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하만 (Haman in My Heart)
성경본문: 에스더 3장 1-6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태복음 15장 11절) 후에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에게 자세히 뜻을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태복음 15장 17-18절)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생각과 행동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 안에 지금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마음은 종종 밭으로 비유 되곤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밭에 무엇이 있는가는 그곳에 무엇을 심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얼마 전이든 아니면 아주 오래 전부터 심어온 것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올 한 해를 열면서 우리 보스톤 필그림교회는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어를 더욱 간단하고 쉽게 표현 하자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까?’라는 말일 것입니다. 한달이 벌써 훌쩍 지나 버렸는데, 이런 결심이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끊임없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로마서 7장 15,19절) 무엇이 문제일까요? 저는 여러분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즉 에스더 3장 1~6절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 중간 정도에 보면 별로 눈에 띠지 않는 책, 에스더가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시고, 성경을 읽어보신 분은 에스더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고, 에스더의 지혜를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큰 곤경에서 벗어난 것 정도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나 지금이나 딸을 낳으면 이름을 에스더(Esther)라고 많이 짓습니다. 에스더는 오히려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더 익숙한 성경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날을 기념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두 번 포로 생활을 합니다. 첫번째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총리가 되고, 기근을 피해 그의 부친 야곱과 형제들을 초청한 후 큰 민족을 이룹니다. 그러나 요셉 사후에 왕조가 바뀌고 나서 히브리 민족이 통치자 계급에서 종의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무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첫번째 포로 생활과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두번째는 바로 오늘 본문 배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범죄한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BC 721년과 BC 586년경에 차례로 멸망 당하고, 당시 왕족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메대라는 나라를 거쳐 우리에게 익숙한 페르시아의 전성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당시의 왕은 아하수에로였으며, 헬라식으로는 크세르 크세로(Xerxes, BC 485~486) 왕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지략이 뛰어난 왕이었으며, 동시에 자기를 과신하고 크게 파티를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섭리로 유대인인 에스더가 왕후가 됩니다. 그런데 그 왕후를 키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입니다. 어쩌면 에스더서의 중심인물이 에스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발단과 그 결과의 중심에는 바로 모르드개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2~3년쯤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대신 위에 두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됐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왕이 모든 신하에게 명령을 내려 하만에게 꿇고 절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유독 모르드개만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하만의 눈에 띄지 않았을 터인데 하만과 가까운 다른 왕의 신복들 때문에 그의 이런 행동이 드러나게 됩니다. 모르드개에게 권면하여 왕의 명령을 따르라고 해도 굽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이유를 드는데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만은 대노(大怒)하고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히틀러 같은 인종 말살 정책을 여기서 미리 보게 됩니다. 당연히 민족 전체를 담보로 할 정도로 모르드개가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하만을 무시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유대인과 하만과는 어떤 관계이기에 모르드개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본문 3장 1절에서 하만의 출신을 설명하는 단어가 몇 개 붙습니다.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아각’이라는 인물은 사무엘상 15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베냐민 출신인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과 그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사울이 아각을 사로 잡고 좋은 것을 남겨 놓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그 일 때문에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음 것을 후회하게 되고 결국 왕권이 다윗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에스더 2장 5절에 보니까 바로 모르드개가 베냐민 자손으로 나옵니다. 즉 아각 사람인 하만과 베냐민 자손인 모르드개 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일 뿐 아니라 모르드개의 피 속에는 역사적인 실수와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결연함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멀리는 출애굽기 17장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제일 먼저 부딪힌 사람들이 바로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과 출신이 같은 형제인 에서 족속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방해합니다. 가만히 후미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우고 산 꼭대기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싸움에서 승리한 후 모세가 단을 쌓고 그 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고 하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출애굽기 17장 18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인(이스라엘)들이 대대로 싸울 대적이 바로 아말렉 족속이요, 그 대표자가 아각 사람들이요 그 후손이 바로 하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일면 개인 대 개인의 싸움으로 비춰지지만, 역사적인 사건들의 결과요 신앙의 충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신해 싸우고 있는 그의 불굴의 신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대해서 철저하게 순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이방 민족의 땅입니다. 즉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도, 그리고 그곳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도 그 자신의 상황이 하만보다 절대 불리함에도 불과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것 이면에는 하만을 대표하는 그 무언가에 우리가 종속되고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만 즉 아말렉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악한 사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말살케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이백만 백성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준비가 전혀 없었고, 메마른 광야에서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던 그 어려운 시기를 틈타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눈에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형편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만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제일 위험한 것이 바로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판단할 때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보자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아 보이고 편안해 보이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하면 마귀가 40일 금식한 예수님께 보여준 것이 세상 모든 영화 이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은혜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산 위에서 기도하던 모세의 지팡이가 깃발처럼 햇빛에 빛으로 비추일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얻고 아말렉을 무찔렀던 것처럼, 모르드개도 바로 그런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현실 속에서 내가 열세이고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도 나는 언젠가는 사라질 마귀 권세에 편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얻겠노라는 믿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아말렉을 세상 권세나 영화에 비유한다면 그것에 굴하지 않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 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함께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편 1-2절)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하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바라보고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우리는 날마다 우리 밖에 있는 하만을 만납니다. ‘너희가 그것을 경배하면 이것을 주리라.’ 달콤한 약속입니다. 편안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약속이고 영원하지 않는 연약한 약속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을 인정하는 신앙 그것이 우리의 참된 예배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가 이런 외부적인 하만의 위험성도 깨달을 수 있지만, 본문 그 자체 속에 숨겨져 있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하만의 모습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대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교묘하고 대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무시무시합니다. 조그마한 누룩이 온 빵덩어리에 퍼져 못 먹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하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에스더서가 진행되면 될수록 하만의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아하수에로 왕 앞에서 그가 표출한 생각에서 우리는 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스더 6장 6~9절) 즉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만에게 절하고 무릎 꿇는다는 사실 가운데는 우리 자신의 중심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 대신에 앉고자 하는 영적인 교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열심으로 교묘히 가장됩니다 그래서 예배하다가 섬기다가 우리가 인정받지 않는 것 같으면 시험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나는 모습, 목사가 드러나고 성도가 드러나는 모습이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시작이지만, 별로 티도 나지 않지만, 내 안의 그런 모습이 누룩이 되어 전체를 멸망시킬 사탄의 계획에 놓이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육적인 정욕 때문에, 이생에 대한 자랑 때문에, 억누를 수 없는 권세에 대한 추구 때문에, 우리 안의 강력한 진을 구축하고 있는 성령이 훼방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르드개처럼 우리가 죽으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혈과 육의 욕심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고자 하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유혹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죽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장 1-2절) 우리가 육에 대해서 죽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 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될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참된 섬김이 나올 수가 없고, 오히려 봉사와 직분이 우리가 쌓는 공로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위협하는 인간적인 노력과 교묘한 사탄의 계획은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 과감하게 말씀과 확고한 신앙의 행동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불이익이 다가오더라도 우리의 깃발이 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내어 맡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좀먹는 자기중심적이고 소비적인 세상 정욕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주님과 함께 사는 연습이 오직 우리 앞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매일 매일 훈련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결론을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구원하여 주시되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더욱 높이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그렇게 역사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의 거룩한 예배와 섬김 가운데 나타나시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성경본문: 에스더 3장 1-6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태복음 15장 11절) 후에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에게 자세히 뜻을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태복음 15장 17-18절)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대부분의 생각과 행동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 안에 지금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마음은 종종 밭으로 비유 되곤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밭에 무엇이 있는가는 그곳에 무엇을 심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얼마 전이든 아니면 아주 오래 전부터 심어온 것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 올 한 해를 열면서 우리 보스톤 필그림교회는 ‘거룩한 예배자,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어를 더욱 간단하고 쉽게 표현 하자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까?’라는 말일 것입니다. 한달이 벌써 훌쩍 지나 버렸는데, 이런 결심이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끊임없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로마서 7장 15,19절) 무엇이 문제일까요? 저는 여러분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즉 에스더 3장 1~6절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 중간 정도에 보면 별로 눈에 띠지 않는 책, 에스더가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시고, 성경을 읽어보신 분은 에스더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고, 에스더의 지혜를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큰 곤경에서 벗어난 것 정도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나 지금이나 딸을 낳으면 이름을 에스더(Esther)라고 많이 짓습니다. 에스더는 오히려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더 익숙한 성경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날을 기념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두 번 포로 생활을 합니다. 첫번째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총리가 되고, 기근을 피해 그의 부친 야곱과 형제들을 초청한 후 큰 민족을 이룹니다. 그러나 요셉 사후에 왕조가 바뀌고 나서 히브리 민족이 통치자 계급에서 종의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무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첫번째 포로 생활과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두번째는 바로 오늘 본문 배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범죄한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BC 721년과 BC 586년경에 차례로 멸망 당하고, 당시 왕족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메대라는 나라를 거쳐 우리에게 익숙한 페르시아의 전성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당시의 왕은 아하수에로였으며, 헬라식으로는 크세르 크세로(Xerxes, BC 485~486) 왕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지략이 뛰어난 왕이었으며, 동시에 자기를 과신하고 크게 파티를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섭리로 유대인인 에스더가 왕후가 됩니다. 그런데 그 왕후를 키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입니다. 어쩌면 에스더서의 중심인물이 에스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발단과 그 결과의 중심에는 바로 모르드개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2~3년쯤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대신 위에 두게 됩니다. 성경은 그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됐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왕이 모든 신하에게 명령을 내려 하만에게 꿇고 절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유독 모르드개만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하만의 눈에 띄지 않았을 터인데 하만과 가까운 다른 왕의 신복들 때문에 그의 이런 행동이 드러나게 됩니다. 모르드개에게 권면하여 왕의 명령을 따르라고 해도 굽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이유를 드는데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만은 대노(大怒)하고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히틀러 같은 인종 말살 정책을 여기서 미리 보게 됩니다. 당연히 민족 전체를 담보로 할 정도로 모르드개가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하만을 무시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유대인과 하만과는 어떤 관계이기에 모르드개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본문 3장 1절에서 하만의 출신을 설명하는 단어가 몇 개 붙습니다.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아각’이라는 인물은 사무엘상 15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베냐민 출신인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과 그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사울이 아각을 사로 잡고 좋은 것을 남겨 놓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그 일 때문에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음 것을 후회하게 되고 결국 왕권이 다윗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에스더 2장 5절에 보니까 바로 모르드개가 베냐민 자손으로 나옵니다. 즉 아각 사람인 하만과 베냐민 자손인 모르드개 사이에는 적대적인 관계일 뿐 아니라 모르드개의 피 속에는 역사적인 실수와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결연함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멀리는 출애굽기 17장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제일 먼저 부딪힌 사람들이 바로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과 출신이 같은 형제인 에서 족속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방해합니다. 가만히 후미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우고 산 꼭대기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싸움에서 승리한 후 모세가 단을 쌓고 그 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라고 하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출애굽기 17장 18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인(이스라엘)들이 대대로 싸울 대적이 바로 아말렉 족속이요, 그 대표자가 아각 사람들이요 그 후손이 바로 하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일면 개인 대 개인의 싸움으로 비춰지지만, 역사적인 사건들의 결과요 신앙의 충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신해 싸우고 있는 그의 불굴의 신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대해서 철저하게 순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이방 민족의 땅입니다. 즉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도, 그리고 그곳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도 그 자신의 상황이 하만보다 절대 불리함에도 불과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것 이면에는 하만을 대표하는 그 무언가에 우리가 종속되고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만 즉 아말렉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악한 사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말살케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이백만 백성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준비가 전혀 없었고, 메마른 광야에서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던 그 어려운 시기를 틈타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눈에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형편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만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제일 위험한 것이 바로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 판단할 때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보자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살아 보이고 편안해 보이고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하면 마귀가 40일 금식한 예수님께 보여준 것이 세상 모든 영화 이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은혜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산 위에서 기도하던 모세의 지팡이가 깃발처럼 햇빛에 빛으로 비추일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얻고 아말렉을 무찔렀던 것처럼, 모르드개도 바로 그런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현실 속에서 내가 열세이고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도 나는 언젠가는 사라질 마귀 권세에 편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얻겠노라는 믿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아말렉을 세상 권세나 영화에 비유한다면 그것에 굴하지 않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 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함께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편 1-2절)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하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바라보고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우리는 날마다 우리 밖에 있는 하만을 만납니다. ‘너희가 그것을 경배하면 이것을 주리라.’ 달콤한 약속입니다. 편안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약속이고 영원하지 않는 연약한 약속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을 인정하는 신앙 그것이 우리의 참된 예배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가 이런 외부적인 하만의 위험성도 깨달을 수 있지만, 본문 그 자체 속에 숨겨져 있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하만의 모습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대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교묘하고 대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무시무시합니다. 조그마한 누룩이 온 빵덩어리에 퍼져 못 먹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하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에스더서가 진행되면 될수록 하만의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아하수에로 왕 앞에서 그가 표출한 생각에서 우리는 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스더 6장 6~9절) 즉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만에게 절하고 무릎 꿇는다는 사실 가운데는 우리 자신의 중심이 드러나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 대신에 앉고자 하는 영적인 교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열심으로 교묘히 가장됩니다 그래서 예배하다가 섬기다가 우리가 인정받지 않는 것 같으면 시험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나는 모습, 목사가 드러나고 성도가 드러나는 모습이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시작이지만, 별로 티도 나지 않지만, 내 안의 그런 모습이 누룩이 되어 전체를 멸망시킬 사탄의 계획에 놓이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육적인 정욕 때문에, 이생에 대한 자랑 때문에, 억누를 수 없는 권세에 대한 추구 때문에, 우리 안의 강력한 진을 구축하고 있는 성령이 훼방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르드개처럼 우리가 죽으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혈과 육의 욕심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높이고자 하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유혹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죽이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장 1-2절) 우리가 육에 대해서 죽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 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될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참된 섬김이 나올 수가 없고, 오히려 봉사와 직분이 우리가 쌓는 공로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위협하는 인간적인 노력과 교묘한 사탄의 계획은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 과감하게 말씀과 확고한 신앙의 행동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불이익이 다가오더라도 우리의 깃발이 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내어 맡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좀먹는 자기중심적이고 소비적인 세상 정욕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주님과 함께 사는 연습이 오직 우리 앞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매일 매일 훈련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결론을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구원하여 주시되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더욱 높이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그렇게 역사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의 거룩한 예배와 섬김 가운데 나타나시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