼굴을 보더니 로빈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학과장은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나서 로빈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노라고 부탁합니다. “로빈 학생, 어떤 심정인지 잘 알아요. 그런데 내가 시험 점수에 상관없이 무조건 A 학점을 주면 어떨까요? 시작도 하기 전에 A 학점을 주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바보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로빈은 훌쩍거리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학과장은 로빈을 격려하면서 “A 학점을 줄게요 학생은 이미 A 학점이에요 자, 함께 수업을 합시다.” 나중에 학과장은 브라운에게 로빈이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도록 낮은 성적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로빈은 그 수업에서 A 학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구원 사역” 때문에,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실패와 심판의 위험이 제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죄와 세상과 마귀와 우리 자신으로부터 이김을 얻은 것입니다. 이 예화는 우리가 갖는 의무 한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은 보장되었으되 학교 강의는 꼭 출석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런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우리가 날마다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매 순간 묻고 우리의 성전을 깨끗이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육체를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의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준 교훈은 능력보다 거룩이 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음란을 행하는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것을 행한 이들을 제대로 치리하지 못하고 용납한 것에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2절은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6절에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일을 행한 신자들이 영적인 능력이 많고 교회에 여러 가지 일들을 담당한다고 해서 그들의 부정을 눈감아주고 용납하고 그들이 은사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래서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라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우리 말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말씀을 잘 전하고 기도를 잘하고 목장과 여러 사역들을 잘 이끈다고 그냥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같습니다. 포주나 혹은 Liquor Store 사장으로 일하면서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하기에 그 사람의 일을 적당히 눈감아주고 교회 안에서 여러 직분으로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너무도 열심이고 진지하고 거룩한 체 했던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과 같은 일맥상통입니다. 많은 이민 교회 안에 이런 모습들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는 불편함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은혜와 거룩함이 언제 어느 때 필요한지 잘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은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를 바라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바라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전부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살인을 했든, 혹은 세상적으로 막 나가는 사람이든,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단정히 입은 옷과 깔끔한 머리의 청년들만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염색해서 머리를 세웠어도, 청바지가 좀 찢어졌어도, 그들의 모습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교회로 인도되면 우리는 아낌없이 그들을 환영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의인과 죄인이 함께하고 부나 지위나 능력의 차별이 이뤄지지 않는 은혜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식탁에 그 누구든지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동시에 주님을 알고 영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단했다면 계속 은혜를 간구하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되 한 단계 더 나아가 거룩함의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의 제자들로 성장한 교회 공동체에게는 죄와의 공존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은사면 전부다. 능력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덮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의 공동체입니다. 값으로 산 하나님의 몸을 귀하게 여기고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꿀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밖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 용납된 비거룩을 누룩으로 비유합니다. 5장 6-8절에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믜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은혜와 거룩함 사이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모르고 모든 죄를 단지 은혜로만 덮는다면 그 죄로 인해 오히려 우리의 공동체가 썩게 됨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것에 접촉하기만 하면 그것은긍정이든지 혹은 부정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것은 교회 안에 거룩보다 능력이나 은사를 중시하다보니 모든 것을 은혜로 덮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고린도전서 5장 11, 13절)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은혜에서 시작해서 거룩한 삶으로 신앙 생활의 방향점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입은 은혜의 감격과 포용을 그대로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한 우리는) 모두 더 이상 죄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구속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의 모습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담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적인 부도덕이라는 누룩으로 휘청했던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교훈으로 삼고 이 시대의 음란의 영에 맞서 성령님에 인도를 따라 거룩을 이루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순결한 그리스도인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I Corinthians 3:16-17)
연세가 많은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항상 기도에 열심이시고 여러 가지 봉사에도 열심이신 분입니다.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면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딸처럼 귀엽게 느껴지게 됩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새벽기도회의 인도를 마치고 조용히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권사님이 사무실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 시간에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권사님은 목사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저 목사님을 참 사랑해요” 거기까지는 가볍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이 문제였습니다. “저 한번 안아주세요”
다른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새벽예배를 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도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몇분 성도님들이 함께 새벽예배를 했습니다. 그 중에 좀 유별난 여자 성도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미국분과 결혼하신 분이었는데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새벽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꼭 목사님을 대접했습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대접하더니 점차 목사님 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모님의 눈치야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 음식을 하시고 목사님을 대접했습니다. 결국 남편과는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목사님 가정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가정도 순탄치 못해 결국 그곳에서 목회를 그만 두시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들 중에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성적인 유혹과 음란에 관한 것입니다. 몇 해 전 서울의 유명한 목사님이 성도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큰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이곳 보스톤에서도 몇 해 전에 실제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어떤 교회가 시험이 들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문제는 장소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음란의 영은 육체적 노출을 너무도 자연시 하는 미국 문화와 더불어 우리 곁에 너무도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교회가 도전한 두번째 문제가 바로 성적인 타락 문제였습니다.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2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아버지의 첩을 상대로 관계하던 음란한 고린도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고 기도하던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5장에서 다루면서 그들에게 이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도록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험을 이기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요? 고린도교회의 성적인 부도덕과 관련하여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매일 묵상해 갈 때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멀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각인시켜 줍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장 1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바울은 재차 이것을 확인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값을 주고 하나님께서 사신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저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거룩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절대로 죄와는 공존하지 말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또 다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 죄를 범함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적인 유혹은 이런 우리의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상관없이, 혹은 깊이기도하는 우리의 영적인 진지한 상태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유명한 많은 목사님들도 한 순간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이란 책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은 마치 강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강물이 제방 위를 넘을 때는 위험한 것이다. 그릇된 성적 욕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방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일생 동안 결혼 생활을 통하여 함께 사는 것이다. … (기도를 통해) 강물이 제방을 넘쳐 흐르는 것을 영상으르 그리면서 주님께 그 강물이 본래의 통로로 돌아가도록 해주시기를 요청해야 한다.” 성적인 유혹을 따라 죄를 피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언들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일단 그런 장소와 환경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호젓한 곳에서 함께 있는 것을 피한다든지, 혹은 배우자보다 더 친밀한 이성친구를 두지 말라든지 (이것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Office Wife/ Office Husband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겠습니다), 영화나 단순히 음란한 상상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하고 깨끗하며 운동에 열심이어야 한다든지 실제적인 예들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음란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 올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날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유혹으로 인한 사망의 사슬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툴리안 차비진(Tullian Tchividjian) 목사님은 [예수로 충분합니다 Jesus All] 이란 책에서 이런 예화를 들어 줍니다. 친구 중에 Steven Brown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g그에게는 영문학 수업으로 너무 고생하고 있는 로빈 Robin 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너무 어려워 낙제할 두려움에 휩싸여 공부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딸의 힘듦을 보다 못해 아버지는 영어학과 학과장을 만나러 갑니다. 영어학과 학과장은 유태인 여성으로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 영문학 수업이 너무 힘들어 수업을 철회하고자 왔노라는 아버지와 딸의 울음섞인 얼굴을 보더니 로빈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학과장은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나서 로빈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노라고 부탁합니다. “로빈 학생, 어떤 심정인지 잘 알아요. 그런데 내가 시험 점수에 상관없이 무조건 A 학점을 주면 어떨까요? 시작도 하기 전에 A 학점을 주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바보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로빈은 훌쩍거리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학과장은 로빈을 격려하면서 “A 학점을 줄게요 학생은 이미 A 학점이에요 자, 함께 수업을 합시다.” 나중에 학과장은 브라운에게 로빈이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도록 낮은 성적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로빈은 그 수업에서 A 학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구원 사역” 때문에,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실패와 심판의 위험이 제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죄와 세상과 마귀와 우리 자신으로부터 이김을 얻은 것입니다. 이 예화는 우리가 갖는 의무 한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은 보장되었으되 학교 강의는 꼭 출석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런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우리가 날마다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매 순간 묻고 우리의 성전을 깨끗이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육체를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의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준 교훈은 능력보다 거룩이 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음란을 행하는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것을 행한 이들을 제대로 치리하지 못하고 용납한 것에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2절은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6절에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일을 행한 신자들이 영적인 능력이 많고 교회에 여러 가지 일들을 담당한다고 해서 그들의 부정을 눈감아주고 용납하고 그들이 은사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래서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라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우리 말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말씀을 잘 전하고 기도를 잘하고 목장과 여러 사역들을 잘 이끈다고 그냥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같습니다. 포주나 혹은 Liquor Store 사장으로 일하면서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하기에 그 사람의 일을 적당히 눈감아주고 교회 안에서 여러 직분으로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너무도 열심이고 진지하고 거룩한 체 했던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과 같은 일맥상통입니다. 많은 이민 교회 안에 이런 모습들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는 불편함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은혜와 거룩함이 언제 어느 때 필요한지 잘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은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를 바라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바라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전부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살인을 했든, 혹은 세상적으로 막 나가는 사람이든,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단정히 입은 옷과 깔끔한 머리의 청년들만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염색해서 머리를 세웠어도, 청바지가 좀 찢어졌어도, 그들의 모습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교회로 인도되면 우리는 아낌없이 그들을 환영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의인과 죄인이 함께하고 부나 지위나 능력의 차별이 이뤄지지 않는 은혜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식탁에 그 누구든지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동시에 주님을 알고 영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단했다면 계속 은혜를 간구하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되 한 단계 더 나아가 거룩함의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의 제자들로 성장한 교회 공동체에게는 죄와의 공존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은사면 전부다. 능력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덮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의 공동체입니다. 값으로 산 하나님의 몸을 귀하게 여기고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꿀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밖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 용납된 비거룩을 누룩으로 비유합니다. 5장 6-8절에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믜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은혜와 거룩함 사이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모르고 모든 죄를 단지 은혜로만 덮는다면 그 죄로 인해 오히려 우리의 공동체가 썩게 됨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것에 접촉하기만 하면 그것은긍정이든지 혹은 부정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것은 교회 안에 거룩보다 능력이나 은사를 중시하다보니 모든 것을 은혜로 덮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고린도전서 5장 11, 13절)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은혜에서 시작해서 거룩한 삶으로 신앙 생활의 방향점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입은 은혜의 감격과 포용을 그대로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한 우리는) 모두 더 이상 죄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구속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의 모습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담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적인 부도덕이라는 누룩으로 휘청했던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교훈으로 삼고 이 시대의 음란의 영에 맞서 성령님에 인도를 따라 거룩을 이루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