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2: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이제 막 개척하고 나서 예배 드릴 처소를 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Arlington, Cambridge, Belmont Watertown, Boston, 그리고 마지막으로 Newton 지역이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미 정중한 거절과 때론 무관심의 결과를 안고 계속 기도하던 중에 지금 우리가 빌려 쓰고 있는 이 미국 교회와 Walnut Street 선상에 있는 중국인 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당시 뉴튼에 있는 중국인 교회 담임 목사님은 Stephen Chin 목사님이셨는데 저녁 느즈막에 교회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일단 저의 사정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는 흔쾌히 교회를 빌려주시겠노라고 또 많은 부분을 도와주시겠노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힘이 나던지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Chin 목사님께서 불쑥 던진 한 마디가 가슴에 깊은 멍을 하나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왜 그렇게 자주 싸우고 분열됩니까? 우리 중국 교회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한국 이민교회가 1970년대 이후로 비약적인 발전과 부흥을 경험했지만, 한가지 가슴 아픈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다툼과 분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 가장 흔한 모습이 갈등으로 인한 다툼과 분열이기에 교회라고 예외일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라고 하면 적어도 교회 바깥 사람들이 ‘사랑 공동체’,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라는 별칭이 있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정작 그런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영광을 가리우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동일한 주제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11절-12절에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로 인해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여러 파벌로 나누어져 서로 다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운 창립자이고, 아볼로는 당시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역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자 설교자였습니다. 게바라 불리는 베드로는 교회 내에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최고 권위의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영적인 (은사와 지식의) 우위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그런 부류들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내의 지도력이 무너지고 영적인 권위마저 상실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이해타산 관계에 따라 속하여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열의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1장 10절부터 시작하여 4장에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의 지혜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대의 헬레니즘의 중심지로서 고린도교회는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지적 권위를 내세우는데 골몰했습니다. 각 파벌은 나름의 철학과 신학으로 무장하고 세력을 확장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강하게 비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장 21절, 25절)
우리에게도 이 문제는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과 저에게는 신앙의 스승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목회자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전부를 쏟아 사랑과 기도를 해 주신 그분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르침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목회자가 오고 난 후 목회가 그것에 못 미치거나 혹은 약간 다른 형태의 목회를 할라치면 바로 그 잣대를 적용해서 비교해서 반발합니다. 또 어떤 분은 신앙 생활의 연조를 기준으로 하여 ‘들을만큼 들었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으니 내가 아는 지식이 전부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이단이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민교회가 다투고 분열하는 그 근본 원인이 바로 세상 지식에 기반하여 권위를 주장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김을 보게 됩니다. 뉴저지의 어느 큰 교회의 경우 전임목사와 후임 목사간의 다툼으로 인해 교회가 큰 혼란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아름답게 위임을 했으면 서로 존중하고 세워드리면 좋으련만 ‘현재 담임 목사는 나니 전임 목사는 교인들과 간섭도 접촉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담임목사와 장로간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장로님들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이니 영적인 부분을 넘어 모든 부분을 다 주관할려고 합니다. 커튼 색깔을 결정하고, 기타는 이런 것을 사고 드럼은 저런 것을 사야 하며, 부엌 공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일일이 간섭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런 다툼의 당사자들 모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 일에 아주 열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다툼이 일어났을 때 대개가 동조자가 있다는 사실이고, 그들의 권위에 인간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은 세상 지식과 지혜에 대한 맹신을 넘어 인간적인 교만에 그 원인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18절과 21절부터 23절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이 언제 교만합니까? 믿는 자가 신앙적으로 미성숙할 때 우리는 교만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믿음 안에서 올바른 성장을 이룬 사람은 그의 삶의 열매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사고와 민주적인 절차에 익숙한 우리들은 대개 이런 상황들이 오면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내세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관하기 보다 세상의 학벌과 지식과 연륜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큰 소리 칩니다. 언뜻 그것이 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의 지독한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우리이고, 우리의 뜻과 생각이 최고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나아 보이는 지위와 학벌과 위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쉽게 수긍해버리고 동조해 버립니다. 동조하는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우리는 눈뜬 영적인 장님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우상이 되어 갑니다그래서 교회 내에서 목사님이 우상화되어 갑니다. 영적으로 깊은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우상화되어 갑니다. 혹은 박학다식한 박사님이 우상화되어 갑니다. 기도 많이 하는 분이 우상화 되어 갑니다. . 그런 우상이 된 사람들 때문에 교회 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깊음에는 바로 인간의 뿌리 깊은 교만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고, 믿음을 따라 일을 한다고주장하고, 그리고 언뜻 자신들의 모든 것을 들여 몸바쳐 충성하고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뭐가 문제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데 그 과정과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다툼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생깁니다. 파벌로 인해 분열이 생깁니다. 교회의 부흥이 아닌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에게 교회란 이런 곳이구나 하고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집니다. 이런 모습은 결국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이민교회에게 분열과 아픔이라는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설교 제목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제목은 성 프란시스의 대표적인 기도문에서 왔습니다. 한번 그 기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유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참 믿음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다툼과 분열의 당사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는 교회와 삶에서 실질적인 문제들에 접했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와 자세를 나타내기 까지 우리는 영적으로 훈련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툼과 분열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적용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도님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사람들’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을 치루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는 우리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죄성이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이 왜곡되고 손상되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어느 정도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모두 흠이 있고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와 자매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늘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주 앞에 섰을 때만 우리가 온전히 깨닫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다툼을 일으키는 남에 대한 판단의 태도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먼저 돌로 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들보(연약함)를 먼저 보고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는 의인공동체가 아닌 죄인공동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울러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가운데는 우리가 교회의 각 지체라는 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과 연합되어 있어서 주님의 뜻과 생각을 묻고 그분의 의지와 계획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이더라도 말입니다. 모두가 머리 역할을 한다고 하면 몸은 당장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방황합니다. 그리고 종극에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을 고집했을 때 우리의 모습 속에서 표출되는 악함의 정도가 더더욱 심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말 속에는 마치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여럿이 아닌 하나 됨의 유기체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다투고 분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몸에 대한 자해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격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하여 하나됨의 공동체를 인식하는 지체들은 그 안에 보호받음과 안정감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복음 만이 우리를 연합시키고 일치시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더더욱 의지하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장 18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오직 믿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아래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일치와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 지혜를 모두 찌꺼기로 여기고 오직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다툼과 분열이 이를 때 왜 우리는 십자가 아래 나오지 않습니까? 어려워도 그곳에 나오면 은혜가 있습니다. 아픔을 용서하고 상처가 치유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를 바로 보고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을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역과 봉사의 원칙에 십자가의 복음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목적이 분명한 공동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툼으로 인해 힘을 분산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사명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기도할 것입니다. 올바른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삶의 구체적인 역사로 나타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 다투고 분열하는 것보다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삶은 생명으로의 변화를 이끌기에 우리 안에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최종적으로 고린도교회에게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린도전서 1장 10절). 사랑하는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십자가 아래 우리 다툼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다툼과 분열의 원인자가 아닌 평화의 도구로 다시 한번 헌신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이제 막 개척하고 나서 예배 드릴 처소를 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Arlington, Cambridge, Belmont Watertown, Boston, 그리고 마지막으로 Newton 지역이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이미 정중한 거절과 때론 무관심의 결과를 안고 계속 기도하던 중에 지금 우리가 빌려 쓰고 있는 이 미국 교회와 Walnut Street 선상에 있는 중국인 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당시 뉴튼에 있는 중국인 교회 담임 목사님은 Stephen Chin 목사님이셨는데 저녁 느즈막에 교회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일단 저의 사정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는 흔쾌히 교회를 빌려주시겠노라고 또 많은 부분을 도와주시겠노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힘이 나던지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Chin 목사님께서 불쑥 던진 한 마디가 가슴에 깊은 멍을 하나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왜 그렇게 자주 싸우고 분열됩니까? 우리 중국 교회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한국 이민교회가 1970년대 이후로 비약적인 발전과 부흥을 경험했지만, 한가지 가슴 아픈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다툼과 분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 가장 흔한 모습이 갈등으로 인한 다툼과 분열이기에 교회라고 예외일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라고 하면 적어도 교회 바깥 사람들이 ‘사랑 공동체’,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라는 별칭이 있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정작 그런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때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영광을 가리우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동일한 주제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11절-12절에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로 인해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여러 파벌로 나누어져 서로 다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운 창립자이고, 아볼로는 당시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역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자 설교자였습니다. 게바라 불리는 베드로는 교회 내에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최고 권위의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영적인 (은사와 지식의) 우위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그런 부류들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내의 지도력이 무너지고 영적인 권위마저 상실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제각각 자신들의 이해타산 관계에 따라 속하여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열의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1장 10절부터 시작하여 4장에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의 지혜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대의 헬레니즘의 중심지로서 고린도교회는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지적 권위를 내세우는데 골몰했습니다. 각 파벌은 나름의 철학과 신학으로 무장하고 세력을 확장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강하게 비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장 21절, 25절)
우리에게도 이 문제는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과 저에게는 신앙의 스승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목회자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전부를 쏟아 사랑과 기도를 해 주신 그분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르침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목회자가 오고 난 후 목회가 그것에 못 미치거나 혹은 약간 다른 형태의 목회를 할라치면 바로 그 잣대를 적용해서 비교해서 반발합니다. 또 어떤 분은 신앙 생활의 연조를 기준으로 하여 ‘들을만큼 들었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으니 내가 아는 지식이 전부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이단이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민교회가 다투고 분열하는 그 근본 원인이 바로 세상 지식에 기반하여 권위를 주장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김을 보게 됩니다. 뉴저지의 어느 큰 교회의 경우 전임목사와 후임 목사간의 다툼으로 인해 교회가 큰 혼란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아름답게 위임을 했으면 서로 존중하고 세워드리면 좋으련만 ‘현재 담임 목사는 나니 전임 목사는 교인들과 간섭도 접촉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담임목사와 장로간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장로님들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이니 영적인 부분을 넘어 모든 부분을 다 주관할려고 합니다. 커튼 색깔을 결정하고, 기타는 이런 것을 사고 드럼은 저런 것을 사야 하며, 부엌 공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일일이 간섭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런 다툼의 당사자들 모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 일에 아주 열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다툼이 일어났을 때 대개가 동조자가 있다는 사실이고, 그들의 권위에 인간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은 세상 지식과 지혜에 대한 맹신을 넘어 인간적인 교만에 그 원인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18절과 21절부터 23절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이 언제 교만합니까? 믿는 자가 신앙적으로 미성숙할 때 우리는 교만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믿음 안에서 올바른 성장을 이룬 사람은 그의 삶의 열매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사고와 민주적인 절차에 익숙한 우리들은 대개 이런 상황들이 오면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내세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관하기 보다 세상의 학벌과 지식과 연륜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큰 소리 칩니다. 언뜻 그것이 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의 지독한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우리이고, 우리의 뜻과 생각이 최고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나아 보이는 지위와 학벌과 위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쉽게 수긍해버리고 동조해 버립니다. 동조하는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우리는 눈뜬 영적인 장님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우상이 되어 갑니다그래서 교회 내에서 목사님이 우상화되어 갑니다. 영적으로 깊은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우상화되어 갑니다. 혹은 박학다식한 박사님이 우상화되어 갑니다. 기도 많이 하는 분이 우상화 되어 갑니다. . 그런 우상이 된 사람들 때문에 교회 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깊음에는 바로 인간의 뿌리 깊은 교만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고, 믿음을 따라 일을 한다고주장하고, 그리고 언뜻 자신들의 모든 것을 들여 몸바쳐 충성하고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뭐가 문제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데 그 과정과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다툼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생깁니다. 파벌로 인해 분열이 생깁니다. 교회의 부흥이 아닌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에게 교회란 이런 곳이구나 하고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집니다. 이런 모습은 결국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이민교회에게 분열과 아픔이라는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설교 제목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제목은 성 프란시스의 대표적인 기도문에서 왔습니다. 한번 그 기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유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참 믿음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다툼과 분열의 당사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는 교회와 삶에서 실질적인 문제들에 접했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와 자세를 나타내기 까지 우리는 영적으로 훈련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다툼과 분열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적용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도님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사람들’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을 치루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는 우리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죄성이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이 왜곡되고 손상되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어느 정도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모두 흠이 있고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와 자매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늘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주 앞에 섰을 때만 우리가 온전히 깨닫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다툼을 일으키는 남에 대한 판단의 태도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먼저 돌로 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들보(연약함)를 먼저 보고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는 의인공동체가 아닌 죄인공동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울러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가운데는 우리가 교회의 각 지체라는 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과 연합되어 있어서 주님의 뜻과 생각을 묻고 그분의 의지와 계획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이더라도 말입니다. 모두가 머리 역할을 한다고 하면 몸은 당장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방황합니다. 그리고 종극에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을 고집했을 때 우리의 모습 속에서 표출되는 악함의 정도가 더더욱 심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말 속에는 마치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여럿이 아닌 하나 됨의 유기체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다투고 분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몸에 대한 자해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격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하여 하나됨의 공동체를 인식하는 지체들은 그 안에 보호받음과 안정감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복음 만이 우리를 연합시키고 일치시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더더욱 의지하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장 18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오직 믿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아래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일치와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 지혜를 모두 찌꺼기로 여기고 오직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다툼과 분열이 이를 때 왜 우리는 십자가 아래 나오지 않습니까? 어려워도 그곳에 나오면 은혜가 있습니다. 아픔을 용서하고 상처가 치유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를 바로 보고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을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역과 봉사의 원칙에 십자가의 복음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목적이 분명한 공동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툼으로 인해 힘을 분산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사명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기도할 것입니다. 올바른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삶의 구체적인 역사로 나타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 다투고 분열하는 것보다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삶은 생명으로의 변화를 이끌기에 우리 안에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최종적으로 고린도교회에게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린도전서 1장 10절). 사랑하는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십자가 아래 우리 다툼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다툼과 분열의 원인자가 아닌 평화의 도구로 다시 한번 헌신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