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하는 군중들 사이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사람들 마음 속에는 자신들이 꿈꾸는 메시야 상을 예수님을 통해 그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개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다윗 왕처럼,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풀어주는 최고의 강한 왕이 되는 대신에, 예수님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 당하고, 3년동안 함께 했던 자신의 제자들에게 배신 당하고, 심지어 자신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배웠고 고침을 받았던 동족들의 외면과, 이방인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쓸쓸히 죽어가십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입니다. 로마법에 비춰봐도 가장 비참한 처형 방법이면서 절대 고통과 수치를 안겨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평하지 않으시고 이 모든 것을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안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의 과정과 결과를 자기 자신이 주관하는 버릇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것을 판단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고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를 통해 골고다로 가는 동안에 사람들은 야유와 조롱과 증오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의식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얼굴을 땅에 파묻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이 문제와 씨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잔’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예언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셔야 할 깊고 다함이 없는 ‘진노의 잔’(에스겔 23:32)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마땅히 마셔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는 인간의 배신과 잘못들, 수치심과 교만함, 그리고 모든 반항과 죄악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홀로 주님께서서 담당하신 것입니다. 마치 짓밟힌 장미꽃처럼 외면과 조롱속에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아픔을 참으면서 끝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최고의 시나리오였습니다. 이런 최고의 시나리오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안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의 과정과 결과를 자기 자신이 주관하는 버릇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것을 판단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고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를 통해 골고다로 가는 동안에 사람들은 야유와 조롱과 증오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의식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얼굴을 땅에 파묻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이 문제와 씨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잔’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예언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셔야 할 깊고 다함이 없는 ‘진노의 잔’(에스겔 23:32)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이 마땅히 마셔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는 인간의 배신과 잘못들, 수치심과 교만함, 그리고 모든 반항과 죄악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홀로 주님께서서 담당하신 것입니다. 마치 짓밟힌 장미꽃처럼 외면과 조롱속에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아픔을 참으면서 끝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최고의 시나리오였습니다. 이런 최고의 시나리오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