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처음으로 읽은 책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책과 다이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란 책입니다. 하나는 신앙서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책입니다. 어찌보면 역사적 배경도, 다루고 있는 주제도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실상은 ‘인간의 실존’이라는 공통점을 두 책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진 현실과 씨름하면서 처하는 선택의 순간에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적나라한 감정의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연약함, 부서짐, 아픔, 배신, 힘듦, 무기력, 등등. 사람은 이럴 때 마땅히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게만 나오지 않는 상식의 배반이 두 책의 곳곳에서 나옵니다. 그런 상식의 배반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는 인간의 실존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책입니다.
2016년 년초에 한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때문에 다시금 이 두 책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목사라는 사람이, 그것도 유학갔다 온 신학박사가 자신의 딸을 죽이고 그렇게 방치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분을 쏟아냅니다. 돌도 던집니다. 나 자신도 대학원 시절 한두 과목을 함께 들었던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기에 더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서짐은 늘 멀리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과 때론 더 이상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려 버리는 죄악의 극단적인 파괴력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고 슬펐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정말 악한 일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사회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떠한 이유나 상황으로도 결코 정당화될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개개인의 문제라든가 한 사람의 가정문제로만 비화될 수도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인(로마서 3장 23절)이라고 규정합니다. 죄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는 사망입니다. 한때 이렇게 말하는 성경의 어휘가 너무 강해서 반발감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할수록 이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개인의 실존의 고독 앞에서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뒤틀려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는 인간의 피와 눈물의 흔적을 썼고, 비틀어진 영혼의 고통스런 신음을 썼고, 암흑 속에서 솟아오른 정신의 불꽃을 썼다.” 다이호우잉이 ‘사람아! 아, 사람아!’ 후기에서 이렇게 밝혔듯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의 삶이나 역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따로 분리되어 생각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더불어 그런 나약한 인간의 실존 앞에 서있는 동료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죄성은 우리 모두의 삶에 녹아 있고 그 안에서 나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여러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상호도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라는 엔도 슈사쿠의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더나아가 이 모든 개인과 공동체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무시할려는 행위,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단절시키려고 하는 그 모든 인간의 노력들이 바로 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모든 죄들의 결과가 바로 사망(죽음, 깨어짐, 부서짐, …)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망(지옥)이라는 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재를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해 겪는 고통과 절망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해 우리들이 연약성과 한계를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인됨을 실존적으로 경험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곤두박질치고 상처입어서 더이상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마음이 괴로워 이미 교회와 세상으로부터 떠나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고 믿음의 양심에 소리에 반응하여 돌아와 회개하는 탕자를 보고 하나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하십니다.
바로 그 만남의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침묵’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처한 연약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화를 밟아야만 하는 순간에도, 주저하고 힘들어하는 우리를 향해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수만 있다면 그것은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He Chose the Nails)’에서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박혔던 두 강도의 십자가를 이렇게 묵상합니다.
“회개한 강도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그는 일생에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친구를 잘못 선택했고, 가치관을 잘못 선택했고, 행동을 잘못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과연 쓰레기 인생으로 볼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자신이 내린 모든 잘못된 선택들의 열매를 거두며 영원을 보내고 있을까? 아니다. 정반대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내린 한 가지 바른 선택의 결실을 즐기고 있다. 결국 그가 내린 단 하나의 선한 선택이 모든 잘못된 선택을 상쇄시킨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회개한 한 강도가 십자가형을 면했다거나 죽음에서 부활했다라는 기록을 찾을려고 관심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면서 행한 단 한번의 영혼의 선택이 천만의 세상의 잘못된 선택들을 상쇄했고 더좋은 영원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에 더 감격헤 합니다. 십자가 아래 고난받는 예수님이 계신 곳은 바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실 은혜와 자비가 충만한 곳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잘못된 선택들을 했고, 잘못된 행동들을 했고, 잘못된 사람들을 만나서 그것들을 뒤바꿔보려고 지금도 아둥바둥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이에 나타나는 불편함과 악함, 거짓들을 숨기려는데에만 급급해서 사망으로 달려가는 우리들의 민낯을 부인하며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안의 도덕성을 잣대로 함부러 휘들러 돌을 마음껏 던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결단하고 싶습니다. 나같은 죄인 위해 고통당하신 그 예수님을 따라 다시금 십자가 아래 자비를 선택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고통과 체념의 극한을 경험했을 그 목사님을 위해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십자가의 자비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찾아온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도 사람들도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2016년 년초에 한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때문에 다시금 이 두 책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목사라는 사람이, 그것도 유학갔다 온 신학박사가 자신의 딸을 죽이고 그렇게 방치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분을 쏟아냅니다. 돌도 던집니다. 나 자신도 대학원 시절 한두 과목을 함께 들었던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기에 더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서짐은 늘 멀리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과 때론 더 이상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려 버리는 죄악의 극단적인 파괴력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고 슬펐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정말 악한 일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사회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떠한 이유나 상황으로도 결코 정당화될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개개인의 문제라든가 한 사람의 가정문제로만 비화될 수도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인(로마서 3장 23절)이라고 규정합니다. 죄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는 사망입니다. 한때 이렇게 말하는 성경의 어휘가 너무 강해서 반발감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할수록 이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개인의 실존의 고독 앞에서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뒤틀려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는 인간의 피와 눈물의 흔적을 썼고, 비틀어진 영혼의 고통스런 신음을 썼고, 암흑 속에서 솟아오른 정신의 불꽃을 썼다.” 다이호우잉이 ‘사람아! 아, 사람아!’ 후기에서 이렇게 밝혔듯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의 삶이나 역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따로 분리되어 생각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더불어 그런 나약한 인간의 실존 앞에 서있는 동료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죄성은 우리 모두의 삶에 녹아 있고 그 안에서 나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여러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상호도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라는 엔도 슈사쿠의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더나아가 이 모든 개인과 공동체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무시할려는 행위,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단절시키려고 하는 그 모든 인간의 노력들이 바로 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모든 죄들의 결과가 바로 사망(죽음, 깨어짐, 부서짐, …)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망(지옥)이라는 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재를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해 겪는 고통과 절망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해 우리들이 연약성과 한계를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인됨을 실존적으로 경험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곤두박질치고 상처입어서 더이상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마음이 괴로워 이미 교회와 세상으로부터 떠나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고 믿음의 양심에 소리에 반응하여 돌아와 회개하는 탕자를 보고 하나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하십니다.
바로 그 만남의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침묵’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처한 연약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화를 밟아야만 하는 순간에도, 주저하고 힘들어하는 우리를 향해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수만 있다면 그것은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He Chose the Nails)’에서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님과 함께 못박혔던 두 강도의 십자가를 이렇게 묵상합니다.
“회개한 강도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그는 일생에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친구를 잘못 선택했고, 가치관을 잘못 선택했고, 행동을 잘못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과연 쓰레기 인생으로 볼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자신이 내린 모든 잘못된 선택들의 열매를 거두며 영원을 보내고 있을까? 아니다. 정반대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내린 한 가지 바른 선택의 결실을 즐기고 있다. 결국 그가 내린 단 하나의 선한 선택이 모든 잘못된 선택을 상쇄시킨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회개한 한 강도가 십자가형을 면했다거나 죽음에서 부활했다라는 기록을 찾을려고 관심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면서 행한 단 한번의 영혼의 선택이 천만의 세상의 잘못된 선택들을 상쇄했고 더좋은 영원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에 더 감격헤 합니다. 십자가 아래 고난받는 예수님이 계신 곳은 바로 죄인인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실 은혜와 자비가 충만한 곳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잘못된 선택들을 했고, 잘못된 행동들을 했고, 잘못된 사람들을 만나서 그것들을 뒤바꿔보려고 지금도 아둥바둥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이에 나타나는 불편함과 악함, 거짓들을 숨기려는데에만 급급해서 사망으로 달려가는 우리들의 민낯을 부인하며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안의 도덕성을 잣대로 함부러 휘들러 돌을 마음껏 던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결단하고 싶습니다. 나같은 죄인 위해 고통당하신 그 예수님을 따라 다시금 십자가 아래 자비를 선택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고통과 체념의 극한을 경험했을 그 목사님을 위해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십자가의 자비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달라고 간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찾아온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도 사람들도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