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여러달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주변의 어떤 분이 그분이 다니시던 교회의 어르신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동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부담이 있어 좁은 집에서 한번은 모셔야겠다라는 마음으로 일을 치뤘습니다. 모든 분들이 다가고 난 후에 아내가 펑펑 울더랍니다. 남편이 왜 그러느냐고, 어디가 많이 힘들었느냐고 물어봅니다. 아내는 저녁 시간 내내 교회 어르신들을 보면서 한국에 계신 친정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리고 너무 죄송스러워서 눈물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곧장 말이 나온 김에 한국에 계신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랫만에 안부도 전하고 그리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전하면서 장모님께 죄송함과 평소의 사랑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장모님께서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장하네. 그렇게라도 교회의 어른들을 대접해 주어서 감사하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이네. 자주 하게나. 전화줘서 고맙네….”
이민자로서 우리와 우리들 가족과의 거리는 실질적으로 태평양을 건너야 될 만큼 멉니다. 카카오톡이나 메신저를 통해서 혹은 인터넷 전화를 통해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자주 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물리적 거리 때문에 심리적인 거리감이 먼것이 사실입니다. 자연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집 안에 명절이 다가오거나 혹은 큰 일이 있을 때에나 급하게 찾아보거나 안부를 묻는 정도입니다.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는 부모님들에게 불효를 하게 되고, 형제지간에 서원해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마음속 핑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의 식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챙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면서 우리들의 가족들도 함께 생각해보고 그분들에게도 더 자주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위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교회 내의 형제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우리의 가족들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더 사랑해야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눈을 돌려 여기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의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한국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처럼 여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질적인 가족 뿐만 아니라 믿음의 가족도 함께 보살피는 실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민자로서 우리와 우리들 가족과의 거리는 실질적으로 태평양을 건너야 될 만큼 멉니다. 카카오톡이나 메신저를 통해서 혹은 인터넷 전화를 통해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자주 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물리적 거리 때문에 심리적인 거리감이 먼것이 사실입니다. 자연히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집 안에 명절이 다가오거나 혹은 큰 일이 있을 때에나 급하게 찾아보거나 안부를 묻는 정도입니다.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는 부모님들에게 불효를 하게 되고, 형제지간에 서원해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마음속 핑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의 식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챙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면서 우리들의 가족들도 함께 생각해보고 그분들에게도 더 자주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위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교회 내의 형제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우리의 가족들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더 사랑해야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이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눈을 돌려 여기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의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한국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처럼 여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질적인 가족 뿐만 아니라 믿음의 가족도 함께 보살피는 실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