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가보, 믿음의 유산
성경본문: 창세기 22:1-14
이 시간 부족한 저에게 남전도회 헌신예배 설교자로 불러 주신 박도술 목사님과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2006년 여름에 보스톤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갈 때에 저와 집사람이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여기 보스톤에 다시 올 수 있을까란 질문에 우리는 글쎄 아이들이 보스톤에 대학을 오지 않는한 여기 보스톤에 안 오겠지 라는 대화를 나누면서 갔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오게 되면서 우리가 살면서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적을 만들어서는 안되겠구나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남전도회 헌신예배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어느 성경본문이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께 적합한 말씀인가를 약 2주 동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도 잘 아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수없이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였던 본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독자 아들인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 즉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설교를 준비해 가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들 이삭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신앙의 일세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고향을 떠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향하여 가는 여정 가운데서 수없이 많은 인생 역정과 어려움을 겪었던 신앙의 일세대 아니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이민 일세대의 인물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들 이삭으로 말하자면 자기와 자기 부인이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나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낳은 아들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한국적인 정서가 남아 있으니까 좀 이해가 쉬우시겠죠. 한번 생각해 보시죠. 노년에 낳은 자식을 더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던 그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여러분은 쉽게 떠오를 수 있으시겠죠? 이런 애틋하고 아련한 심정이 자식이었던 이삭을 향하여 왜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에는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더군다나 아들을 제물을 칼로 사방으로 각을 내고 이 제물을 불로 태우는 번제물로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크게 두가지의 점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오늘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아닌 오히려 이삭에게 촛점을 두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7절을 함께 보십시다.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드릴 번제 제물에 대한 준비물은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작 중요한 번제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어린 이삭이 번제에 대해 그리고 번제 제사를 드릴 때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라는 점입니다. 이삭은 번제 제물이 없음에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는 이삭이 과거에 수없이 많이 번제 제사를 드렸던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아 왔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리고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들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결박을 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삭의 믿음을 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이가 100세가 넘은 나이였습니다. 아들 이삭이 7절 말씀처럼 분별있는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조금씩 세상을 알아나가는 나이가 된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도 약 110이상의 나이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면 나이가 들대로 들은 노년의 할아버지가 한창 자라나는 아이의 힘을 당해 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9절과 10절을 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만약 이삭이 자기의 생명이 위급함을 알았거나 아니면 다른 마음을 품어 자기의 생명을 보존코자 했다면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에 대해 대들거나 아니면 아버지 아브라함과 논쟁을 하거나 도망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거부하거나 대항하거나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는 그대로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삭에게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 즉 8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다시 말하면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구약 창세기에 보면 이삭이라는 존재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과 손자인 야곱과 요셉에 가려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 야곱 그리고 요셉처럼 화려하고 엄청난 인생 역정을 경험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삶을 그의 자손 대대로 이어져 가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이삭은 한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게 된 배경에는 이런 이삭의 순종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아갔지만 대항하지 않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에 자기 자신을 내려 놓았던 이삭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순종을 한 이삭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삭이 판 우물들은 실패하지 않고 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물을 판 곳에서 물이 나왔다는 점은 농경사회를 살았던 우리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사막지역인 그리고 척박한 땅을 가졌던 중동 사람들에게는 우물이 가기는 그 중요성은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가 아닙니까? 판 우물들마다 물이 나오는 그 축복을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은 어디서부터 나왔을까요? 한창 때에 나이가 들 대로 들은 아버지로부터 번제 제물처럼 손이 묶이고, 제단 위에 올려 짐을 당한 그런 이삭이 모습 그리고 그의 순종이 이런 축복을 받게 된 배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가졌던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 즉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이삭에게도 동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 보다는 아들 이삭의 믿음이 더욱 큼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거스렸던 아브라함의 최대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그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였던 대표적인 아브라함의 행동은 바로 이삭의 이복형이었던 이스마엘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아브라함의 실수와 잘못이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된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한 실수를 하고 또 하나님께 죄만 짓는 존재가 아닙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의도와 역사에 항상 브레이크를 걸고 창조자되신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존재들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의 대가인 아브라함도 이런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이런 인간의 죄성과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는 설교가 있습니까? 번제 제물로 자기의 아들을 칼로 각을 떠서 사지를 짤라야하는 아버지의 심정과 이런 번제 제물로 자기 자신이 드려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결박을 당하고 나무 제단위에 올려짐을 당하는 아들의 심정과 아픔을 오늘날 교회에서 증거 되어지고 있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들을 죽여야 하고 또 불에 태워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 그리고 분명히 죽어야 하고 불에 태워져야만 할 그런 존재가 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친 아버지로부터 결박을 당하고 제단 나무 위에 올려짐을 당하는 그런 이삭의 심정을 여러분은 이같은 상황이 여러분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떤 어려움과 곤란에 처해 있을 때 과연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제물을 준비하시리라는 믿음의 고백을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실의 상황에서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목회자인 저도 아브라함처럼 쉽게 그런 행동으로 옮겨질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향하여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절규와 사랑 그리고 십자가에서 아무런 죄도 없지만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헌신이 오늘날의 교회에 있습니까?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내가 계획했던 그 무엇인가가 우리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면 그것이 여호와 이레의 사건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우리에게 아브라함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인간의 짧은 판단과 생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으로 움직임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여호와 이레의 신앙,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신앙고백이 없으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하고, 내가 아무리 매달리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참된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 이삭을 죽이고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는 그 아버지의 심정 그리고 아무런 대항도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결박을 당하고 제단 나무 위에 올림을 당하여야 했던 그 아들 이삭의 모습을 통하여 저는 죄된 인간을 위해 자기의 아들을 보내 주셔야 했던 그 아버지 하나님의 절규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을 하여야만 했던 그 아들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이삭을 믿음의 통로를 이어나가는데 있어 한 중요한 축으로 만들었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고백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그렇게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특히 이삭에게는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창세기 26장 12절과 13절을 보십시요.“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는지 창세기 26장 14절을 보면 이방 민족인 블레셋 민족이 그를 시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은 이삭이 가졌던 여호와 이레의 믿음의 결과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우리에게 있어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요즈음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필요조건으로 믿고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충분조건으로 믿는 잘못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 필요가 우리에게 있어질 때 비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잘 되어 사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것이 다입니까? 여호와 이레의 믿음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축복만을 강조하고 그 외의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그런 신앙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있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이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에 그들이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가지지 않고는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여호와 이레의 신앙, 즉 하나님이 친히 자기 자신을 위해 준비하시리라라는 신앙의 고백이 없는 그런 믿음의 생활은 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하나의 교양생활을 하는 것이지 진정한 믿음새활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십니까? 보통 우리는 드러난 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고 이 사람 믿음 좋구나 아니면 나쁘구나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 다음으로 여러분의 모습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것은 목사로서 설교를 하는 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반봉현 목사야 너도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믿음을 가져라! 이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그리고 저의 설교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과 믿음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늦둥이를 칼로 토막을 내어 죽여야 하는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번제제물로 드려져야 하는 그런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여호와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믿음과 신앙고백으로 극복해 나간다면 거기에 비로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믿음의 결단이 없는 교회생활, 믿음생활은 언젠가 자기 공력이 나오고 이 교회는 내 것인데라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그리고 이런 믿음의 모습과 결단이 없는 교회는 비록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이것은 일개 하나의 교양생활을 하는 인간이 만든 단체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 그리고 세계사가 증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의 유산을 더욱 더 남길 수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처럼 너무나 소중한 자기의 아들까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던 그 모습 그리고 이삭처럼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옴을 알더라도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그런 순종이 있을 때에야 비로서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친해 준비하시리라라는 하나님의 액션이 나올 수 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믿음의 유산이 이어져 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믿음과 헌신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내 자신이 믿음의 유산과 가보를 이어가는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달자가 되려면 내 자신을 헌신하지 안으면 않됩니다. 내가 가진 제일 소중한 것, 내 자신까지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전도회 회원 여러분, 아니 더 나아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십니다. 마치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식된 우리를 위해 헌신하시고 고생하셨듯이 우리도 교회를 위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