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에서 실패로: From Success to Failure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These things happened to them as examples ad were written down as warnings for us, on whom the fulfillment of the ages has come. 내, if you think you are standing firm, be careful that you don’t fall! (1 Corinthians 10:11-12)
한번은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게 되었습니다. 별로 시선을 끌 것 같지 않는 중년의 아줌마가 청중의 환호성 속에 자신의 쇼를 당당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 꽤 많은 숫자로 기억합니다. 그 쇼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특별한 봉투를 받은 사람들을 향해 갑자기 오프라가 그 비밀의 봉투를 열면서 그 봉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고급 차를 한대씩 선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마다 예기치 못한 듯 뜻밖의 선물에 눈물과 박수로 화답합니다. 물론 나중에 그것을 받은 사람마다 제각각 그것을 받을 만한 사연이 있었다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일개 한 사람이 스스럼없이 선물할 줄이야, 한 마디로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프라 윈프리라고 말입니다. 미시시피에서 태어난 윈프리는 힘들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때론 미혼모의 삶도 살았고, 사랑하는 아들이 일찍 죽는 경험도 했습니다. 20-30대에 많은 고생을 거쳐 자신의 분야에 스스로 도전하면서 오늘날 최고의 방송인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스토리에 열광합니다. 특별히 딱히 이룰 것 없는 환경과 악조건에서 자란 이들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에 이르고 나서 부와 권력을 얻는 모습에 박수를 치고 부러워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신의 인생의 모델로 삼고자 합니다. 비단 오프라 윈프리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성공 스토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몰락한 경우도 역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연예인들보다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는 그렇지만, 한 때 유명했던 목사님들이었는데 어느 날 추문이 터져서 혹은 재산상의 문제로, 가정 문제로 어느 순간 몰락을 맛보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잘 됐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들은 성공이라는 말이 부흥이라는 말로 교묘히 포장된 채 항상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과연 성공과 실패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세상적인 가치관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누가 성공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 실패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인생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공과 실패는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삶의 평가는 이 땅에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된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인생의 부침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규정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받은 인생인가 아닌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조로운 삶인가 아닌가로 규정되는 경우가 훨씬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 11-12절을 읽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성경의 기록은 항상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더더욱 신앙의 큰 승리 뒤에 다가올 위험성에 대해 고린도전서 말씀만큼 경각심을 주는 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사사기 8장을 통해 기드온을 보면서 우리 삶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사사기 8장 34절과 35절은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고 마치고 있습니다. 엄청난 승리를 이뤄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광적으로 따랐던 신앙의 거인이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첫째, 영성 관리의 실패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분노라는 감정의 표출로 나타났고 그것을 못이겨기드온이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감정조절의 실패로 보는 성경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조절의 실패라기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맨 처음 만났울 때와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싸움에 임할 때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와 그리고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비전을 제시합니다. 기드온은 그것에 대해서 확증을 요구하고 제 삶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예배를 드리며, 오직 말씀을 의지하여 전쟁에 임합니다. 그런데 이제 큰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잔당을 쫓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요단강을 넘어 도망하는 미디안 패주병을 쫓는 기드온이 가는 여정에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을 만납니다. 숙곳과 브누엘은 므낫세 지파가 받은 땅에 위치한 두 도시입니다. 비록 전에 헤스본 왕 시혼이 다스렸던 땅이지만, 지금은 엄연히 이스라엘 땅이고 그곳의 거민도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디안의 후환이 두려워 기드온의 군대를 무시하고 돕지 않습니다. 배고픔과 피곤에 지친 기드온이 분노하여 세바와 살문나를 이기고 나면 반드시 복수하겠노라고 말합니다.(8장 7절, 9절) 여기서 우리는 기드온의 한가지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큰 대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확신하면서 작은 대적에 대해서는 묻는 과정이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는 통에 그가 내린 판단에 그의 경험과 인간적인 감정이 스며들게 되었다라는 사실입니다. 비단 이런 경우는 기드온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여호수아가 그랬습니다. 그도 역시 여리고성 전투와 큰 일들은 하나님깨 물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전투나 위장한 여부스 족속들을 다루는 일들애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성을 관리한다는 말은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하나님께 묻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이 크던 작던 간에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이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과 늘 친밀한 교제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부각시키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5절) 예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우리 주변의 공기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주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 식사를 하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교제할 때 식사할 때처럼 그런 친밀함과 평안함이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의 삶이 잘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금새 감정의 노예가 되 버리고 맙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 속에 갇히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무언가로 인하여 분노에 가득 찰 때, 그 바로 직전에 주님과 함께 깊은 기도의 관계 속에 있었던 분이 있으신가요?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이나 불평등에 대한 개인의 자연스러운 감정표출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지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잠언은 경고합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언 29장 22절) 분노를 참고 세바와 살문나를 이기고 난 후에 다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말씀으로 다스렸더라면 같은 동족 사이에 피의 살육은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항상 주님과 함께 대화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훈련된 영성을 쌓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잘 훈련된 영성은 큰 위기 상황에서도, 혹은 사소하고 급박한 감정의 상황 가운데서도 유혹과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시간을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드온은 예배(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되 온 마음을 다하여 힘껏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큰 승리 후에 왕이 되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기드온은 겸손히 거절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장 23절) 이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대신 미디안의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죽인 후 기드온은 그들로부터 미디안의 신앙적 부적이 되는 새 달 형식의 장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한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전리품 중에 일천 칠백 세겔이나 되는 금 귀고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고 나서는 자신의 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온 이스라엘이 그것(금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8장 2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봇은 당시 대제사장이 입던 옷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실로 정교하게 짜서 그 주변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보석을 달고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마다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실로에 에봇이 있었는데, 이것을 본 떠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집에 둔 것입니다. 자신이 사사가 되었으므로 이제 40년 동안 그들에게 다가온 평안의 시기에 하나님께 뜻을 묻고 알고자 하기 위해 그것을 만든 기드온의 의도가 잘못됐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조심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편리함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는 올무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실로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수고를 덜기 위해, 그 전에는 나무를 패고 그 위에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기드온은 이런 조취를 취한 것입니다. 마치 교회를 우리 집으로 옮겨와서 예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신앙의 수고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지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우리의 방법으로 맞추는 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기드온이 겸손하게 마땅히 기대했을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사람들은 에봇을 바알와 아세라 신상의 대체물로 여기고 오히려 그것을 우상화 시킨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그 이면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경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음란하듯 십자가를 우상화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서글픔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로 인해 기드온은 그 가족과 그 자녀들에게 예배의 본질을 상실케 하고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기드온의 전쟁 이후에 찾아온 40년간의 평화의 시기에 신앙이 정립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불신의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예배의 갈급함이 없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신앙의 수고가 없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생명력있는 예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신흥 에봇 종교가 하나 더 생긴 것입니다. 선한 의도였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한 때 전세계에서 로버트 슐러 목사님과 유리로 지은 크리스탈 교회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196-70년대 이후에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그 아름다운 유리교회를 짓게 됩니다. 최고의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해서 찬양을 연주합니다. 교회 절기마다 최고의 찬양과 뮤지컬로 믿는 사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오직 하면 캘리포니아의 명소가 디즈니랜드와 크리스탈 교회라고 선전이 나올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작년(2012) 6월에 이 교회는 파산을 견디지 못해 교회 건물과 대지를 카톨릭 제단에 넘기게 되었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아들과 딸이 제각각 고분분투하고 있지만 옛날의 명성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더 이상 교회가 꽉 차지도 않고 그 안에 있던 활기찬 영성도 잃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려 생명력을 상실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의 복음과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추구하기 보다 오히려 교회 자체가 우상화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하는 생각일지라도 만일 그 교회가 진정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복음 중심의 교회였다면, 말씀 중심의 교회였다면, 그래서 다음 세대를 복음으로 잘 양육했더라면 오히려 더 부흥하면 했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늘 잃지 아니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장 4-5절) 기드온이 알고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이 금 에봇을 섬길 때 빨리 행동을 취하여 그들의 우상 숭배를 막고 다시금 신앙으로 돌아오게끔 인도하는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드온에게는 저의 이룬 모든 것이 무너뜨리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드온은 신앙의 청지기 직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 이후 이제 평안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승리로 인해 그에게는 많은 것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사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권력도 부도 그리고 많은 자녀도 주어졌습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지 정작 본인은 청지기로서 관리자의 사명을 받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면 기드온의 일상은 조금 다른 면들을 보여 줍니다. 40년동안 평안의 시기에 사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왕처럼 백성들 앞에서 군림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금 에봇을 자신의 집에 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권력의 청지기가 아니라 주인행세를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아내에게서 70명의 아들과 세겜에 있는 첩에게서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이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을 비추어 볼 때 자녀들이 행사했을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로 인해 사사기 9장에서 형제들의 골육상쟁이 벌어집니다. 신앙과 행동이 다를 경우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입술로는 겸손을 이야기하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면서 모든 여건을 자신과 가족에게 집중시키는 것은 올바른 청지기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가 얻은 부(전리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것으로 우상이 될만한 금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단 한 구절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모셨거나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예배를 드렸다라는 대목이 없습니다.
진정 평안의 시기에, 그 40년이나 되는 시기에 사사가 된 기드온은 그들에게 찾아온 평온과 고요함만큼이나 신앙의 열정이 잔잔한 호숫가처럼 식어 버렸습니다. 다른 민족으로부터 압제를 받지 않는 상황 그 자체 만으로 만족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벌어진 신앙 사건에 대한 재해석도, 강조도, 그것들을 통한 하나님의 신앙교육도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민족과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도 상관치 않았다라는 사실입니다. 사사라는 청지기 직을 유기한 셈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육명령, 즉 쉐마(들으라 이스라엘이여!)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장 4-9절) 언뜻 제사장의 역할 같지만, 마땅히 사사가 해야 될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에게서도 그의 지파 속에서도 전혀 이런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렵게 신앙 생활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서, 여러분이 땀 흘리며 수고한 중에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들 중에는 부일 수도 있고, 건강 일수도 있고, 여러분 만이 가진 특별한 은사 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은 공동체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체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으며, 혹은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 대하여 청지기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삶과 가정에서 하나님의 식과 방법을 고집하라는 말입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나누어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더욱이 우리가 평안할 때 그런 일들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의 나태가 찾아오고, 결국에는 하나님마저 멀리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보스톤 필그림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드온을 통해 우리 자신을 엿볼 또 하나의 거울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혹 성공에서 실패로 돌이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정 우리 안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습관화 되어 있습니까?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평안할 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대답은 여러분 몫입니다. 신앙의 몰락은 신앙의 위인들에게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용두사미(龍頭蛇尾)의 신앙이 아니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장 7절)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 가는 길과 모든 것의 형통케 하는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혹 야러분이 진정 신앙의 성공자로 생각되시거든 오늘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다시 한번 기드온처럼 “넘어질까 조심”하는 신앙생활이 되시길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These things happened to them as examples ad were written down as warnings for us, on whom the fulfillment of the ages has come. 내, if you think you are standing firm, be careful that you don’t fall! (1 Corinthians 10:11-12)
한번은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게 되었습니다. 별로 시선을 끌 것 같지 않는 중년의 아줌마가 청중의 환호성 속에 자신의 쇼를 당당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 꽤 많은 숫자로 기억합니다. 그 쇼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특별한 봉투를 받은 사람들을 향해 갑자기 오프라가 그 비밀의 봉투를 열면서 그 봉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고급 차를 한대씩 선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마다 예기치 못한 듯 뜻밖의 선물에 눈물과 박수로 화답합니다. 물론 나중에 그것을 받은 사람마다 제각각 그것을 받을 만한 사연이 있었다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일개 한 사람이 스스럼없이 선물할 줄이야, 한 마디로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프라 윈프리라고 말입니다. 미시시피에서 태어난 윈프리는 힘들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때론 미혼모의 삶도 살았고, 사랑하는 아들이 일찍 죽는 경험도 했습니다. 20-30대에 많은 고생을 거쳐 자신의 분야에 스스로 도전하면서 오늘날 최고의 방송인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스토리에 열광합니다. 특별히 딱히 이룰 것 없는 환경과 악조건에서 자란 이들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에 이르고 나서 부와 권력을 얻는 모습에 박수를 치고 부러워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신의 인생의 모델로 삼고자 합니다. 비단 오프라 윈프리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성공 스토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몰락한 경우도 역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연예인들보다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는 그렇지만, 한 때 유명했던 목사님들이었는데 어느 날 추문이 터져서 혹은 재산상의 문제로, 가정 문제로 어느 순간 몰락을 맛보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잘 됐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들은 성공이라는 말이 부흥이라는 말로 교묘히 포장된 채 항상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과연 성공과 실패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세상적인 가치관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누가 성공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 실패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인생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성공과 실패는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삶의 평가는 이 땅에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된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인생의 부침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규정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통의 복을 받은 인생인가 아닌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조로운 삶인가 아닌가로 규정되는 경우가 훨씬 이치에 맞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 11-12절을 읽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성경의 기록은 항상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더더욱 신앙의 큰 승리 뒤에 다가올 위험성에 대해 고린도전서 말씀만큼 경각심을 주는 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사사기 8장을 통해 기드온을 보면서 우리 삶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사사기 8장 34절과 35절은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고 마치고 있습니다. 엄청난 승리를 이뤄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광적으로 따랐던 신앙의 거인이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첫째, 영성 관리의 실패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분노라는 감정의 표출로 나타났고 그것을 못이겨기드온이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감정조절의 실패로 보는 성경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조절의 실패라기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맨 처음 만났울 때와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싸움에 임할 때에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와 그리고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비전을 제시합니다. 기드온은 그것에 대해서 확증을 요구하고 제 삶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예배를 드리며, 오직 말씀을 의지하여 전쟁에 임합니다. 그런데 이제 큰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잔당을 쫓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요단강을 넘어 도망하는 미디안 패주병을 쫓는 기드온이 가는 여정에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을 만납니다. 숙곳과 브누엘은 므낫세 지파가 받은 땅에 위치한 두 도시입니다. 비록 전에 헤스본 왕 시혼이 다스렸던 땅이지만, 지금은 엄연히 이스라엘 땅이고 그곳의 거민도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디안의 후환이 두려워 기드온의 군대를 무시하고 돕지 않습니다. 배고픔과 피곤에 지친 기드온이 분노하여 세바와 살문나를 이기고 나면 반드시 복수하겠노라고 말합니다.(8장 7절, 9절) 여기서 우리는 기드온의 한가지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큰 대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확신하면서 작은 대적에 대해서는 묻는 과정이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는 통에 그가 내린 판단에 그의 경험과 인간적인 감정이 스며들게 되었다라는 사실입니다. 비단 이런 경우는 기드온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여호수아가 그랬습니다. 그도 역시 여리고성 전투와 큰 일들은 하나님깨 물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전투나 위장한 여부스 족속들을 다루는 일들애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성을 관리한다는 말은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하나님께 묻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이 크던 작던 간에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이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과 늘 친밀한 교제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부각시키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 5절) 예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우리 주변의 공기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주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 식사를 하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교제할 때 식사할 때처럼 그런 친밀함과 평안함이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의 삶이 잘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금새 감정의 노예가 되 버리고 맙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 속에 갇히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무언가로 인하여 분노에 가득 찰 때, 그 바로 직전에 주님과 함께 깊은 기도의 관계 속에 있었던 분이 있으신가요?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이나 불평등에 대한 개인의 자연스러운 감정표출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지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잠언은 경고합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언 29장 22절) 분노를 참고 세바와 살문나를 이기고 난 후에 다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말씀으로 다스렸더라면 같은 동족 사이에 피의 살육은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항상 주님과 함께 대화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훈련된 영성을 쌓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잘 훈련된 영성은 큰 위기 상황에서도, 혹은 사소하고 급박한 감정의 상황 가운데서도 유혹과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시간을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드온은 예배(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되 온 마음을 다하여 힘껏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큰 승리 후에 왕이 되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기드온은 겸손히 거절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장 23절) 이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대신 미디안의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죽인 후 기드온은 그들로부터 미디안의 신앙적 부적이 되는 새 달 형식의 장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한 백성들로부터 그들의 전리품 중에 일천 칠백 세겔이나 되는 금 귀고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고 나서는 자신의 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온 이스라엘이 그것(금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8장 27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봇은 당시 대제사장이 입던 옷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실로 정교하게 짜서 그 주변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보석을 달고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마다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실로에 에봇이 있었는데, 이것을 본 떠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집에 둔 것입니다. 자신이 사사가 되었으므로 이제 40년 동안 그들에게 다가온 평안의 시기에 하나님께 뜻을 묻고 알고자 하기 위해 그것을 만든 기드온의 의도가 잘못됐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조심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편리함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는 올무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실로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수고를 덜기 위해, 그 전에는 나무를 패고 그 위에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기드온은 이런 조취를 취한 것입니다. 마치 교회를 우리 집으로 옮겨와서 예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신앙의 수고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지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우리의 방법으로 맞추는 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기드온이 겸손하게 마땅히 기대했을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사람들은 에봇을 바알와 아세라 신상의 대체물로 여기고 오히려 그것을 우상화 시킨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그 이면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경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음란하듯 십자가를 우상화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서글픔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로 인해 기드온은 그 가족과 그 자녀들에게 예배의 본질을 상실케 하고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기드온의 전쟁 이후에 찾아온 40년간의 평화의 시기에 신앙이 정립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불신의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예배의 갈급함이 없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신앙의 수고가 없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생명력있는 예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신흥 에봇 종교가 하나 더 생긴 것입니다. 선한 의도였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한 때 전세계에서 로버트 슐러 목사님과 유리로 지은 크리스탈 교회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196-70년대 이후에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그 아름다운 유리교회를 짓게 됩니다. 최고의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해서 찬양을 연주합니다. 교회 절기마다 최고의 찬양과 뮤지컬로 믿는 사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오직 하면 캘리포니아의 명소가 디즈니랜드와 크리스탈 교회라고 선전이 나올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작년(2012) 6월에 이 교회는 파산을 견디지 못해 교회 건물과 대지를 카톨릭 제단에 넘기게 되었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아들과 딸이 제각각 고분분투하고 있지만 옛날의 명성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더 이상 교회가 꽉 차지도 않고 그 안에 있던 활기찬 영성도 잃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려 생명력을 상실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의 복음과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추구하기 보다 오히려 교회 자체가 우상화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하는 생각일지라도 만일 그 교회가 진정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복음 중심의 교회였다면, 말씀 중심의 교회였다면, 그래서 다음 세대를 복음으로 잘 양육했더라면 오히려 더 부흥하면 했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늘 잃지 아니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장 4-5절) 기드온이 알고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이 금 에봇을 섬길 때 빨리 행동을 취하여 그들의 우상 숭배를 막고 다시금 신앙으로 돌아오게끔 인도하는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드온에게는 저의 이룬 모든 것이 무너뜨리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드온은 신앙의 청지기 직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 이후 이제 평안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승리로 인해 그에게는 많은 것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사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권력도 부도 그리고 많은 자녀도 주어졌습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지 정작 본인은 청지기로서 관리자의 사명을 받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면 기드온의 일상은 조금 다른 면들을 보여 줍니다. 40년동안 평안의 시기에 사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왕처럼 백성들 앞에서 군림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상은 금 에봇을 자신의 집에 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섬기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권력의 청지기가 아니라 주인행세를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아내에게서 70명의 아들과 세겜에 있는 첩에게서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이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을 비추어 볼 때 자녀들이 행사했을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로 인해 사사기 9장에서 형제들의 골육상쟁이 벌어집니다. 신앙과 행동이 다를 경우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입술로는 겸손을 이야기하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면서 모든 여건을 자신과 가족에게 집중시키는 것은 올바른 청지기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가 얻은 부(전리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것으로 우상이 될만한 금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단 한 구절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모셨거나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예배를 드렸다라는 대목이 없습니다.
진정 평안의 시기에, 그 40년이나 되는 시기에 사사가 된 기드온은 그들에게 찾아온 평온과 고요함만큼이나 신앙의 열정이 잔잔한 호숫가처럼 식어 버렸습니다. 다른 민족으로부터 압제를 받지 않는 상황 그 자체 만으로 만족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벌어진 신앙 사건에 대한 재해석도, 강조도, 그것들을 통한 하나님의 신앙교육도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민족과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도 상관치 않았다라는 사실입니다. 사사라는 청지기 직을 유기한 셈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육명령, 즉 쉐마(들으라 이스라엘이여!)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장 4-9절) 언뜻 제사장의 역할 같지만, 마땅히 사사가 해야 될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에게서도 그의 지파 속에서도 전혀 이런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렵게 신앙 생활해서, 하나님께 간구해서, 여러분이 땀 흘리며 수고한 중에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것들 중에는 부일 수도 있고, 건강 일수도 있고, 여러분 만이 가진 특별한 은사 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은 공동체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체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으며, 혹은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 대하여 청지기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삶과 가정에서 하나님의 식과 방법을 고집하라는 말입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나누어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더욱이 우리가 평안할 때 그런 일들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의 나태가 찾아오고, 결국에는 하나님마저 멀리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보스톤 필그림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드온을 통해 우리 자신을 엿볼 또 하나의 거울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혹 성공에서 실패로 돌이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정 우리 안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습관화 되어 있습니까?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평안할 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대답은 여러분 몫입니다. 신앙의 몰락은 신앙의 위인들에게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용두사미(龍頭蛇尾)의 신앙이 아니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장 7절)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 가는 길과 모든 것의 형통케 하는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혹 야러분이 진정 신앙의 성공자로 생각되시거든 오늘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다시 한번 기드온처럼 “넘어질까 조심”하는 신앙생활이 되시길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