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우리는 은혜를 믿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자유함과 기쁨이 익숙하기 보다는 오히려 비은혜의 굴레가 훨씬 편하게 느껴지고 죄책감의 멍에 가운데 있는 것이 더 편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율법적 긴장감은 고스란히 그들의 얼굴에 묻어난다. 현재를 누리기 보다는 준수와 성취를 위한 얽매임이 보인다. 가을을 시작하는 우리는 다시금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는 데(교회를 다니는 데)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타락 이후로 죄성에 가려진 우리의 본성이 지독히도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으로 옭아매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것도 실수할까봐, 혹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봐 늘 두려움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왔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만드신 의도가 아니다. 당신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셨다. 에덴 동산의 자유와 생명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을 맨처음과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최후의, 최고의 히든 카드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가운데 묵혀진 오래고 시원적인 소망을 본다. 자유와 해방을 본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지만 웃음이 있는 거룩이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봉사가 있어야 하지만 포용이 있는 봉사이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섬김이 있어야 하지만 자유함의 섬김이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자로 재는 도량형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껏 담을 수 있는 무정형의 그릇이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의 은혜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 줄 수 있는 통큰 방주가 됐으면 좋겠다. 은혜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치는 참 자유인의 땀방울이 많이 영글었으면 좋겠다.
타락 이후로 죄성에 가려진 우리의 본성이 지독히도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으로 옭아매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것도 실수할까봐, 혹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봐 늘 두려움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왔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만드신 의도가 아니다. 당신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셨다. 에덴 동산의 자유와 생명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을 맨처음과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최후의, 최고의 히든 카드를 바라보아야 한다.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가운데 묵혀진 오래고 시원적인 소망을 본다. 자유와 해방을 본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지만 웃음이 있는 거룩이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봉사가 있어야 하지만 포용이 있는 봉사이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섬김이 있어야 하지만 자유함의 섬김이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자로 재는 도량형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껏 담을 수 있는 무정형의 그릇이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의 은혜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 줄 수 있는 통큰 방주가 됐으면 좋겠다. 은혜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치는 참 자유인의 땀방울이 많이 영글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