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7:
은사를 사모합니다 Desiring Spiritual Gifts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2장 31절 (1 Corinthians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지만 1970년대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어찌해서 아주 좋은 자매님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매님을 따라 종로와 남산 길 등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즐거운 데이트도 하시고 마냥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쁘기도 하지만 조용하면서 지적인 모습이 참 끌렸습니다. 사귀는 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나름 본인은 신앙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라 이 자매님이 다니고 있는 교회를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자매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교회를 갔습니다. 마침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자리에 함께 앉은 자매님이 옆에 따라 온 형제님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가 자매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이 자매님 뿐만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본인은 기도가 의례 이렇게 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입술이 꼬인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처럼 상반신을 앞 뒤로 흔들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고 이 분은 겁을 덜컥 집어먹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분은 그 자매님이 이상하다 여겨 교제를 그만 두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이 다니던 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였고, 그 기도가 방언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 교회를 방문했는데 어떤교회는 (대부분 장로교회나 침례교회) 조용하고, 또 어떤 교회(대부분 순복음, 오순절교회, 성결교회, 감리교회)는 통성으로 방언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방언이 신앙의 체험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주신 기도의 수단임을 가르켜 줍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그리고 방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은사들 중의 한가지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즉 이 말은 방언이 은사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은사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에게 은사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한 부분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Now about spiritual gifts, brothers,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고린도전서 12장 1절) 우선 은사라는 말이 여기서는 신령한 것들, 즉 spiritual gifts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받는데 하나는 은혜(Charis)요 하나는 은사(Charisma)입니다. 은혜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선물을 가리킨다면, 은사는 남을 위해 쓰여지기를 원해서 개개인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 두 가지가 매일의 삶 속에서 풍성해야 합니다. 먼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이지만 여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장 16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삶, 이것이 구원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는 말 속에는 사랑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는 세상 이웃들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을 날마다 묵상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믿음을 사용하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고 감동하시기에 흔히들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는 구원의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은 많을지 몰라도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한 은사의 필요성을 모르는 그런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신령한 것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히려 은사들을 통해서 신앙이 체험이 분명해지고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와 신령한 은사들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은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성령의 은사들을 보여주는 곳이 여러 군데 있지만 대표적으로 세 곳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은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은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로마서 12장 6~8절에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리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성령의 은사가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 말씀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에는 9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오는데, 우리 성도님들이 가장 흔하게 알고 계시는 은사들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 외에도 우리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더 많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은사도 은사의 하나입니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마저도 은혜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은사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어떤 은사를 받으신 분이 있고, 또 어떤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한가지 은사를 받으신 분이 있으실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여러 은사를 한꺼번에 받으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우리 성도님들이 간절히 사모하고 꼭 이런 것들 중에 한 가지 이상은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성령의 은사들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가 은사가 없어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처럼 고린도교회에도 성령의 은사가 정말 풍성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린도전서 1장 7절) 고린도교회에는 고린도전서 12장 28~30절에 나오는 것처럼 각각의 은사를 따라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가진 자, 방언 하는 사람들, 통역하는 사람들,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가 많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너무 많았기에 교회의 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4장 1절에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방언하는 사람들의 기도로 인해 교회가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 마치 ‘방언하지 못하면 구원 못 받았다’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지 교회공동체를 위해서는 우선되는 은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린도전서 14장 4절) 그래서 교회에서 통역할 사람을 세우지 않고서는 차라리 방언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은사의 중요도에 있어서 차별됨은 없지만 그래도 교회를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더욱 나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각종 은사들(특별히 9가지 은사) 위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나서 곧이어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 “사랑”이라는 은사를 통해 보여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로서의 사랑도 있지만, 우리가 사모할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되어져야만 하는 은사인 것입니다. 어떤 은사는 다른 사람이 식별할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은사는 내재적으로 은밀한 것도 있지만, 이 모든 은사의 밑받침이 되고 궁극적으로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은사만이 가장 큰 유익을 끼치며, 공동체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지키며 교회를 든든히 서게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고 우선적으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은사마다 받고 싶고 또 생각하기에 보다 큰 은사가 있겠지만 꼭 이 사랑의 은사만큼은 정말로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 성령을 통해 여러분께서 반드시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보다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데 과연 은사를 저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개개인에게 유익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든든히 서게 하고 우리의 내면의 신앙과 외면의 신앙을 튼튼히 만들어 줍니다. 받은 은사들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체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은사들로 인해 우리가 ‘안위’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들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은사를 주신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2장 7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린도전서 14장 12절) 풍성한 은사가 오히려 교회에 해를 끼치고 분열의 단초가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면 은사를 잘못 받고 사용한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너희(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립보서 2장 13절)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서 여러분이 은사를 받았다면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명심하고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는 질서와 조화의 원칙입니다. 교회에서 방언을 할 때에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듯이, 예언을 여러 사람이 할 때에는 먼저 한 두 사람이 하고, 그것도 다른 사람이 할 때에는 좀 기다리고 잠잠히 있고 그 예언을 분변하고 계속 해서 하라고 한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을 내세우게 하십니다. 더 약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상대방의 믿음을 배려하며 사랑으로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은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두번째 원칙은 우리가 은사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은사를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옥합에 담긴 귀한 향유는 그 옥합이 깨뜨려지기 전까지는 예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은사는 사용되면 사용될수록 빛이 납니다. 또 다른 은사들이 덧붙여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큰 능력과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프릿트 크라이슬러(Friedrich “Fritz¨¨ Kreisler:1875-1962)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작곡가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의 기쁨(Liebesfreude)” 등 수많은 명곡 연주자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원래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당연히 의사가 되어 병원을 물려받는 것이 자신의 은사요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라면서 자신에게 음악의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곡도 하고 바이올린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의사가 되는 것과 바이올리니스트 둘 중에 어떤 것이 다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한 번은 동네 골동품 가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낡았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꽤 좋아 보이는 바이올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곧장 들어가서 자신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주인은 이미 다른 수집가에게 팔렸다고 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그 수집가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노라고 합니다. 크라이슬러는 그 먼지 묻은 바이올린을 한 번만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마음을 담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놓고 감사했고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수집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당신 거요. 이것은 박물관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니란 걸 당신의 연주를 듣고 깨달았고. 어서 가지고 가서 방금 그 연주를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해 주시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교통하기를 소원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에게 한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모두 여러분이 받은 그 은사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제한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타난 대로 방언의 은사도 받으시고, 예언의 은사도 받으시고, 신유의 은사도 받으시고, 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지식과 지혜의 은사나 섬김의 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 가장 큰 은사인 주님을 닮는 사랑의 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거든, 혹은 이미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꼭 아낌없이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평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교회로도 하나님의 덕이 세워지고 건강하게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사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실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는 저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은사를 사모합니다 Desiring Spiritual Gifts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2장 31절 (1 Corinthians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지만 1970년대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어찌해서 아주 좋은 자매님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매님을 따라 종로와 남산 길 등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즐거운 데이트도 하시고 마냥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쁘기도 하지만 조용하면서 지적인 모습이 참 끌렸습니다. 사귀는 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나름 본인은 신앙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라 이 자매님이 다니고 있는 교회를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자매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교회를 갔습니다. 마침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자리에 함께 앉은 자매님이 옆에 따라 온 형제님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가 자매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이 자매님 뿐만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본인은 기도가 의례 이렇게 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입술이 꼬인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처럼 상반신을 앞 뒤로 흔들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고 이 분은 겁을 덜컥 집어먹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분은 그 자매님이 이상하다 여겨 교제를 그만 두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이 다니던 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였고, 그 기도가 방언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 교회를 방문했는데 어떤교회는 (대부분 장로교회나 침례교회) 조용하고, 또 어떤 교회(대부분 순복음, 오순절교회, 성결교회, 감리교회)는 통성으로 방언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방언이 신앙의 체험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주신 기도의 수단임을 가르켜 줍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그리고 방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은사들 중의 한가지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즉 이 말은 방언이 은사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은사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에게 은사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한 부분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Now about spiritual gifts, brothers,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고린도전서 12장 1절) 우선 은사라는 말이 여기서는 신령한 것들, 즉 spiritual gifts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받는데 하나는 은혜(Charis)요 하나는 은사(Charisma)입니다. 은혜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선물을 가리킨다면, 은사는 남을 위해 쓰여지기를 원해서 개개인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 두 가지가 매일의 삶 속에서 풍성해야 합니다. 먼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이지만 여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장 16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삶, 이것이 구원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는 말 속에는 사랑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는 세상 이웃들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을 날마다 묵상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믿음을 사용하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고 감동하시기에 흔히들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는 구원의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은 많을지 몰라도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한 은사의 필요성을 모르는 그런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신령한 것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히려 은사들을 통해서 신앙이 체험이 분명해지고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와 신령한 은사들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은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성령의 은사들을 보여주는 곳이 여러 군데 있지만 대표적으로 세 곳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은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은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로마서 12장 6~8절에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리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성령의 은사가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 말씀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에는 9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오는데, 우리 성도님들이 가장 흔하게 알고 계시는 은사들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 외에도 우리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더 많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은사도 은사의 하나입니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마저도 은혜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은사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어떤 은사를 받으신 분이 있고, 또 어떤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한가지 은사를 받으신 분이 있으실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여러 은사를 한꺼번에 받으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우리 성도님들이 간절히 사모하고 꼭 이런 것들 중에 한 가지 이상은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성령의 은사들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가 은사가 없어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처럼 고린도교회에도 성령의 은사가 정말 풍성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린도전서 1장 7절) 고린도교회에는 고린도전서 12장 28~30절에 나오는 것처럼 각각의 은사를 따라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가진 자, 방언 하는 사람들, 통역하는 사람들,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가 많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너무 많았기에 교회의 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4장 1절에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방언하는 사람들의 기도로 인해 교회가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 마치 ‘방언하지 못하면 구원 못 받았다’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지 교회공동체를 위해서는 우선되는 은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린도전서 14장 4절) 그래서 교회에서 통역할 사람을 세우지 않고서는 차라리 방언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은사의 중요도에 있어서 차별됨은 없지만 그래도 교회를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더욱 나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각종 은사들(특별히 9가지 은사) 위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나서 곧이어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 “사랑”이라는 은사를 통해 보여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로서의 사랑도 있지만, 우리가 사모할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되어져야만 하는 은사인 것입니다. 어떤 은사는 다른 사람이 식별할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은사는 내재적으로 은밀한 것도 있지만, 이 모든 은사의 밑받침이 되고 궁극적으로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은사만이 가장 큰 유익을 끼치며, 공동체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지키며 교회를 든든히 서게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고 우선적으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은사마다 받고 싶고 또 생각하기에 보다 큰 은사가 있겠지만 꼭 이 사랑의 은사만큼은 정말로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 성령을 통해 여러분께서 반드시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보다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데 과연 은사를 저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개개인에게 유익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든든히 서게 하고 우리의 내면의 신앙과 외면의 신앙을 튼튼히 만들어 줍니다. 받은 은사들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체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은사들로 인해 우리가 ‘안위’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들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은사를 주신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2장 7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린도전서 14장 12절) 풍성한 은사가 오히려 교회에 해를 끼치고 분열의 단초가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면 은사를 잘못 받고 사용한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너희(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립보서 2장 13절)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서 여러분이 은사를 받았다면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명심하고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는 질서와 조화의 원칙입니다. 교회에서 방언을 할 때에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듯이, 예언을 여러 사람이 할 때에는 먼저 한 두 사람이 하고, 그것도 다른 사람이 할 때에는 좀 기다리고 잠잠히 있고 그 예언을 분변하고 계속 해서 하라고 한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을 내세우게 하십니다. 더 약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상대방의 믿음을 배려하며 사랑으로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은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두번째 원칙은 우리가 은사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은사를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옥합에 담긴 귀한 향유는 그 옥합이 깨뜨려지기 전까지는 예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은사는 사용되면 사용될수록 빛이 납니다. 또 다른 은사들이 덧붙여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큰 능력과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프릿트 크라이슬러(Friedrich “Fritz¨¨ Kreisler:1875-1962)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작곡가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의 기쁨(Liebesfreude)” 등 수많은 명곡 연주자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원래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당연히 의사가 되어 병원을 물려받는 것이 자신의 은사요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라면서 자신에게 음악의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곡도 하고 바이올린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의사가 되는 것과 바이올리니스트 둘 중에 어떤 것이 다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한 번은 동네 골동품 가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낡았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꽤 좋아 보이는 바이올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곧장 들어가서 자신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주인은 이미 다른 수집가에게 팔렸다고 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그 수집가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노라고 합니다. 크라이슬러는 그 먼지 묻은 바이올린을 한 번만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마음을 담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놓고 감사했고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수집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당신 거요. 이것은 박물관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니란 걸 당신의 연주를 듣고 깨달았고. 어서 가지고 가서 방금 그 연주를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해 주시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교통하기를 소원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에게 한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모두 여러분이 받은 그 은사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제한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타난 대로 방언의 은사도 받으시고, 예언의 은사도 받으시고, 신유의 은사도 받으시고, 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지식과 지혜의 은사나 섬김의 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 가장 큰 은사인 주님을 닮는 사랑의 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거든, 혹은 이미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꼭 아낌없이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평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교회로도 하나님의 덕이 세워지고 건강하게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사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실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는 저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