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화요일(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독립을 6개월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지 71주년 되는 날입니다. 나름 학교 선배라는 자부심도 있지만, 실은 그를 잘 알기 전인 중학교때부터 그의 시인 ‘서시’를 사랑하게 되었고 늘 암송하고 다녔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팬이 되었습니다.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 당시 어린 나의 마음은 서시에서 자연스레 베어나오는 애달픔과 결연함 때문에 마구 요동치곤 했습니다. 암울했던 일제 시대 지성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고뇌했던 양심의 떨림이 그의 다른 시인 ‘십자가’나 ‘쉽게 씌여진 시’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보고 나도 저렇게 깨끗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양심의 떨림을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회와 지성을 대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지어 목사들 마저도, 여전히 궁색한 변명과 하나님과의 교묘한 거리두기를 통해 자신의 내적인 삶을 포장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죄의식이 얕을수록 구원에 대한 확신도 얕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몇년전까지만 해도 신자의 30% 정도만 구원의 확신을 주장했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죄의식과 회개의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핍박도 없고 박해도 없는 편안한 현대를 살아가면서 세속화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의 어찌할 수 없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보다 솔직하자면 제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라오디게야 교회처럼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 마음 한켠에서 들리는 사탄의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있을까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만 들을 수 있다면 그 누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삶을 살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날마다 그런 떨림 앞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그런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팔벌려 받아주시는 그 십자가 아래 자비의 은총을 구합니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양심은 가시관에 박혀 더 아프고 떨릴수 있지만 우리는 회개를 통해 그곳으로부터 다시 시작할수 있는 신앙의 힘과 변화의 자유를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양심의 떨림을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회와 지성을 대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지어 목사들 마저도, 여전히 궁색한 변명과 하나님과의 교묘한 거리두기를 통해 자신의 내적인 삶을 포장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죄의식이 얕을수록 구원에 대한 확신도 얕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몇년전까지만 해도 신자의 30% 정도만 구원의 확신을 주장했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죄의식과 회개의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핍박도 없고 박해도 없는 편안한 현대를 살아가면서 세속화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의 어찌할 수 없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보다 솔직하자면 제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라오디게야 교회처럼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 마음 한켠에서 들리는 사탄의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있을까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만 들을 수 있다면 그 누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삶을 살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날마다 그런 떨림 앞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그런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팔벌려 받아주시는 그 십자가 아래 자비의 은총을 구합니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양심은 가시관에 박혀 더 아프고 떨릴수 있지만 우리는 회개를 통해 그곳으로부터 다시 시작할수 있는 신앙의 힘과 변화의 자유를 느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