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전환점 Turning Point in Your Life
갈라디아서 2장 20절 (Galatians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금년도 부활절 새벽예배 시간에 색다른 순서가 하나 첨가 되었습니다. 매년 미국교회와 함께 드리는데, 올해는 퍼킨스 목사님(Rev. Robert Perkins)께서 평신도 한 분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에게 부활의 간증을 하게 하셨습니다. 조금은 초췌하고 남루해 보이는 양복을 입고 약간은 추위에 얼어 붙은 그의 얼굴이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산 것 같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린 딸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연신 입김을 불어대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한때 정말로 좋은 직장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직이라는 큰 어려움이 닥쳐왔고, 그로 인해 이혼과 가족들이 흩어지고 이어 오랜 동안의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됩니다. 겨우 홈리스 수준은 면했지만, 자책과 연민 속에서 한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불규칙하게 교회를 나갔지만 평안함도 기쁨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설교가 갑자기 귀에 들어왔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나같이 실패한 사람에게도, 나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이것이 끝이 아니구나! 고난이 끝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있구나! 그래 나도 예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이것이 이 집사님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이 집사님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직장도 새로 구하게 되었고, 다시 합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과의 관계도 새롭게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되고 바뀐다라고 해 왔습니다. 즉 인생에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된다라고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무척 기쁩니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변화된 삶을 살고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해도, 그리고 말씀을 듣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것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역시 많이 보아 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일까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사야 6장 9절)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대학생 시절에 제 마음에 제일 남은 설교는 김중기 교수님의 “생동하는 믿음”이라는 설교였습니다. 본문이 마가복음 10장 17절부터 22절까지 였는데, 그 본문 또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변화되지 않는 부자 청년 관원에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로 한 부자 청년 관원이 나옵니다.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먼저 계명을 지켰느냐고 물어보신 후에 다 지켰고 말씀대로 행했다라는 청년을 보고 한마디 거두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가복음 7장 21절) 예수님의 권면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대로 과연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영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런 깊이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란 성급한 면이 있습니다. 이 청년의 면모와 행동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서 오늘날의 국회의원보다 더 큰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년이었기에 젊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힌트는 바로 22절에 나온 말처럼 “근심하는 것”이 많아서였을 것입니다. 한 가지를 가진 사람은 한 가지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를 걱정하는 사람은 세 가지를 걱정합니다. 진짜 “영생”에 대한 관심보다도 어떻게 하면 ‘영원히’ 지금의 부를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원히’ 권력을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돈 좀 벌어놓고 교회 가겠습니다.” “이번에 잘 되서 시장 뱃지 달고 교회 나가겠습니다.” “나이 들면 교회 나가겠습니다.” 수많은 걱정거리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신앙의 출발점은 내게 가진 모든 것보다 무언가 부족한 그 어떤 값어치 있는 대상이나 의미를 발견하고(깨닫고) 그것에 우리의 전부를 맞바꾸는 행위 (선택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전환점을 맞이하시길 바란다면 제발 걱정 근심거리들을 내려 놓고 믿음을 가지려는 하는 강한 의욕과 예수님에 대한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 나라(혹은 영생)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의 부자 청년도 영원한 생명을 간구했지만,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청년 관원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3,5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는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니고데모가 과연 거듭났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만 나중에 예수님에 대한 심판과 죽음 이후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 지내는 부분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가져 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 세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 세례는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못난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경험을 하는 것이 바로 물 세례를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변화가 없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는 회개는 하는데 자신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민 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고생 고생하면서도 믿음으로 큰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삶의 태도와 정신은 이민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 믿고 제 자신을 참 많이 참고 견디고 죽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저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던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았네요!” 예수님은 믿되 자아는 죽지 않는 그래서 남을 보며 의식하며 사는 씁쓸함이 많은 이민자들을 봅니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철저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물세례와 관련해서 교훈을 주는 성경의 사례가 구약에 나타납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아람(오늘날의 시리아)이라는 나라의 큰 장군으로서 여러 전쟁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며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던 이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불치의 병이자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인생의 큰 위기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을 침입해서 사로잡아 온 아이 중에 자기 아내를 보필하고 있는 여자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해 듣게 됩니다. 여러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몸을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씻으면 낫는다는 말만 듣고 오게 됩니다. 자존심과 교만으로 꽉찬 그의 자아가 죽지 못했을 때 이렇게 외칩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열왕기하 5장 11-12절) 노기를 띤 장군의 성급한 행동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참으로 지혜롭고 좋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니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자신을 몸을 일곱 번 씻었을 때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가 죽는데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저 예수님을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어렵다면 도대체 이보다 쉬운 일이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저 말씀에 순종해서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만 씻었을 뿐인데 나아만 장군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만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로마서 6장 4,5절)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시고 안 계시는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것을 금새 눈치챌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성령충만 하면 크게 박수치고 방언하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을 상상하는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우리의 열심 있는 기도와 봉사로 인해 일상에서 많은 신유가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사업을 주장하셔서 번창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전반에 역사하시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마음,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삶,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바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론다 번(Rhonda Byrne)은 “시크릿(The Secret)”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상황이나 환경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생각의 결과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현 상태을 바라보면서 ‘이게 나야’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현재 돈이 얼마 없거나 원하는 배우자가 곁에 없거나 원하는 만큼 건강하지 않다고 해보자. 그건 당신이 아니라. 과거의 생각화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다.” 고도원씨는 “아침편지”에서 이 말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생각과 행동이 미래의 결과를 만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는 마라톤의 반환점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순간이 바로 터닝 포인트입니다. 생각과 행동을 바꾸면 그로부터 삶이 바뀌고 미래가 바뀝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행위가 바로 믿음을 가지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행동이 바뀝니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물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자아가 예수와 함께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신 사신 것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무언가에 된통 걸려 넘어진 것처럼 인생의 위기나 멈춤의 시기에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시고 걱정 근심거리를 좀 내려놓고 믿음이라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거듭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는 더 나은 삶과 온전히 선물로 주어진 영생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Galatians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금년도 부활절 새벽예배 시간에 색다른 순서가 하나 첨가 되었습니다. 매년 미국교회와 함께 드리는데, 올해는 퍼킨스 목사님(Rev. Robert Perkins)께서 평신도 한 분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에게 부활의 간증을 하게 하셨습니다. 조금은 초췌하고 남루해 보이는 양복을 입고 약간은 추위에 얼어 붙은 그의 얼굴이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산 것 같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린 딸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연신 입김을 불어대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한때 정말로 좋은 직장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직이라는 큰 어려움이 닥쳐왔고, 그로 인해 이혼과 가족들이 흩어지고 이어 오랜 동안의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됩니다. 겨우 홈리스 수준은 면했지만, 자책과 연민 속에서 한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불규칙하게 교회를 나갔지만 평안함도 기쁨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설교가 갑자기 귀에 들어왔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나같이 실패한 사람에게도, 나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이것이 끝이 아니구나! 고난이 끝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있구나! 그래 나도 예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이것이 이 집사님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이 집사님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직장도 새로 구하게 되었고, 다시 합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과의 관계도 새롭게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되고 바뀐다라고 해 왔습니다. 즉 인생에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된다라고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무척 기쁩니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변화된 삶을 살고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해도, 그리고 말씀을 듣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것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역시 많이 보아 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일까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사야 6장 9절)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대학생 시절에 제 마음에 제일 남은 설교는 김중기 교수님의 “생동하는 믿음”이라는 설교였습니다. 본문이 마가복음 10장 17절부터 22절까지 였는데, 그 본문 또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변화되지 않는 부자 청년 관원에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로 한 부자 청년 관원이 나옵니다.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먼저 계명을 지켰느냐고 물어보신 후에 다 지켰고 말씀대로 행했다라는 청년을 보고 한마디 거두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가복음 7장 21절) 예수님의 권면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대로 과연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영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런 깊이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란 성급한 면이 있습니다. 이 청년의 면모와 행동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서 오늘날의 국회의원보다 더 큰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년이었기에 젊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힌트는 바로 22절에 나온 말처럼 “근심하는 것”이 많아서였을 것입니다. 한 가지를 가진 사람은 한 가지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를 걱정하는 사람은 세 가지를 걱정합니다. 진짜 “영생”에 대한 관심보다도 어떻게 하면 ‘영원히’ 지금의 부를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원히’ 권력을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돈 좀 벌어놓고 교회 가겠습니다.” “이번에 잘 되서 시장 뱃지 달고 교회 나가겠습니다.” “나이 들면 교회 나가겠습니다.” 수많은 걱정거리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신앙의 출발점은 내게 가진 모든 것보다 무언가 부족한 그 어떤 값어치 있는 대상이나 의미를 발견하고(깨닫고) 그것에 우리의 전부를 맞바꾸는 행위 (선택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전환점을 맞이하시길 바란다면 제발 걱정 근심거리들을 내려 놓고 믿음을 가지려는 하는 강한 의욕과 예수님에 대한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 나라(혹은 영생)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의 부자 청년도 영원한 생명을 간구했지만,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청년 관원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3,5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는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니고데모가 과연 거듭났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만 나중에 예수님에 대한 심판과 죽음 이후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 지내는 부분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가져 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 세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 세례는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못난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경험을 하는 것이 바로 물 세례를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변화가 없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는 회개는 하는데 자신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민 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고생 고생하면서도 믿음으로 큰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삶의 태도와 정신은 이민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 믿고 제 자신을 참 많이 참고 견디고 죽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저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던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았네요!” 예수님은 믿되 자아는 죽지 않는 그래서 남을 보며 의식하며 사는 씁쓸함이 많은 이민자들을 봅니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철저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물세례와 관련해서 교훈을 주는 성경의 사례가 구약에 나타납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아람(오늘날의 시리아)이라는 나라의 큰 장군으로서 여러 전쟁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며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던 이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불치의 병이자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인생의 큰 위기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을 침입해서 사로잡아 온 아이 중에 자기 아내를 보필하고 있는 여자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해 듣게 됩니다. 여러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몸을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씻으면 낫는다는 말만 듣고 오게 됩니다. 자존심과 교만으로 꽉찬 그의 자아가 죽지 못했을 때 이렇게 외칩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열왕기하 5장 11-12절) 노기를 띤 장군의 성급한 행동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참으로 지혜롭고 좋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니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자신을 몸을 일곱 번 씻었을 때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가 죽는데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저 예수님을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어렵다면 도대체 이보다 쉬운 일이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저 말씀에 순종해서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만 씻었을 뿐인데 나아만 장군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만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로마서 6장 4,5절)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시고 안 계시는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것을 금새 눈치챌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성령충만 하면 크게 박수치고 방언하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을 상상하는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우리의 열심 있는 기도와 봉사로 인해 일상에서 많은 신유가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사업을 주장하셔서 번창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전반에 역사하시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마음,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삶,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바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론다 번(Rhonda Byrne)은 “시크릿(The Secret)”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상황이나 환경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생각의 결과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현 상태을 바라보면서 ‘이게 나야’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현재 돈이 얼마 없거나 원하는 배우자가 곁에 없거나 원하는 만큼 건강하지 않다고 해보자. 그건 당신이 아니라. 과거의 생각화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다.” 고도원씨는 “아침편지”에서 이 말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생각과 행동이 미래의 결과를 만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는 마라톤의 반환점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순간이 바로 터닝 포인트입니다. 생각과 행동을 바꾸면 그로부터 삶이 바뀌고 미래가 바뀝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행위가 바로 믿음을 가지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행동이 바뀝니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물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자아가 예수와 함께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신 사신 것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무언가에 된통 걸려 넘어진 것처럼 인생의 위기나 멈춤의 시기에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시고 걱정 근심거리를 좀 내려놓고 믿음이라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거듭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는 더 나은 삶과 온전히 선물로 주어진 영생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