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
성경본문: 시편 122:6 (Psalm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Pray for the peace of Jerusalem: “May those who love you be secure.
2000년도에 BTI (Boston Theological Institut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 지역 신학교들 중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하비 콕스 (Prof. Harvey Cox)가 개설한 “예루살렘: Jerusalem”이란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정치, 경제, 건축, 역사, 종교적인 면으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교인들, 모슬렘들까지 예루살렘을 그토록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 일생의 순례의 한 종착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Karan Armstrong은 Jerusalem: One City, Three Faiths 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아마도 고대 도시 중에서 예루살렘 만큼이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된 도시는 없을 것입니다. 지중해와 사해 사이에 위치한 산 위의 고도(Old City)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매년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순례를 하면서 무너진 옛 성벽에서 머리를 찌으며 기도하고 절규하며 눈물을 흘린단 말입니까? 예루살렘이 전 세계 사람들이 그만큼 사랑을 쏟을 만한 값어치가 있단 말입니까? 예루살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희가 읽은 시편 122편은 표제어에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을 지은 이가 다윗으로 나와 있지만, 실상은 후대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어느 무명의 순례자의 시편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3차례씩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북쪽 지역과 남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혹 이방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길고도 머나먼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루살렘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느꼈을 안도감과 평안함은 그들의 여독을 극복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 예루살렘에는 우리의 형제들이 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왕이 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이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그들의 영원한 본향이요 안식처였던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민족과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성을 갖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신앙적 사실과 연결됩니다. 먼저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묵묵히 순종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간 모리아 산이 그 시초입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간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나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여, 혹 자신이 번제로 죽여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실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친히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 하셔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 즉 훗날의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가지신 믿음을 표출하신 자리요 반대로 믿는 자의 신앙고백과 행함의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모리아산 그 곳처럼 여러분에게도 그런 곳이 있고, 그 곳에서 여러분의 신앙고백 때문에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는 다윗과 솔로몬의 믿음과 연결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그의 별명인 것처럼 항상 다윗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의 일평생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표현된 사건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일입니다. (삼하 6:12~16)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은 축복의 자리요 평화의 자리임을 깨달은 다윗은 그것을 제사장들과 옮기면서 마음껏 하나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즐거이 다윗 성인 예루살렘으로 옮겨 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춤추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법궤를 옮겨간 예루살렘에서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을 짓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일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의 성전을 준비한 다윗의 신앙이 깃든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을 솔로몬이 이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는 아버지 다윗을 이어 하나님 성전 건축을 완성했습니다. 드디어 완성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천번제를 드리고 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 27~30) 하나님은 장소에 국한되는 분이 아니시지만,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고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시키시며 축복해 달라고 열왕기상 8장 22절부터 53절까지 장엄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자리에서 이 땅 한 자락 한 켠 밖에 되지 않는 곳이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자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기도했던 솔로몬의 신앙의 자리가 바로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장소와 시간에 국한되시는 분은 아니지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이 기도하는 믿음의 자리가 너무나 간절하고 신실해서 온 천지에 주재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자리에 직접 크게 임재하고 축복하는 자리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 번째는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외아들인 예수님은 에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내어 놓고 사랑한 최고의 자리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당신이 만든 피조물에 대한 한없는 인내의 사랑을 표출한 그곳이 바로 골고다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122편도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 도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예루살렘을 ‘조밀한 성읍’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질서 정연하게 세워진 예루살렘은 그곳에 있는 성도들과 그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자들 사이에 긴밀하고 친밀한 교제와 사랑이 한 신앙 안에서 녹아 들어간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 간의 교제가 한데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당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세워진 초대교회가 세워진 곳도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현했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함이 마냥 좋았고,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예배와 교제를 해도 지루하지 않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어디일까요? 이스라엘의 옛날 수도인 예루살렘을 문자적으로 지칭하는 말일까요?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우리가 있는 보스톤 필그림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 우리의 신앙 고백 위에 세우신 교회가 바로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공동체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즉 보스톤 필그림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앙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믿음이 녹아 들어간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들어간 곳입니다. 성도들 간에 친밀한 교제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형성되는 곳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이 경험되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본질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가 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없는 곳.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가 상실된 곳이라면 이곳으로 향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무거울 것이며,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예배 시간이 빨리 끝나 얼른 집에 가고 싶고 봉사하는 것들이 힘들고 지쳐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교회 공동체가 튼튼하고 평안해야 성도들의 가정이 평안하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곳에 여러분의 신앙의 열정을 쏟아 부으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 좋았던 갈라디아의 신앙공동체가 점점 무너져 갈 때 그들에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갈 4:19).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과 가르침이 나타나기까지 우리가 마치 아기를 낳듯 수고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교회는 이민 오신 여러분에게, 유학생으로 오신 여러분에게 첫번째 교회는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에게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교회가 있을 줄로 압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저의 모교회는 장흥제일교회입니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온 읍내가 볼 수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지금의 성전을 지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지하실이 개인 기도실과 마루로 된 교육실로 사용되었는데, 비가 올 때마다 그곳에 물이 찬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늘 제습기를 틀어놓고 있었습니다. 교회 곁에 살던 저는 비가 올 때마다 걱정입니다. 비가 올 때마다 바닥에서 물을 퍼내고 닦고 그리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정말 기뻤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마다 교회를 마른 수건으로 강대상에서부터 모든 곳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중고등학생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그렇게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희들 마음 속에 그곳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라는 배우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를 향해 쏟아 부어주셨던 어른 성도님들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저희는 우리의 예루살렘을 위해 한번씩 들려가며 기도하고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누가 교회를 가장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모름지기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그곳에 땀과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그곳에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제일 많이 들인 사람입니다.
이민교회로서 우리를 교회를 빌려 씁니다. 다행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행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외형적인 교회에 우리는 많은 것을 치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분께서 우리의 교육실과 본당과 창고도 좀 챙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원합니다. 더더욱 우리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성전, 우리 보스톤 필그림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겅험하고 역사하도록 믿음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개개인을 보면서 그들 속에 아픔과 고통은 함께 나누고 믿음으로 씨름 할 때에 함께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나가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우리 모두 함께 하는 해산의 수고가 많아지길 기원합니다. 성령을 통해 사랑과 나눔과 섬김이 있는 공동체를 위해 수고한다면 우리는 모일 때마다 만남의 기쁨이, 그리고 흩어질 때마다 다시 만날 기다림의 간절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십시오. 우리 필그림교회 지체 지체 마다 그들의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되 해산의 수고를 하듯 우리 가진 시간과 물질을, 기도와 섬김을 아끼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흔적들이 많아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성경본문: 시편 122:6 (Psalm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Pray for the peace of Jerusalem: “May those who love you be secure.
2000년도에 BTI (Boston Theological Institut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 지역 신학교들 중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하비 콕스 (Prof. Harvey Cox)가 개설한 “예루살렘: Jerusalem”이란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정치, 경제, 건축, 역사, 종교적인 면으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유대교인들, 모슬렘들까지 예루살렘을 그토록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 일생의 순례의 한 종착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Karan Armstrong은 Jerusalem: One City, Three Faiths 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아마도 고대 도시 중에서 예루살렘 만큼이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된 도시는 없을 것입니다. 지중해와 사해 사이에 위치한 산 위의 고도(Old City)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매년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순례를 하면서 무너진 옛 성벽에서 머리를 찌으며 기도하고 절규하며 눈물을 흘린단 말입니까? 예루살렘이 전 세계 사람들이 그만큼 사랑을 쏟을 만한 값어치가 있단 말입니까? 예루살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희가 읽은 시편 122편은 표제어에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을 지은 이가 다윗으로 나와 있지만, 실상은 후대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어느 무명의 순례자의 시편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3차례씩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북쪽 지역과 남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혹 이방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길고도 머나먼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루살렘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느꼈을 안도감과 평안함은 그들의 여독을 극복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 예루살렘에는 우리의 형제들이 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왕이 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이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그들의 영원한 본향이요 안식처였던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민족과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성을 갖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신앙적 사실과 연결됩니다. 먼저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묵묵히 순종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간 모리아 산이 그 시초입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간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나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여, 혹 자신이 번제로 죽여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실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친히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 하셔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 즉 훗날의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가지신 믿음을 표출하신 자리요 반대로 믿는 자의 신앙고백과 행함의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모리아산 그 곳처럼 여러분에게도 그런 곳이 있고, 그 곳에서 여러분의 신앙고백 때문에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는 다윗과 솔로몬의 믿음과 연결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그의 별명인 것처럼 항상 다윗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의 일평생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표현된 사건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일입니다. (삼하 6:12~16)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은 축복의 자리요 평화의 자리임을 깨달은 다윗은 그것을 제사장들과 옮기면서 마음껏 하나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즐거이 다윗 성인 예루살렘으로 옮겨 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춤추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법궤를 옮겨간 예루살렘에서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을 짓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일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의 성전을 준비한 다윗의 신앙이 깃든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을 솔로몬이 이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는 아버지 다윗을 이어 하나님 성전 건축을 완성했습니다. 드디어 완성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천번제를 드리고 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 27~30) 하나님은 장소에 국한되는 분이 아니시지만,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고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시키시며 축복해 달라고 열왕기상 8장 22절부터 53절까지 장엄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자리에서 이 땅 한 자락 한 켠 밖에 되지 않는 곳이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자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기도했던 솔로몬의 신앙의 자리가 바로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장소와 시간에 국한되시는 분은 아니지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이 기도하는 믿음의 자리가 너무나 간절하고 신실해서 온 천지에 주재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자리에 직접 크게 임재하고 축복하는 자리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 번째는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외아들인 예수님은 에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내어 놓고 사랑한 최고의 자리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당신이 만든 피조물에 대한 한없는 인내의 사랑을 표출한 그곳이 바로 골고다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122편도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 도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예루살렘을 ‘조밀한 성읍’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질서 정연하게 세워진 예루살렘은 그곳에 있는 성도들과 그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자들 사이에 긴밀하고 친밀한 교제와 사랑이 한 신앙 안에서 녹아 들어간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 간의 교제가 한데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당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세워진 초대교회가 세워진 곳도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현했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 초대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함이 마냥 좋았고,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예배와 교제를 해도 지루하지 않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어디일까요? 이스라엘의 옛날 수도인 예루살렘을 문자적으로 지칭하는 말일까요?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우리가 있는 보스톤 필그림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 우리의 신앙 고백 위에 세우신 교회가 바로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공동체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즉 보스톤 필그림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앙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믿음이 녹아 들어간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들어간 곳입니다. 성도들 간에 친밀한 교제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형성되는 곳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이 경험되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본질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가 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없는 곳.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가 상실된 곳이라면 이곳으로 향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무거울 것이며,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예배 시간이 빨리 끝나 얼른 집에 가고 싶고 봉사하는 것들이 힘들고 지쳐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교회 공동체가 튼튼하고 평안해야 성도들의 가정이 평안하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곳에 여러분의 신앙의 열정을 쏟아 부으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 좋았던 갈라디아의 신앙공동체가 점점 무너져 갈 때 그들에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갈 4:19).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과 가르침이 나타나기까지 우리가 마치 아기를 낳듯 수고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교회는 이민 오신 여러분에게, 유학생으로 오신 여러분에게 첫번째 교회는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에게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교회가 있을 줄로 압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저의 모교회는 장흥제일교회입니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온 읍내가 볼 수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지금의 성전을 지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지하실이 개인 기도실과 마루로 된 교육실로 사용되었는데, 비가 올 때마다 그곳에 물이 찬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늘 제습기를 틀어놓고 있었습니다. 교회 곁에 살던 저는 비가 올 때마다 걱정입니다. 비가 올 때마다 바닥에서 물을 퍼내고 닦고 그리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정말 기뻤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마다 교회를 마른 수건으로 강대상에서부터 모든 곳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중고등학생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그렇게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희들 마음 속에 그곳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라는 배우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를 향해 쏟아 부어주셨던 어른 성도님들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저희는 우리의 예루살렘을 위해 한번씩 들려가며 기도하고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누가 교회를 가장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모름지기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그곳에 땀과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그곳에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제일 많이 들인 사람입니다.
이민교회로서 우리를 교회를 빌려 씁니다. 다행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행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외형적인 교회에 우리는 많은 것을 치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분께서 우리의 교육실과 본당과 창고도 좀 챙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원합니다. 더더욱 우리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성전, 우리 보스톤 필그림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겅험하고 역사하도록 믿음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개개인을 보면서 그들 속에 아픔과 고통은 함께 나누고 믿음으로 씨름 할 때에 함께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나가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우리 모두 함께 하는 해산의 수고가 많아지길 기원합니다. 성령을 통해 사랑과 나눔과 섬김이 있는 공동체를 위해 수고한다면 우리는 모일 때마다 만남의 기쁨이, 그리고 흩어질 때마다 다시 만날 기다림의 간절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십시오. 우리 필그림교회 지체 지체 마다 그들의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되 해산의 수고를 하듯 우리 가진 시간과 물질을, 기도와 섬김을 아끼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흔적들이 많아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