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첫 선포 The First Proclamation of Jesus
성경본문: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작년 11월에 Harris Interactive라는 곳에서 미국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신앙과 관련해서 가장 간단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기적을 믿습니까? 당신은 천국을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 종교적 질문을 17가지로 설정해 놓고 성별, 지역별, 정치적 성향 별로 물어본 것입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항목이 하나 들어 왔습니다. 바로 천국(heaven, 혹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믿는다 68%, 믿지 않는다 16%, 그리고 잘 모르겠다 15% 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74%의 수치와는 조금은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했던 2005, 2007, 2009년 조사들에서는 천국에 대한 믿음이 75%로 나타납니다. 점점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신앙이 퇴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천국에 대해서 듣고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관심도 믿음도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점 자본과 상업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현재, 그리고 지금 여기에만 관심을 가질 뿐, 내세, 곧 죽음 이후에는 별 관심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보단 “오늘을 즐기라”는 호라시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BC 8)의 싯구 중의 하나인 Carpe Diem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천국에 대한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그려보고자 열심을 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을 꽉 붙잡고 신실하게 산다면 Carpe Diem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을 앞두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번째 선포에 대해서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항상 처음 하는 말과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셨던 그 선포는 예수님의 사역 방향과 관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를 함께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의 모든 비밀과 기쁨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의 노력들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 받는 곳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들고 찾아갑니다. 그곳에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웁니다. 정의가 무너진 곳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자 노력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험적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이 모습과 열정은 너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기를 소망하면서 뿌렸던 수많은 선배 신앙인들의 고귀한 희생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장 6-8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니이다.”(시편 102편 26-27절)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과 주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들은 중단되지 말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함께 누리길 원하셨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단편에 불과할 뿐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좀더 넓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노력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고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목숨을 바치고 헌신하는 노력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이 세상을 넘어선,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이런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다시 한번 그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도 한 평생 멋지게 살다가 죽었고, 그 집 대문 앞에서 한 평생 거지로 살았던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보니 부자는 음부(지옥)에, 그리고 나사로는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보여 줍니다. 음부는 지극한 고통이 떠나지 않고 영원한 고민 가운데 사는 곳이고,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안식과 기쁨 가운데 사는 곳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죽음 이후에 심판의 결과에 따라 우리가 영원히 경험하게 될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한 계시록은 우리 인류의 종말과 더불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어느 구절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영원토록 존재한다고 기록한 곳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번째로 선포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공생애의 시작도 그리고 그 마지막도 끝까지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영원토록 미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단히 전파하셨고, 그리고 현세의 권세 잡은 자들이 끊임없이 예수님께 정치적 메시야로서 현세적 정체성을 물었을 때마다 예수님은 그것을 뛰어 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통해 구원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이 통치하는 영원한 천국에 대해서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 히브리어로는 ‘슈브’라고 합니다. 두 단어의 말 뜻을 풀어 종합해보면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살던 우리가 깊이 후회하고 반성하고 돌이켜서 다시금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늘 범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보다 정욕과 탐욕에 사로 잡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 즉 죄를 범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범죄의 성향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소극적, 적극적 행위를 포함합니다. 죄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장 2절)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상태로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안에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길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 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입술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실천하겠다고 했을 때도 역시 꼭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 없는 그리스도인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안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힘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참된 안식과 기쁨이 없다면 바로 이것에서 막힌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마음, 이것은 남들은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 자신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도 그 부분이 나옵니다. 부자가 왜 지옥에 갔고 나사로가 왜 천국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경은 단편적으로 부자에게는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줍니다.(누가복음 16장 30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의 전부이고 최고이십니다. 혹 돈을 더 사랑했다면, 명예를 더 사랑했다면, 건강을 더 사랑했다면, 혹은 가족을 더 사랑했다면, 남과의 관계를 더 사랑했다면, 골프를 더 사랑했다면, 드라마를 더 사랑했다면, 학위를 더 사랑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다 위에 있는 이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 개인들이 숨기거나 드러내기 싫어하는 죄를 회개하기 원하십니다. 욕심, 거짓말, 나태, 음욕, 성냄, 미움, 질투, 함부로 하는 말 등 이런 죄들은 나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쉽게 발견 됩니다. 언제나 반복적으로 짓는 죄이며, 이제는 하도 많이 고백해서 설마 이런 것까지 하나님이 들으실까 라는 의심이 들어 우리의 회개를 머뭇거리게 합니다. 때로는 그것들이 너무 무거워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대언자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사탄은 자꾸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무디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양심의 찔림은 주되 그 죄의 주변부에서 떠나지 않고 맴맴 돌게 만들 것입니다. 죄가 깊어지면 우리 안에 참된 안식이 사라지고 기쁨도 없습니다. 예배하는 기쁨도, 찬양하는 기쁨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그 기쁨도 없어집니다. 때론 우리가 너무 기도를 많이 하고 찬양이 충만하다고 해서 느껴지는 자신감 속에 숨겨져 있는 교만도 회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겸손함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남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과 대상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지은 죄들까지 낱낱이 아뢰어 즉시 즉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체하면 할수록 우리의 신앙 양심은 무디어지고 성령님이 떠나시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형식으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내려 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고통 당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나 때문에 십자가 지신 것입니다. 머리의 가시관의 고통이, 채찍으로 찢기신 살과 창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모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장 8절). 주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깨끗하게 지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장 18절)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죄 없다 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회개의 열매에 이를 때만 우리는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혼인잔치에 더러운 죄악의 옷을 입고 참여하기보다 죄 사함의 흰 옷을 입고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는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실 회개는 말만 다를 뿐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를 이루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 즉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라는 총주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4장 6절)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결국 복음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주신 사랑의 선물을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게 하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기쁨에 참여하도록 우리의 모든 의지와 마음을 위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흔히들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신속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반응 중에 하나가 ‘나중에 믿겠다’라는 말입니다. “은퇴하고 나서 종교생활 삼아 믿겠습니다. 집안 제사를 다 물려주고 나서 홀가분할 때 믿겠습니다. 지금 사업을 정리하고 믿겠습니다. 이번 학위만 마치면 믿겠습니다. 이번 승진만 끝나면 믿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당신의 그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기를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나 봅니다. 유명한 부흥사요 복음 전도자였던 무디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목회하실 때입니다. 청년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하던 중에 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이따금씩 성경공부 반에는 참석하면서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을 계속 이런 저런 핑계로 연기합니다. 서부에 내려가서 금광을 찾아 부자가 되고 성공하면 그때 가서 예수님을 잘 믿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 청년이 무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서부로 떠난다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다시 한번 권면했지만 아연 정색을 하고 돌아서서 나가 버립니다. 그 순간 무디 목사님은 뭔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자정이 넘는 시간에 그 청년의 약혼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 청년이 야간 특급 열차를 타고 내려가던 중 기차의 탈선 사고로 이 청년이 크게 다쳐 지금 응급실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급히 달려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청년에게 귀에 입을 대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목사님,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애석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언 27장 1절) 정말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비밀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주님의 첫 선포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혹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이 시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세례 받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 전까지 40일 동안 금식과 절제를 이루면서 주님의 말씀과 생애를 묵상했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도 마찬가지로 한 주일에 최소한 한끼 내지는 하루 금식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의 관심을 알고 그 마음을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에 있었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 대한 많은 관심을 절제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더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던 지난 날의 모든 죄들을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 놓고 낱낱이 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즉시 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한 양심을 지키고, 성령 충만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혜의 사순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작년 11월에 Harris Interactive라는 곳에서 미국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신앙과 관련해서 가장 간단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기적을 믿습니까? 당신은 천국을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 종교적 질문을 17가지로 설정해 놓고 성별, 지역별, 정치적 성향 별로 물어본 것입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항목이 하나 들어 왔습니다. 바로 천국(heaven, 혹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믿는다 68%, 믿지 않는다 16%, 그리고 잘 모르겠다 15% 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74%의 수치와는 조금은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했던 2005, 2007, 2009년 조사들에서는 천국에 대한 믿음이 75%로 나타납니다. 점점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신앙이 퇴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천국에 대해서 듣고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관심도 믿음도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점 자본과 상업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현재, 그리고 지금 여기에만 관심을 가질 뿐, 내세, 곧 죽음 이후에는 별 관심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보단 “오늘을 즐기라”는 호라시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BC 8)의 싯구 중의 하나인 Carpe Diem에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천국에 대한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그려보고자 열심을 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을 꽉 붙잡고 신실하게 산다면 Carpe Diem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을 앞두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번째 선포에 대해서 함께 나눠 보고자 합니다. 항상 처음 하는 말과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셨던 그 선포는 예수님의 사역 방향과 관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를 함께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의 모든 비밀과 기쁨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의 노력들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 받는 곳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들고 찾아갑니다. 그곳에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교회도 세웁니다. 정의가 무너진 곳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자 노력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험적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이 모습과 열정은 너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기를 소망하면서 뿌렸던 수많은 선배 신앙인들의 고귀한 희생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장 6-8절)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니이다.”(시편 102편 26-27절)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과 주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들은 중단되지 말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함께 누리길 원하셨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단편에 불과할 뿐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좀더 넓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노력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고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목숨을 바치고 헌신하는 노력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이 세상을 넘어선,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이런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다시 한번 그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도 한 평생 멋지게 살다가 죽었고, 그 집 대문 앞에서 한 평생 거지로 살았던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보니 부자는 음부(지옥)에, 그리고 나사로는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보여 줍니다. 음부는 지극한 고통이 떠나지 않고 영원한 고민 가운데 사는 곳이고, 천국은 영원한 위로와 안식과 기쁨 가운데 사는 곳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죽음 이후에 심판의 결과에 따라 우리가 영원히 경험하게 될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한 계시록은 우리 인류의 종말과 더불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어느 구절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영원토록 존재한다고 기록한 곳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번째로 선포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공생애의 시작도 그리고 그 마지막도 끝까지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영원토록 미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단히 전파하셨고, 그리고 현세의 권세 잡은 자들이 끊임없이 예수님께 정치적 메시야로서 현세적 정체성을 물었을 때마다 예수님은 그것을 뛰어 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통해 구원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이 통치하는 영원한 천국에 대해서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 히브리어로는 ‘슈브’라고 합니다. 두 단어의 말 뜻을 풀어 종합해보면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살던 우리가 깊이 후회하고 반성하고 돌이켜서 다시금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늘 범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보다 정욕과 탐욕에 사로 잡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 즉 죄를 범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범죄의 성향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소극적, 적극적 행위를 포함합니다. 죄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장 2절)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상태로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안에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길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 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입술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실천하겠다고 했을 때도 역시 꼭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 없는 그리스도인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안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힘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참된 안식과 기쁨이 없다면 바로 이것에서 막힌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마음, 이것은 남들은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 자신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도 그 부분이 나옵니다. 부자가 왜 지옥에 갔고 나사로가 왜 천국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경은 단편적으로 부자에게는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줍니다.(누가복음 16장 30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의 전부이고 최고이십니다. 혹 돈을 더 사랑했다면, 명예를 더 사랑했다면, 건강을 더 사랑했다면, 혹은 가족을 더 사랑했다면, 남과의 관계를 더 사랑했다면, 골프를 더 사랑했다면, 드라마를 더 사랑했다면, 학위를 더 사랑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다 위에 있는 이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 개인들이 숨기거나 드러내기 싫어하는 죄를 회개하기 원하십니다. 욕심, 거짓말, 나태, 음욕, 성냄, 미움, 질투, 함부로 하는 말 등 이런 죄들은 나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쉽게 발견 됩니다. 언제나 반복적으로 짓는 죄이며, 이제는 하도 많이 고백해서 설마 이런 것까지 하나님이 들으실까 라는 의심이 들어 우리의 회개를 머뭇거리게 합니다. 때로는 그것들이 너무 무거워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대언자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사탄은 자꾸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무디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양심의 찔림은 주되 그 죄의 주변부에서 떠나지 않고 맴맴 돌게 만들 것입니다. 죄가 깊어지면 우리 안에 참된 안식이 사라지고 기쁨도 없습니다. 예배하는 기쁨도, 찬양하는 기쁨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그 기쁨도 없어집니다. 때론 우리가 너무 기도를 많이 하고 찬양이 충만하다고 해서 느껴지는 자신감 속에 숨겨져 있는 교만도 회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겸손함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남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과 대상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지은 죄들까지 낱낱이 아뢰어 즉시 즉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체하면 할수록 우리의 신앙 양심은 무디어지고 성령님이 떠나시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형식으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내려 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고통 당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나 때문에 십자가 지신 것입니다. 머리의 가시관의 고통이, 채찍으로 찢기신 살과 창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모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장 8절). 주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깨끗하게 지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흥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장 18절)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죄 없다 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회개의 열매에 이를 때만 우리는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혼인잔치에 더러운 죄악의 옷을 입고 참여하기보다 죄 사함의 흰 옷을 입고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는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실 회개는 말만 다를 뿐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를 이루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 즉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라는 총주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4장 6절)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결국 복음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주신 사랑의 선물을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게 하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기쁨에 참여하도록 우리의 모든 의지와 마음을 위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흔히들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신속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반응 중에 하나가 ‘나중에 믿겠다’라는 말입니다. “은퇴하고 나서 종교생활 삼아 믿겠습니다. 집안 제사를 다 물려주고 나서 홀가분할 때 믿겠습니다. 지금 사업을 정리하고 믿겠습니다. 이번 학위만 마치면 믿겠습니다. 이번 승진만 끝나면 믿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당신의 그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기를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나 봅니다. 유명한 부흥사요 복음 전도자였던 무디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목회하실 때입니다. 청년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하던 중에 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이따금씩 성경공부 반에는 참석하면서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을 계속 이런 저런 핑계로 연기합니다. 서부에 내려가서 금광을 찾아 부자가 되고 성공하면 그때 가서 예수님을 잘 믿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 청년이 무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지금 서부로 떠난다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다시 한번 권면했지만 아연 정색을 하고 돌아서서 나가 버립니다. 그 순간 무디 목사님은 뭔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자정이 넘는 시간에 그 청년의 약혼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 청년이 야간 특급 열차를 타고 내려가던 중 기차의 탈선 사고로 이 청년이 크게 다쳐 지금 응급실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급히 달려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청년에게 귀에 입을 대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목사님,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애석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언 27장 1절) 정말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비밀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주님의 첫 선포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혹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이 시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세례 받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 전까지 40일 동안 금식과 절제를 이루면서 주님의 말씀과 생애를 묵상했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도 마찬가지로 한 주일에 최소한 한끼 내지는 하루 금식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금식하시면서 예수님의 관심을 알고 그 마음을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에 있었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 대한 많은 관심을 절제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더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던 지난 날의 모든 죄들을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 놓고 낱낱이 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즉시 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한 양심을 지키고, 성령 충만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혜의 사순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