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1:
잘못된 세상속에서 올바른 삶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장 1-9절
다양한 인종구성의 인구 65만명, 정치적으로는 Color Blue, 하바드, MIT, 그리고 최고의 의료 시설을 갖춘 도시, 미국 독립전쟁의 발상지이자 미국 정신의 프론티어, Big 스포츠와 문화의 중심도시, 동성애 합법 도시, 거대한 자본으로 치장한 빌딩들과 그 사이에 사는 홈리스들, 그리고 찰스 강을 여유롭게 달리는 시민들과 그와 동시에 다운타운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총성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보스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필그림 정신과 거리마다 마을마다 세워진 수많은 교회들로 시작되었건만, 더 이상 그 교회들을 찾지도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경건하고 열정적인 이민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바로 보스톤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기에 더더욱 탈종교화하며 세속 문화를 강조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다 보니 이곳 보스톤의 필그림 정신이 점점 쇠퇴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믿음의 삶 가운데 여러 도전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동성애 문제,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롯된 차별과 분배 및 복지 문제, 실질적인 남녀의 평등과 인권 문제, 세상 지식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제기된 신앙과 윤리에 대한 도전들, 그리고 여러 성적 문제들로 제기된 가정의 불행 등등은 우리 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고민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과 도전들은 보스톤에 사는 우리들 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미 우리에게 그런 선례들을 보여주고 있고, 실질적인 도전들에 대해서 각 교회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 신앙적 원리들과 실제적인 방법들을 제시해 주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우리가 다루게 될 고린도전서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고린도의 간략한 배경과 고린도교회와 그 교회를 향하여 서신을 보낸 바울과의 관계를 조명함으로서 ‘세상 속의 교회(the church in the world)’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와 고린도교회를 소개하겠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단에 위치한 전형적인 항구 도시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인구는 자유인 20만영, 노예가 약 50만명으로 구성된 전체 인구가 70만명 정도 되는 거대 도시였습니다. 인구수로 비교하자면 보스톤과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당시에 지중해 연안의 중심 교역도시였기 때문에 굉장히 분주하고, 활발한 상업과 무역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부를 누리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의 삶의 스타일은 분주함과는 대비되게 느슨하고 풀어진 삶으로 대변되었습니다. 번영과 아름다움, 예술과 감각적인 우상들로 혼합된 탐욕주의가 그들의 중요 삶의 규범이었습니다. 오직하면 당시에 유명한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자유 분방하고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들을 고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라스베가스에서 흥청망청 돈을 쓰고 제 마음대로 정욕을 따라 성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 정도 될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 즉 돈, 노예, 우상숭배, 그리고 허랑방탕한 부도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교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지 들어갈 것 같지 않는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친다(마태복음 5장 45절)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드로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아테네(아덴)를 지나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복음전도자와 장막치는 일을 병행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어 여러 가정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기 전 아테네에서 철학적 사변을 통한 전도를 통해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사도행전 17장 16-34절)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건만 겨우 소수의 믿은 사람들을 얻었을 뿐입니다.. 이에 교훈을 얻은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해서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회당장 그리스보와 디도 유스도를 포함하여 많은 회심자를 얻었고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했습니다.(사도행전 18장 1-11절) 그런 그의 전도의 결과로 고린도 지역에 가정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규모가 있는 교회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개척자요 창립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전도여행을 다니는 사도 바울에게는 고린도교회의 근황이 그의 관심사요 기도제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총 3번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냅니다. 비록 첫번째 편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두번째와 세번째 편지가 고린도전후서로 우리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대해 1장 4절에서 7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단면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의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가진 장점으로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풍성함을 들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성경공부와 교리공부가 아주 건실하고 든든하게 자리잡은 교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잘 알고 배운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또 다른 감사의 내용은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의 은사들이 풍성하게 나타났다라는 사실입니다. 방언과 예언, 치유 은사등 다양한 하나님의 은사가 사모하는 자들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로 인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한 것처럼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식을 듣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글로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개척자로서 늘 마음에 두고 기도해온 사도 바울에게 여러 가지 안 좋은 소식들이 들립니다. 먼저는 교회 내적으로 분열과 다툼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성도들간의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들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같은 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교회 내에 많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지만 그 은사들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영적인 교만과 그의 부작용들이 나타났습니다. 여자들의 리더쉽 문제가 대두되었고 예배에 대한 여러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교회 외적으로는 끊임없는 우상숭배의 위협과 더불어 실생활 속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한 태도로 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시험에 드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당시 느슨한 고린도지역의 특성 때문에 부활과 재림에 대한 교리가 약화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문제가 사회적 시류에 영향을 받아 난잡하고 혼란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해졌습니다. 이런 교회 내의 문제들은 사도 바울과도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말씀과 교리로 잘 훈련된 고린도교인들이 실생활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믿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당시 3차 전도 여행으로 에베소를 방문 중이던 바울이 AD 55년 경에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심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16장까지 방대한 서신을 쓰면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이슈들을 한가지 한가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못된 세상속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지역교회가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교회가 되는지 논쟁하고 권면하면서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도 현재 보스톤에 살고 있는 우리와 우리 교회에 앞으로 두서너 달 동안 함께 살펴보고 적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여기에 나타난 문제들이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맺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절) 1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말과 9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꼭 심어주고 싶은 절대 신앙관을 표현합니다. 비록 악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믿음 위에 굳건히 설수 있는 방법은 바로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은 너무도 바쁘고, 복잡하고 시끄러워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면 분명 우리의 행동과 언어는 큰 힘과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많은 모습 속에 삶과 신앙의 괴리가 존재함을 보게 됩니다.때론 교회에서 예배와 봉사로 믿음의 열심을 보지만 어느새 우리들의 실생활 모습은 이곳 자유롭고 풍요로운 보스톤에 살면서 세상과 많이 타협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보스톤의 세속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적당히 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을 떠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끊임없는 믿음의 씨름 가운데서 믿음을 따라 산다면 우리는 구별되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장 20절) 말씀을 통해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할 수 있는 신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신 있게 하나님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낼 줄 아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과 행함을 본받고 진지하게 따르기를 권면 드립니다. 진리 가운데 행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묵상하시면서 우리 모두 행동하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삶에서 우리의 믿음이 실제적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영적으로 훈련하는 그런 교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잘못된 세상속에서 올바른 삶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장 1-9절
다양한 인종구성의 인구 65만명, 정치적으로는 Color Blue, 하바드, MIT, 그리고 최고의 의료 시설을 갖춘 도시, 미국 독립전쟁의 발상지이자 미국 정신의 프론티어, Big 스포츠와 문화의 중심도시, 동성애 합법 도시, 거대한 자본으로 치장한 빌딩들과 그 사이에 사는 홈리스들, 그리고 찰스 강을 여유롭게 달리는 시민들과 그와 동시에 다운타운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총성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보스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필그림 정신과 거리마다 마을마다 세워진 수많은 교회들로 시작되었건만, 더 이상 그 교회들을 찾지도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경건하고 열정적인 이민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바로 보스톤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기에 더더욱 탈종교화하며 세속 문화를 강조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다 보니 이곳 보스톤의 필그림 정신이 점점 쇠퇴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믿음의 삶 가운데 여러 도전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동성애 문제,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롯된 차별과 분배 및 복지 문제, 실질적인 남녀의 평등과 인권 문제, 세상 지식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제기된 신앙과 윤리에 대한 도전들, 그리고 여러 성적 문제들로 제기된 가정의 불행 등등은 우리 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고민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과 도전들은 보스톤에 사는 우리들 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미 우리에게 그런 선례들을 보여주고 있고, 실질적인 도전들에 대해서 각 교회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 신앙적 원리들과 실제적인 방법들을 제시해 주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우리가 다루게 될 고린도전서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고린도의 간략한 배경과 고린도교회와 그 교회를 향하여 서신을 보낸 바울과의 관계를 조명함으로서 ‘세상 속의 교회(the church in the world)’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와 고린도교회를 소개하겠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단에 위치한 전형적인 항구 도시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인구는 자유인 20만영, 노예가 약 50만명으로 구성된 전체 인구가 70만명 정도 되는 거대 도시였습니다. 인구수로 비교하자면 보스톤과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당시에 지중해 연안의 중심 교역도시였기 때문에 굉장히 분주하고, 활발한 상업과 무역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부를 누리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의 삶의 스타일은 분주함과는 대비되게 느슨하고 풀어진 삶으로 대변되었습니다. 번영과 아름다움, 예술과 감각적인 우상들로 혼합된 탐욕주의가 그들의 중요 삶의 규범이었습니다. 오직하면 당시에 유명한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자유 분방하고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들을 고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라스베가스에서 흥청망청 돈을 쓰고 제 마음대로 정욕을 따라 성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 정도 될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 즉 돈, 노예, 우상숭배, 그리고 허랑방탕한 부도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교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지 들어갈 것 같지 않는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친다(마태복음 5장 45절)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드로아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아테네(아덴)를 지나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복음전도자와 장막치는 일을 병행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어 여러 가정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기 전 아테네에서 철학적 사변을 통한 전도를 통해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사도행전 17장 16-34절)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건만 겨우 소수의 믿은 사람들을 얻었을 뿐입니다.. 이에 교훈을 얻은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해서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회당장 그리스보와 디도 유스도를 포함하여 많은 회심자를 얻었고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했습니다.(사도행전 18장 1-11절) 그런 그의 전도의 결과로 고린도 지역에 가정교회로부터 시작해서 규모가 있는 교회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개척자요 창립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전도여행을 다니는 사도 바울에게는 고린도교회의 근황이 그의 관심사요 기도제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총 3번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냅니다. 비록 첫번째 편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두번째와 세번째 편지가 고린도전후서로 우리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대해 1장 4절에서 7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단면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의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가진 장점으로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풍성함을 들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성경공부와 교리공부가 아주 건실하고 든든하게 자리잡은 교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잘 알고 배운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또 다른 감사의 내용은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의 은사들이 풍성하게 나타났다라는 사실입니다. 방언과 예언, 치유 은사등 다양한 하나님의 은사가 사모하는 자들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로 인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한 것처럼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식을 듣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글로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개척자로서 늘 마음에 두고 기도해온 사도 바울에게 여러 가지 안 좋은 소식들이 들립니다. 먼저는 교회 내적으로 분열과 다툼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성도들간의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들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같은 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교회 내에 많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지만 그 은사들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영적인 교만과 그의 부작용들이 나타났습니다. 여자들의 리더쉽 문제가 대두되었고 예배에 대한 여러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교회 외적으로는 끊임없는 우상숭배의 위협과 더불어 실생활 속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한 태도로 인하여 많은 교인들이 시험에 드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당시 느슨한 고린도지역의 특성 때문에 부활과 재림에 대한 교리가 약화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문제가 사회적 시류에 영향을 받아 난잡하고 혼란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해졌습니다. 이런 교회 내의 문제들은 사도 바울과도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말씀과 교리로 잘 훈련된 고린도교인들이 실생활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믿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당시 3차 전도 여행으로 에베소를 방문 중이던 바울이 AD 55년 경에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심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16장까지 방대한 서신을 쓰면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이슈들을 한가지 한가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못된 세상속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지역교회가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교회가 되는지 논쟁하고 권면하면서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도 현재 보스톤에 살고 있는 우리와 우리 교회에 앞으로 두서너 달 동안 함께 살펴보고 적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여기에 나타난 문제들이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맺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절) 1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말과 9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꼭 심어주고 싶은 절대 신앙관을 표현합니다. 비록 악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살지만,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믿음 위에 굳건히 설수 있는 방법은 바로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은 너무도 바쁘고, 복잡하고 시끄러워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면 분명 우리의 행동과 언어는 큰 힘과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많은 모습 속에 삶과 신앙의 괴리가 존재함을 보게 됩니다.때론 교회에서 예배와 봉사로 믿음의 열심을 보지만 어느새 우리들의 실생활 모습은 이곳 자유롭고 풍요로운 보스톤에 살면서 세상과 많이 타협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보스톤의 세속 가치가 하나님의 가치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적당히 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을 떠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끊임없는 믿음의 씨름 가운데서 믿음을 따라 산다면 우리는 구별되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장 20절) 말씀을 통해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할 수 있는 신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신 있게 하나님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낼 줄 아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과 행함을 본받고 진지하게 따르기를 권면 드립니다. 진리 가운데 행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묵상하시면서 우리 모두 행동하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삶에서 우리의 믿음이 실제적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영적으로 훈련하는 그런 교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