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파리(Paris)에 있는 친구 목사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곳 분위기를 물었더니 한마디로 교민들이 ‘멜란콜리(Melancholy)’ 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회색빛 구름이 하늘 언저리에 짙게 드리워진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삶이 힘들고 우울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준사회주의 나라에서 여러가지 교육과 건강, 그리고 복지 혜택은 좋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높은 세금 때문에, 유학을 온 학생들은 학업 이후의 직장을 잡는 문제로 인해, 그리고 그들 사이에도 역시 꿈을 갖고 갔다가 그곳에 눌러 앉은 사람들의 신경증과 때론 어두움이 고스란히 그들의 얼굴에 묻어난다고 했습니다.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보스톤이나 파리나 이민자들의 모습이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인 ‘멜랑콜리아(melencolia 1)를 조용히 들여다 보면 저멀리 빛은 있는데 얼굴에 손을 궤고 주먹을 진채 주변의 온갖 무거워보이는 것들로 인해 힘없이 쳐져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언가 있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부재의 철학이 그 작품안에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는 셈이지요.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부재의 철학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 우리의 신앙을 좀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있는데 예수님이 없는 교회(Jesusless Church), 성령은 있는데 성령이 전혀 역사하지 않는 죽은 교회(Holy Spirit-Numbed Church), 그리고 여전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진채 스스로 아둥바둥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인간 만능 교회(I-Can-Do-All Church)의 본성이 다시금 고개를 쳐듭니다. 그래서 부활절이 채 한주도 지나지 않았건만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 안에는 다시금 영적인 가뭄과 흉년이 찾아온 듯해 보입니다. 마치 하나의 행사가 끝난 것 같은 허전함과 공허감이 밀려와 믿음의 상승으로 인해 고무된 신앙을 다시금 추락하게 만듭니다. 이런 상승과 추락의 간극이 우리를 멜란콜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쉽습니다. 부재의 어두움은 실재의 빛으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머리속 상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재인 현실의 삶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매순간 성령을 통해서 감동을 주시고, 소망과 지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매일 동행하시길 원하나, 거부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닐까요?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인 ‘멜랑콜리아(melencolia 1)를 조용히 들여다 보면 저멀리 빛은 있는데 얼굴에 손을 궤고 주먹을 진채 주변의 온갖 무거워보이는 것들로 인해 힘없이 쳐져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언가 있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부재의 철학이 그 작품안에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는 셈이지요.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부재의 철학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 우리의 신앙을 좀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있는데 예수님이 없는 교회(Jesusless Church), 성령은 있는데 성령이 전혀 역사하지 않는 죽은 교회(Holy Spirit-Numbed Church), 그리고 여전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진채 스스로 아둥바둥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인간 만능 교회(I-Can-Do-All Church)의 본성이 다시금 고개를 쳐듭니다. 그래서 부활절이 채 한주도 지나지 않았건만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 안에는 다시금 영적인 가뭄과 흉년이 찾아온 듯해 보입니다. 마치 하나의 행사가 끝난 것 같은 허전함과 공허감이 밀려와 믿음의 상승으로 인해 고무된 신앙을 다시금 추락하게 만듭니다. 이런 상승과 추락의 간극이 우리를 멜란콜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쉽습니다. 부재의 어두움은 실재의 빛으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머리속 상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재인 현실의 삶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매순간 성령을 통해서 감동을 주시고, 소망과 지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매일 동행하시길 원하나, 거부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