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1885년에 “버려둔 불꽃이 집을 태운다”라는 단편을 썼습니다. 이 작품은 “용서의 삶”이 실제적인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의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던 두 이웃이 담 넘어 낳은 달걀 하나 때문에 서로의 금이 가고 급기야 자식들 간에, 가족 간에 그리고 그것이 마을로 확장되어 서로 물고 물리는 과정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늙으신 아버지의 거듭된 조언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싸움을 합니다. 감정이 섞여 거친 말을 하다가 행동으로 나타나 결국에는 고소와 형벌을 통해 상대방의 자존심과 육체에 큰 상처를 가하게 됩니다. 태형을 받고 돌아온 이웃이 밤 중에 앙심을 품고 그 집 헛간에 불을 놓게 됩니다. 그런데 작게 시작된 불꽃은 마침 불어온 바람과 더불어 그 집을 태웠고 그 이웃집 뿐만 아니라 마을의 반을 태워 버렸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허물을 깨달은 주인공은 이웃의 잘못을 덮고 침묵함으로 인해 이웃도 잘못을 깨닫게 하고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가 됩니다.
요즘은 예수님 믿는 것이 더이상 어렵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전도집회를 하면서 회심을 하고 새롭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기존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하며 성경을 어느 정도 알던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인생의 뒤늦은 시기에 신앙을 받아들인 톨스토이의 삶의 최고 목표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적용 자체를 위해서 그가 누렸던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혹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집단적 신앙의 이기주의 속에 머물러 있다든지, 신앙의 양심과 말씀으로는 알고 있는데 감정과 환경에 매여 우리와 우리 공동체를 태워버릴 작은 불꽃을 방치하고는 있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입술과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회심과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예수님 믿는 것이 더이상 어렵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전도집회를 하면서 회심을 하고 새롭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기존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하며 성경을 어느 정도 알던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인생의 뒤늦은 시기에 신앙을 받아들인 톨스토이의 삶의 최고 목표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적용 자체를 위해서 그가 누렸던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혹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집단적 신앙의 이기주의 속에 머물러 있다든지, 신앙의 양심과 말씀으로는 알고 있는데 감정과 환경에 매여 우리와 우리 공동체를 태워버릴 작은 불꽃을 방치하고는 있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입술과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회심과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