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으로 기억이 됩니다. 페이스북에 낯선 메시지가 하나 떴습니다. ‘목사님, 저 ooo예요. 제가 주일학교 시절 그 때 전도사님 댁으로 가서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너무 감사해요!’ 처음에는 누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잊어버렸던 것 같은 그 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엄마하고만 교회에 나오던 그 초등학교 5학년, 그 아이였습니다. 몇 명의 아이들을 함께 모아 주말이면 집에서 성경경시대회를 준비했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너무 조용하고 평범했는데 어떻게 나를 찾고 이렇게 연락을 했을까?’ 그래도 계속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지 않고 작은 감사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그 마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사진을 보니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성숙한 청년이 되어버렸지만, 그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지 안봐도 알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큰 일에서 감사를 경험하기 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들에서 더 감사를 느끼곤 합니다. 잔잔한 시냇물처럼 감사의 파동은 우리 삶의 시원한 소리로 다가와 우리에게 생기와 감동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의 삶이 현대인들에게 많이 묻혀 버린 것 같아 내심 마음이 아픕니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 감사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측량하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감사에는 조건이 있다고 믿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감사의 삶에 대해서 어색하고 인색한 삶을 삽니다. 마음 속은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가지처럼 무미건조함이 자리잡고 있고, 원망과 불평이 입술 가운데 따라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방법도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감사를 생활화 하는 것입니다. 몇해전 ‘평생 감사’라는 책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매일 매일 감사 일기를 쓰고, 매순간 떠올려진 감사를 표현하고 그래서 평생을 감사로 살게 되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변에는 그때 그 영향을 받아서 교회 이름을 감사교회로 바꾸신 분도 있습니다.
1621년 11월, 플리머스에서 있었던 첫 추수감사절, 청교도들과 그곳 원주민들이 나눈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칠면조, 옥수수, 감자, 대합조개 조금, … 그런데 그들은 작은 것들로 아주 큰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서로 간에 감사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많은 감사의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 감사를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사실 우리는 큰 일에서 감사를 경험하기 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들에서 더 감사를 느끼곤 합니다. 잔잔한 시냇물처럼 감사의 파동은 우리 삶의 시원한 소리로 다가와 우리에게 생기와 감동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의 삶이 현대인들에게 많이 묻혀 버린 것 같아 내심 마음이 아픕니다.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 감사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측량하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감사에는 조건이 있다고 믿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감사의 삶에 대해서 어색하고 인색한 삶을 삽니다. 마음 속은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가지처럼 무미건조함이 자리잡고 있고, 원망과 불평이 입술 가운데 따라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방법도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감사를 생활화 하는 것입니다. 몇해전 ‘평생 감사’라는 책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매일 매일 감사 일기를 쓰고, 매순간 떠올려진 감사를 표현하고 그래서 평생을 감사로 살게 되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변에는 그때 그 영향을 받아서 교회 이름을 감사교회로 바꾸신 분도 있습니다.
1621년 11월, 플리머스에서 있었던 첫 추수감사절, 청교도들과 그곳 원주민들이 나눈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칠면조, 옥수수, 감자, 대합조개 조금, … 그런데 그들은 작은 것들로 아주 큰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서로 간에 감사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많은 감사의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 감사를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