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일 정도의 차가운 강바람이 부는 11월 어느 토요일, 그날 따라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의 풋볼 경기로 인해 엄청난 인파가 파도처럼 쏴 하니 밀려가는 거리를 지나, 하바드 스퀘어 건물 한 켠에서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존(John)이라는 청년을 만났다. 두꺼운 회색 후드 티를 푹 뒤집어 쓰고 콘크리트 계단 바닥에 앉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무심코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용케도 마첼라가 발견해서 함께 다가선 것이다. 다소 형식적인 짧은 인사와 서로 간의 소개가 오간 후에 우리는 존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발 밑에는 예의 보이는 “HELP, HOMELESS”라는 골판지 대신에 “I Am Something”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은 우스터(Worcester, MA) 지역에서 왔는데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어찌하여 홈리스(노숙자)가 된지 한 2년 정도 됐단다 보스톤 다운타운에서 있다가 하버드 스퀘어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되었다고 했다. 낮에는 그냥 길거리에서 이렇게 웅크리고 있고 저녁에는 근처 노숙자 센터(Homeless Shelter)는 너무 들어가기가 어려워 그냥 열어주는 주변 교회의 쉼터에서 보낸다고 했다. “그런데 왜 ‘I am something’이라고 썼나요?” 2년 동안 이렇게 앉아 있는데 간간히 말을 걸어 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더라는 것이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래서 처음에는 ‘I am Someone’이라고 쓸까 하다가 조금 더 낮추어서 그렇게 쓴 것이란다. 피곤에 지쳐 보이는 목소리 가운데에 무겁게 짓눌리는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항거의 철학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사람에 대한 무관심, 마치 늘 보이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주변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하다. 신문 1면 기사 정도나 나오면 잠시 관심을 기울일 뿐 역시 시간이 가면 시들하다. 정작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무관심하다.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는다는 것은 우선 접어들고라도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의미를 가진 그 무엇이라도 되고픈 인간의 절규에 대해 우리는 무심코 지나간다. 하긴 나도 이전까지는 홈리스에 대한 관심이 그저 입술과 생각에만 머물렀으니 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부류가 아닌가 반성할 점이 많다.
매스 애버뉴(Mass. Avenue)를 따라 좀더 올라가니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난다. 어린 아이들이나 가지고 놀법한 작은 기타, 그것도 왼손잡이용인 기타를 옆에 낀 채 이리 저리 둘러 본다. 두툼한 잠바와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거리의 수도사 같은 냄새가 난다. 얼굴은 퀭하니 말랐건만 그래도 제법 추위에 버티는 여유로움이 있다. “HOMELESS”라는 종이 판지 위에 깡통이 하나 놓여 있고 제법 지폐랑 동전도 들어 있다. 자신을 앨리스터(Alister)라고 소개했다. 고향은 영국 스코틀랜드라고 했다. 서부 캘리포니아로 갔다가 가족들과 헤어진 후 동부로 와서 이곳 보스톤에 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홈리스가 된지는 10여년이 조금 넘었다고 했다. 나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에 사연이 많을 것 같았다. 교회에서 나왔노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일본에서 온 사람인냥 자신이 동양종교에 관심이 많다는 등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한 시간 동안이나 쏟아놓았다. 그래도 함께 옆에서 긴 시간 동안 들어주고 맞장구를 치고 있는 에이미와 마첼라가 대견하다. 엘리스터는 그동안 그의 앞을 지나는 하버드 학생들과 나눴던 대화들이라든가, 주변의 여러 다른 홈리스 친구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고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우리는 준비한 슬리핑 백과 양말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연신 웃는 그가 이런 말을 불쑥 내뱉는다. “나도 다른 홈리스들과 함께 내가 가진 것을 나눕니다. (I share what I have with other homeless.)” 그러면서 음식을 나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옷가지와 심지어는 입고 있는 점퍼까지 나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금방 받은 것을 줄 친구가 생각났다고 한다. 머리를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나눌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들에게도 서로간의 나눔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쓰지 않아도 많이 쌓아 놓아야 직성이 풀리건만, 늘 모자람 가운데서도 남는 그 무언가에 대해 서로들 나눌 줄 아는 여유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뒤에 센트럴 스퀘어에서 다른 홈리스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음은 날씨와 상반되게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버드 스퀘어에서 센트럴 스퀘어까지 열심히 찾았건만 고작 열 댓명 정도 만날 수 있었다. 통계상 보스톤 지역에 여름에는 6000명 정도 되다가 겨울이 되면 4000명 정도 된다는 데 그 많은 홈리스들은 어디 갔을까? 주변 경찰관들의 말처럼, 아침에는 대로에서 벗어나 뒷거리로 벗어나 마약을 한다든지 아니면 잠을 잔다든지 하여 꽁꽁 숨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보스톤 컴먼(Boston Common)으로 이동을 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여러 번 주변을 돈 후에 운 좋게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몇 개 남지 않은 슬리핑 백을 서로 나누어 네 갈래로 나눠서 이동을 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개의 슬리핑 백을 들고 사람들이 한가한 그러면서 제법 햇볕이 드는 북쪽의 잔디밭에서 한 명의 홈리스를 만날 수 있었다. 약간 비탈진 언덕에 가방을 베게 삼아 두 다리를 쭉 뻗고 모자를 얼굴에 푹 뒤집어 쓴 채 누워 있는 내 나이 연배의 홈리스였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낮잠을 방해했기에 귀찮을 법도 하건만 반가운 낯으로 서로 악수를 했다. 그에게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그려준 복음 엽서와 더불어 크리스마스 만찬을 하는 주변 미국 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역시 인근을 많이 걸어 다녀보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마지막 슬리핑 백을 주었다. 그는 무척 놀라면서 너무 감사했다. 작은 것에 그렇게까지 감사하다니… 그것도 진심이 듬뿍 담겨져 있는 감사를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감사에 인색한가 생각해 본다. 그를 마지막으로 캠브리지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첫 번째 홈리스 사역이 막을 내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셨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홈리스가 여전히 많은 것을 보면,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한 여러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필요로 하는 손길이나 주택 사정은 거리가 먼 것을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해 보인다. 어쩌면 불공평한 세상을 공평하다고 우리 머리 속으로 세뇌를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의 은혜가 떠올랐다. 은혜란 인간들을 사랑하기에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값진 희생을 통하여 마련한 최고의 선물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라는 필립 얀시의 말이 떠올랐다. 그 은혜는 흐름과 소통의 성격을 띠고 있다. 마치 큰 파도가 바다를 휩쓸어 그것을 정화시키듯이 은혜가 흐르는 곳엔 사망의 죄악을 넘어, 무관심과 탐욕의 불신을 넘어 생명의 소통이 일어난다. 생명의 소통이 일어나는 곳에 공평한 세상이 이뤄지는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은혜를 많이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연약함을 마땅히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은혜가 결코 교회 안에만 머무르게 하지 말라. 은혜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의 젖줄이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한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춥냐고 물었다. “네 엄청 추워요. 콧등이 이렇게 얼어버렸어요. 근데 날씨는 엄청 추운데 마음은 너무 따뜻해요. 우리 또 와요. 꼭 다시 와요” 오늘 따라 교회 안에서 보다 길거리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성이 이들에게는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매스 애버뉴(Mass. Avenue)를 따라 좀더 올라가니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난다. 어린 아이들이나 가지고 놀법한 작은 기타, 그것도 왼손잡이용인 기타를 옆에 낀 채 이리 저리 둘러 본다. 두툼한 잠바와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거리의 수도사 같은 냄새가 난다. 얼굴은 퀭하니 말랐건만 그래도 제법 추위에 버티는 여유로움이 있다. “HOMELESS”라는 종이 판지 위에 깡통이 하나 놓여 있고 제법 지폐랑 동전도 들어 있다. 자신을 앨리스터(Alister)라고 소개했다. 고향은 영국 스코틀랜드라고 했다. 서부 캘리포니아로 갔다가 가족들과 헤어진 후 동부로 와서 이곳 보스톤에 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홈리스가 된지는 10여년이 조금 넘었다고 했다. 나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에 사연이 많을 것 같았다. 교회에서 나왔노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일본에서 온 사람인냥 자신이 동양종교에 관심이 많다는 등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한 시간 동안이나 쏟아놓았다. 그래도 함께 옆에서 긴 시간 동안 들어주고 맞장구를 치고 있는 에이미와 마첼라가 대견하다. 엘리스터는 그동안 그의 앞을 지나는 하버드 학생들과 나눴던 대화들이라든가, 주변의 여러 다른 홈리스 친구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고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우리는 준비한 슬리핑 백과 양말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연신 웃는 그가 이런 말을 불쑥 내뱉는다. “나도 다른 홈리스들과 함께 내가 가진 것을 나눕니다. (I share what I have with other homeless.)” 그러면서 음식을 나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옷가지와 심지어는 입고 있는 점퍼까지 나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금방 받은 것을 줄 친구가 생각났다고 한다. 머리를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나눌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들에게도 서로간의 나눔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쓰지 않아도 많이 쌓아 놓아야 직성이 풀리건만, 늘 모자람 가운데서도 남는 그 무언가에 대해 서로들 나눌 줄 아는 여유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뒤에 센트럴 스퀘어에서 다른 홈리스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음은 날씨와 상반되게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버드 스퀘어에서 센트럴 스퀘어까지 열심히 찾았건만 고작 열 댓명 정도 만날 수 있었다. 통계상 보스톤 지역에 여름에는 6000명 정도 되다가 겨울이 되면 4000명 정도 된다는 데 그 많은 홈리스들은 어디 갔을까? 주변 경찰관들의 말처럼, 아침에는 대로에서 벗어나 뒷거리로 벗어나 마약을 한다든지 아니면 잠을 잔다든지 하여 꽁꽁 숨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보스톤 컴먼(Boston Common)으로 이동을 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여러 번 주변을 돈 후에 운 좋게 주차할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몇 개 남지 않은 슬리핑 백을 서로 나누어 네 갈래로 나눠서 이동을 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개의 슬리핑 백을 들고 사람들이 한가한 그러면서 제법 햇볕이 드는 북쪽의 잔디밭에서 한 명의 홈리스를 만날 수 있었다. 약간 비탈진 언덕에 가방을 베게 삼아 두 다리를 쭉 뻗고 모자를 얼굴에 푹 뒤집어 쓴 채 누워 있는 내 나이 연배의 홈리스였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낮잠을 방해했기에 귀찮을 법도 하건만 반가운 낯으로 서로 악수를 했다. 그에게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그려준 복음 엽서와 더불어 크리스마스 만찬을 하는 주변 미국 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역시 인근을 많이 걸어 다녀보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마지막 슬리핑 백을 주었다. 그는 무척 놀라면서 너무 감사했다. 작은 것에 그렇게까지 감사하다니… 그것도 진심이 듬뿍 담겨져 있는 감사를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감사에 인색한가 생각해 본다. 그를 마지막으로 캠브리지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첫 번째 홈리스 사역이 막을 내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셨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홈리스가 여전히 많은 것을 보면,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한 여러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필요로 하는 손길이나 주택 사정은 거리가 먼 것을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해 보인다. 어쩌면 불공평한 세상을 공평하다고 우리 머리 속으로 세뇌를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의 은혜가 떠올랐다. 은혜란 인간들을 사랑하기에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값진 희생을 통하여 마련한 최고의 선물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라는 필립 얀시의 말이 떠올랐다. 그 은혜는 흐름과 소통의 성격을 띠고 있다. 마치 큰 파도가 바다를 휩쓸어 그것을 정화시키듯이 은혜가 흐르는 곳엔 사망의 죄악을 넘어, 무관심과 탐욕의 불신을 넘어 생명의 소통이 일어난다. 생명의 소통이 일어나는 곳에 공평한 세상이 이뤄지는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은혜를 많이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연약함을 마땅히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은혜가 결코 교회 안에만 머무르게 하지 말라. 은혜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의 젖줄이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한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춥냐고 물었다. “네 엄청 추워요. 콧등이 이렇게 얼어버렸어요. 근데 날씨는 엄청 추운데 마음은 너무 따뜻해요. 우리 또 와요. 꼭 다시 와요” 오늘 따라 교회 안에서 보다 길거리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성이 이들에게는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