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As They Began to Sing and Praise)
성경본문: 역대하 20장 20-23절
오래 전에 일입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찾아와서 이런 고민을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우리 딸네를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참 안 풀리네요. 속만 썩이고 어디까지 참고 또 도와 주어야 할지… 다른 자식들은 다 괜찮고 잘 사는데 아직도 괜히 사서 고생하고 있는 딸을 보면 속이 상하네요. 기도 좀 해주세요” 나이가 지긋이 든, 어떻게 보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사신 것 같은 할머니가 저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눈가에 어린 오래된 슬픔의 흔적들이 얼마나 딸네 집 때문에 고민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씨름했는지 보여줍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바꿔 주실 거예요. 할머니께서 염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이기게 해 주실 거예요.”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쉽사리 달라지지 않는 현재의 모습과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믿음의 간구와 현실의 괴리 가운데 아주 오랫동안 남몰래 힘들어하고 괴로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 뜻에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비껴가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면 더더욱 힘이 듭니다. 버겁습니다. 그냥 주저 않고 싶고 때론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다시금 자비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그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왜 쉽사리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더더욱 하나님께 매어 달릴까요? 우리의 고집인가요? 아니면 습관에 매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금 내려놓는다고 뭐 달라질게 있나 하는 관조인가요?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혈통과는 전혀 다른 영의 혈통이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눈 앞의 현실과 환경이 우리를 가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보잘것없고, 힘들고, 연약해 보이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영적인 혈통을 이어 받았기에 믿음의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저 녀석 좀 봐. 지금은 그래도 반드시 해 낼거야. 그 부모가 그랬거든. 그 피가 어디 가겠어.”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온 우주의 계획을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혈통이 어디 가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빌립보서 4장 13절)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또 가까이 있다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역대하 20장 20절부터 23절 말씀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 입니다.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적용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이 주로 우상 숭배와 불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면, 남쪽 왕조들은 그래도 간간히 믿음의 길을 걸었던 왕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사밧도 그런 왕 중에 하나입니다. 35세에 왕이 되어 25년간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좋은 신앙의 본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는 이전에 악한 왕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오직 그 부친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 계명을 행하고”(역대하 17장 4절), 백성의 지도자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온 유다에서 가르치게 했습니다.(역대하 17장 9절) 그 결과 하나님이 유다를 강하게 만드셨고, 이웃 나라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북쪽의 아합 왕과 결혼 동맹을 맺고 길르앗 라못과 전쟁을 하는 통에 하나님께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 묻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그것이 칭찬이든지 혹은 책망이든지 간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온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위해 노력했고, 각 성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실한 재판관을 세웠습니다. 그는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찾았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세워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시대는 왕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신앙 생활이 흠잡을 데 없이 헌신하던 시기였고, 이 정도 되면 태평성대가 이뤄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작은 믿음이 불이 붙어 하나님의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 나가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 간절하고, 은혜로 찬양하는 것이 가슴 벅차고, 내가 하는 기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 같고,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과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이 그런 시기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가득하고 믿음의 확신이 이 때보다 강할 때가 없습니다. 여호사밧의 시대가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상황이 우리의 기대와 달리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져야 하는데 갑자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이 찾아옵니다. 갑작스레 몸이 병들기도 하고, 사업이 삐그덕 대기도 하고,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면서 기도했던 자녀들이 속을 썩이기도 하고, 믿었던 형제 자매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들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을 겪기도 하고... 그 때에 느끼는 당혹감과 실망감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호사밧 왕과 그의 백성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은 외부에서 나타납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큰 연합군을 만들어 엔게디를 통하여 브라가 골짜기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브라가 골짜기의 연합군으로 인해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여호사밧 왕의 기도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겠습니다.”(역대하 20장 12절).” 아마도 연합군들은 이런 우왕좌왕하고 두려워하는 유다의 심리를 이용해서 더더욱 득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시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더욱 빛이 납니다. 마치 빛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과 행동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생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반드시 삶에 곳곳에 적용되는 큰 힘이 됩니다. 여호사밧 왕이 보여준 믿음의 빛은 이렇습니다. 먼저 그는 신앙의 항상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혼자 살려고, 혹은 지금 당장 온 백성의 괴로움을 줄여보기 위해 연합군과 당장 타협하지 않고, 곧바로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역대하 20장 12절) 여호사밧 왕 뿐만 아니라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아내와 아이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지금은 전쟁을 준비해서 싸우든지 아니면 완전히 투항하든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항상 그 문제를 하나님께 먼저 묻습니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드린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가 주인이 되어 어떤 일을 행하다가 실패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항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이면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며,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두려움과 걱정이 그들을 사로잡았지만, 여호사밧 왕과 그의 백성들은 평상시에 바로 이것이 잘 훈련되었기에 금식하고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레위 사람인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응답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역대하 20장 15, 17절).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맡기는 순간,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역사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사밧이 그 응답을 듣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다음날 그는 백성들과 함께 드고아 들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먼저 먼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대를 조직합니다. 찬양대가 군대 앞에 서서 찬송을 하며 나아갑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나님께 묻고 주도권을 내어드린 후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선포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편안하고 모든 일이 잘 될 때에는 신앙고백을 잘 합니다. 그러나 정작 어렵고 힘들 때에는 믿음의 선포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신앙고백은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랬습니다.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면전에서 예수님께 하나님의 자녀로 취급받기 보다 그 보다 못한 개의 족속들이라고 무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가복음 7장 28절) 그녀의 믿음에 대해 예수님은 뜻밖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어렵지만 하나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네 믿음의 고백을 보니 너는 자격이 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마가복음 7장 29절)
그런데 말로 하는 신앙 고백, 홀로 하는 신앙고백은 힘이 듭니다. 여러분, 이때 찬송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전쟁을 시작 하면서 찬송을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기도 중에 제일 힘있게 할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찬송의 기도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찬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역대하 20장 21절) 지금 이스라엘은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 데 감사의 찬양을 먼저 드립니다. 그들에게 임한 것은 전쟁의 두려움인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먼저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울려 퍼지는 온 백성이 찬송이 이보다 더 큰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과 아들 압살롬의 박해를 피해 광야에서, 이방 땅에서 홀로 도망하면서도 하나님께 하프를 켜면서 찬양으로 신앙고백을 했던 다윗을 높이셨던 하나님께서,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개입을 고백했던 바울과 실라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 자비하심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가 힘들거든 찬양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음의 고백이 알알이 새겨져 있는 찬양을 마음껏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찬양에 역사하십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찬양의 제사를 마음껏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제일 감동이 될 때에는 역시 우리가 예상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실 때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희생으로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할 때 더더욱 그 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의 찬양의 고백에 대해서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은 복병을 연합군 사이에 두셔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먼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세일 자손을 치고 그 후에 서로 상대방끼리 쳐서 모든 사람이 멸망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신 복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적들의 패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브라가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전리품을 거둬 들였습니다. 얼마나 많았던지 사흘 동안 거둬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정확하고 놀랍습니다. 구약에는 이상하리만큼 이런 믿음의 고백에 대해서 정확하게 응답하는 하나님의 타이밍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선포와 그 행위를 보고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범람하는 요단강의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을 내딛고 그곳에 잠기자 마자 요단강이 멈춰 서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니엘은 힛데겔 강가에서 마지막 시대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자기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지쳐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다니엘 10장 11절)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를 보내어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선포를 그냥 흘러 보내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탄식과 간구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적합한 때에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결국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에게 근심과 고통의 골짜기였던 브라가 골짜기는 그 말의 뜻대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송축하는 송축의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브라가 골짜기가 신앙고백의 한 흔적처럼 눈 앞에 그렇게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은 결국 우리의 믿음과 연결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 들어오셔서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혹 오랫동안 열심히 믿어왔는데, 아니 이제 믿은지 얼마 안 되지만 삶이 힘이 들고 기대했던 변화가 없어서 낙심이 되십니까? 우리는 믿음의 항상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선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찬양과 감사의 선포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구하는 것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얽힌 문제가 해결 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믿고 우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찬양의 제사로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 동반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사탄의 방해는 있을지언정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선포에 대해서 우리가 노래하고 찬송을 시작할 바로 그 때에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에게 여러분의 근심과 고통의 골짜기가 송축과 기쁨의 골짜기로 바뀌는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본문: 역대하 20장 20-23절
오래 전에 일입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찾아와서 이런 고민을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우리 딸네를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참 안 풀리네요. 속만 썩이고 어디까지 참고 또 도와 주어야 할지… 다른 자식들은 다 괜찮고 잘 사는데 아직도 괜히 사서 고생하고 있는 딸을 보면 속이 상하네요. 기도 좀 해주세요” 나이가 지긋이 든, 어떻게 보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사신 것 같은 할머니가 저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눈가에 어린 오래된 슬픔의 흔적들이 얼마나 딸네 집 때문에 고민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씨름했는지 보여줍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바꿔 주실 거예요. 할머니께서 염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이기게 해 주실 거예요.”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쉽사리 달라지지 않는 현재의 모습과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믿음의 간구와 현실의 괴리 가운데 아주 오랫동안 남몰래 힘들어하고 괴로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 뜻에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비껴가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면 더더욱 힘이 듭니다. 버겁습니다. 그냥 주저 않고 싶고 때론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다시금 자비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저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그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왜 쉽사리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더더욱 하나님께 매어 달릴까요? 우리의 고집인가요? 아니면 습관에 매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금 내려놓는다고 뭐 달라질게 있나 하는 관조인가요?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혈통과는 전혀 다른 영의 혈통이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눈 앞의 현실과 환경이 우리를 가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보잘것없고, 힘들고, 연약해 보이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영적인 혈통을 이어 받았기에 믿음의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저 녀석 좀 봐. 지금은 그래도 반드시 해 낼거야. 그 부모가 그랬거든. 그 피가 어디 가겠어.”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온 우주의 계획을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혈통이 어디 가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빌립보서 4장 13절)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또 가까이 있다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역대하 20장 20절부터 23절 말씀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 입니다.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적용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이 주로 우상 숭배와 불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면, 남쪽 왕조들은 그래도 간간히 믿음의 길을 걸었던 왕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사밧도 그런 왕 중에 하나입니다. 35세에 왕이 되어 25년간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좋은 신앙의 본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는 이전에 악한 왕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오직 그 부친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 계명을 행하고”(역대하 17장 4절), 백성의 지도자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온 유다에서 가르치게 했습니다.(역대하 17장 9절) 그 결과 하나님이 유다를 강하게 만드셨고, 이웃 나라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북쪽의 아합 왕과 결혼 동맹을 맺고 길르앗 라못과 전쟁을 하는 통에 하나님께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 묻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그것이 칭찬이든지 혹은 책망이든지 간에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온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위해 노력했고, 각 성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실한 재판관을 세웠습니다. 그는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찾았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세워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시대는 왕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신앙 생활이 흠잡을 데 없이 헌신하던 시기였고, 이 정도 되면 태평성대가 이뤄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작은 믿음이 불이 붙어 하나님의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 나가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 간절하고, 은혜로 찬양하는 것이 가슴 벅차고, 내가 하는 기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 같고,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과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는 그런 시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지금이 그런 시기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가득하고 믿음의 확신이 이 때보다 강할 때가 없습니다. 여호사밧의 시대가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상황이 우리의 기대와 달리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져야 하는데 갑자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이 찾아옵니다. 갑작스레 몸이 병들기도 하고, 사업이 삐그덕 대기도 하고,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면서 기도했던 자녀들이 속을 썩이기도 하고, 믿었던 형제 자매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들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을 겪기도 하고... 그 때에 느끼는 당혹감과 실망감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호사밧 왕과 그의 백성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은 외부에서 나타납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큰 연합군을 만들어 엔게디를 통하여 브라가 골짜기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브라가 골짜기의 연합군으로 인해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여호사밧 왕의 기도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겠습니다.”(역대하 20장 12절).” 아마도 연합군들은 이런 우왕좌왕하고 두려워하는 유다의 심리를 이용해서 더더욱 득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시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더욱 빛이 납니다. 마치 빛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과 행동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생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반드시 삶에 곳곳에 적용되는 큰 힘이 됩니다. 여호사밧 왕이 보여준 믿음의 빛은 이렇습니다. 먼저 그는 신앙의 항상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혼자 살려고, 혹은 지금 당장 온 백성의 괴로움을 줄여보기 위해 연합군과 당장 타협하지 않고, 곧바로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역대하 20장 12절) 여호사밧 왕 뿐만 아니라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아내와 아이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지금은 전쟁을 준비해서 싸우든지 아니면 완전히 투항하든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항상 그 문제를 하나님께 먼저 묻습니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드린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가 주인이 되어 어떤 일을 행하다가 실패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항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이면에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며,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두려움과 걱정이 그들을 사로잡았지만, 여호사밧 왕과 그의 백성들은 평상시에 바로 이것이 잘 훈련되었기에 금식하고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레위 사람인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응답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역대하 20장 15, 17절).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맡기는 순간,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역사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사밧이 그 응답을 듣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다음날 그는 백성들과 함께 드고아 들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먼저 먼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대를 조직합니다. 찬양대가 군대 앞에 서서 찬송을 하며 나아갑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나님께 묻고 주도권을 내어드린 후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선포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편안하고 모든 일이 잘 될 때에는 신앙고백을 잘 합니다. 그러나 정작 어렵고 힘들 때에는 믿음의 선포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신앙고백은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랬습니다.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면전에서 예수님께 하나님의 자녀로 취급받기 보다 그 보다 못한 개의 족속들이라고 무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가복음 7장 28절) 그녀의 믿음에 대해 예수님은 뜻밖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어렵지만 하나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네 믿음의 고백을 보니 너는 자격이 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마가복음 7장 29절)
그런데 말로 하는 신앙 고백, 홀로 하는 신앙고백은 힘이 듭니다. 여러분, 이때 찬송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전쟁을 시작 하면서 찬송을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기도 중에 제일 힘있게 할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찬송의 기도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찬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역대하 20장 21절) 지금 이스라엘은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 데 감사의 찬양을 먼저 드립니다. 그들에게 임한 것은 전쟁의 두려움인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먼저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울려 퍼지는 온 백성이 찬송이 이보다 더 큰 신앙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과 아들 압살롬의 박해를 피해 광야에서, 이방 땅에서 홀로 도망하면서도 하나님께 하프를 켜면서 찬양으로 신앙고백을 했던 다윗을 높이셨던 하나님께서,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개입을 고백했던 바울과 실라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응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 자비하심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가 힘들거든 찬양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음의 고백이 알알이 새겨져 있는 찬양을 마음껏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찬양에 역사하십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찬양의 제사를 마음껏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제일 감동이 될 때에는 역시 우리가 예상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실 때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받을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희생으로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고 할 때 더더욱 그 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의 찬양의 고백에 대해서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은 복병을 연합군 사이에 두셔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먼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세일 자손을 치고 그 후에 서로 상대방끼리 쳐서 모든 사람이 멸망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신 복병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적들의 패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브라가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전리품을 거둬 들였습니다. 얼마나 많았던지 사흘 동안 거둬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정확하고 놀랍습니다. 구약에는 이상하리만큼 이런 믿음의 고백에 대해서 정확하게 응답하는 하나님의 타이밍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선포와 그 행위를 보고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범람하는 요단강의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을 내딛고 그곳에 잠기자 마자 요단강이 멈춰 서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니엘은 힛데겔 강가에서 마지막 시대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자기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지쳐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다니엘 10장 11절)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를 보내어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선포를 그냥 흘러 보내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탄식과 간구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적합한 때에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결국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에게 근심과 고통의 골짜기였던 브라가 골짜기는 그 말의 뜻대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송축하는 송축의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브라가 골짜기가 신앙고백의 한 흔적처럼 눈 앞에 그렇게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은 결국 우리의 믿음과 연결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 들어오셔서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혹 오랫동안 열심히 믿어왔는데, 아니 이제 믿은지 얼마 안 되지만 삶이 힘이 들고 기대했던 변화가 없어서 낙심이 되십니까? 우리는 믿음의 항상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선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찬양과 감사의 선포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구하는 것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얽힌 문제가 해결 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믿고 우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찬양의 제사로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 동반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사탄의 방해는 있을지언정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선포에 대해서 우리가 노래하고 찬송을 시작할 바로 그 때에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에게 여러분의 근심과 고통의 골짜기가 송축과 기쁨의 골짜기로 바뀌는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