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 필그림교회 KOREAN PILGRIM CHURCH OF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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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계산할 때: 마태복음 6장 31-34절 (2013_1229)

12/29/2013

 
하나님과 계산할 때 (When We Settle Accounts with God)

성경본문: 마태복음 6장 31-34절



신년 감사예배로 2013년을 시작한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한해 마지막 주일이 빨리도 우리곁에 다가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올 한해 동안 많은 변화를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한 편으로는 어떻게 살았나 정신 없이 사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여러 면에서 힘든 과정을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제 올 한해도 이틀 정도 남았는데, 우리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고 한 번쯤은 올 한 해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달려온 인생에 대해서 솔직한 회고록을 써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져 보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 가운데 아주 익숙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6장 33절,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구절은 아주 귀에 배길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이 말씀 가운데 담겨져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이 말씀 전후를 살펴 봄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오늘 전체 본문의 내용은 6장 25절부터 시작하는데 34절까지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산 위에 모인 제자들과 거기에 함께 한 수많은 일반 백성들이 염려 가운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염려일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입니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염려가 우리의 목숨과 몸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켜 줍니다. 어떤 분은 본인의 염려하는 것이 이런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항변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그것의 궁극적인 결과와 목표점을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예수님께서 진단하신 그 말씀의 확장판임을 부인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올 한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무엇을 위해 달려 오셨습니까? 애써 애둘를려고 해도 가슴 속 깊이 나오는 답변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문제 해결일 것입니다. 다만 그 차이가 나와 우리 가족만을 위한 것인 것 아니면 더 확대된 공동체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한 두번 정도는 올 한해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다가 온 위기나 어려움은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나 가족 문제와 연결이 되고, 앞으로의 삶과도 연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이 염려로 인한 두려움(fear)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과 관련하여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염려로 가득 찬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이켜 보면 염려를 만든 후회되는 일이 많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면서 염려 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분노와 더불어 씨름하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조심 때문에 또 염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올 한 해 여러분이 경험한 크고 작은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견딜 수 있으셨나요? 모름지기 거의 대부분 마음 고생은 하셨지만 그래도 어떤 모습으로든지 해결해 오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불안하고 앞이 캄캄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절로 해결되는 것도 있고, 힘이 들었지만 마음 독하게 먹고 헤쳐 나가야지 하면서 버티고 나갔더니 이겨 나간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목회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고 염려할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지금까지 온 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맞다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마음속의 근심이나 염려는 오히려 그 문제를 키우기만 할 뿐 전혀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를 과거에 붙들어 놓고, 현재의 상황에 꽉 옭아매고 미래를 발목 잡는 절망의 바이러스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은행의 은행장인 다우링(Dowling)이 전쟁에서 다친 Veterans들의 초청을 받아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특강을 하면서 상이용사들을 막 공격했습니다. '당신들은 패배주의자들, 남을 의지하고 국가의 연금을 축내며 되는 대로 먹고 마시며 놀기만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자꾸 의지하려고만 합니까?…'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부상당한 상이용사들을 면전에서 그렇게 공격하니 그들이 화가 나서 그에게 맥주병과 재떨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당신들이 잘못하고 있고, 당신들의 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계속해서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상이용사들이 미친 듯이 일어섰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한쪽 옷소매를 걷어 올렸습니다. 쇠갈고리가 나왔습니다. 다른 소매도 걷어 올렸습니다. 양팔 모두 가짜 팔이었습니다. 그는 바지도 걷어 올렸습니다. 양다리도 다 나무다리였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여러분, 나는 열두 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눈 위에 10시간 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잘라야만 했습니다. 나는 열두 살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잃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의욕을 갖고 '이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리라.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리라. 나는 성공하리라'라고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서 이렇게 은행장이 되었습니다.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나도 노력해서 은행장이 되었는데 당신들은 나보다 낫지 않습니까? 왜 그냥 먹고 놀기만 합니까?' 모든 상이용사들이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는 이방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미래의 안전을 위해 여전히 동분서주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우리는 이방인들과는 달라야 할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크고 작은 위기의 순간마다, 염려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거나 피하게 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되 믿음으로 간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들으시고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본문은 내일 일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인생의 우선 순위를 잘 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신 없이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선 순위를 잘 정한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속도보다는 방향이 그리고 아름다운 결과를 내기 위해 정당한 과정을 거칠 용기와 힘이 있습니다. 우선 순위를 정함에 있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어느 때에 있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믿음의 사람들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두 가지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God’s Kingdom)’와 ‘그의 의(His Righteousness)’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어떤 사람이 소유하게 될까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곳입니다.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열방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 5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은 모든 염려의 근원이 되는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아래서 해결 받을 수 있고 우리 안에 영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거룩을 사모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염려의 자녀에서 생명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 속에는 반드시 우리의 구원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하신다면 이 시간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속에 모셔 들이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라는 의미 속에는 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 가족들과 형제들과 사랑하는 많은 이웃들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도록 소원해야 합니다. 마치 가장 귀한 보배를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홀로 가지지 않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그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물질숭배와 지배와 군림을 특성으로 하는 세상 나라와는 달리 우리에게 주신 학문과 물질과 은사를 통해 섬김과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속한 이방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들입니다.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거룩을 실천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분명한 거룩을 실천해야 합니다. 즉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1-2절) 다른 말로 쉽게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도 기도도, 선교도 봉사도 섬김도 교육도 이 모든 일들을 우리 안에 주신 거룩을 따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순위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두었을 때, 우리의 인생은 어렵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하시는 높은뜻 선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전에 동안 교회를 담임하게 되셨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기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에 이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본인 교회의 성전 건축과 함께 일산에 지교회 성전을 함께 건축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당연히 돈이 더 들고 힘도 더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감동을 주셔서 먼저 그 지교회를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이 아멘으로 순종했습니다. 6억이라는 별도의 재정이 들어갔지만 그 지교회가 잘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 일을 우선으로 하고 기도하는 동안 교회가 4배로 성장했습니다. 그전 같으면 재정적으로 무척 힘이 들었을 그 성전건축이 오히려 두 배 쉬워지고 성도님들이 기도와 성령으로 준비되었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아름다운 새성전이 지어지는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김동호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자신과 교회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되었더니 모든 것이 순조롭고 믿음 안에서 이것도 얻고 저것도 이룰 수 있는 은혜를 경험했노라고 간증을 하는 것을 보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거꾸로 합니다. 그러기에 이것도 얻지 못하고 저것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내년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할 것과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젠가 꼭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으로 우리와 계산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재산이나 물질을 가지고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이나 우리의 지식을 가지고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과 쌓아놓은 미래의 저축들에 대해서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것을 가지고 계산하겠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충성에 대해서 계산하시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 태풍 때문에 수해를 심하게 입은 필리핀에 기독교연합으로 구호활동을 여러 교단 지도자들이 나갔습니다. 저희 교단을 대표해서 부총회장이신 천호동 교회 정연성 장로님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구제활동을 마치고 배로 돌아오시는 중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1948년생이시니 아직은 더 일을 한창 하실 젊은 나이십니다. 한편으로는 먹먹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계산을 받으실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종말에 대해서 만일 교통카드처럼 얼마 남았는지 해가 지날 때마다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은 아무런 사인(sign)도 경종도 없이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달려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제대로 된 우선순위가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여러분 무엇을 가지고 계산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여러분은 할 말이 있습니까? 이제 올 한해를 이틀 정도 남겨놓았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그동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아멘으로 순종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정말로 믿음으로 올 한해 살았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사모하는 마음오로 준비하고 기쁘게 드렸는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우실 것에 대해서 확신했는지, 봉사와 섬김이 그저 직분에서 나오는 겉껍데기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했는지, 힘들고 어려울 일을 당할 때마다 믿음으로 나는 말을 절제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는지, 또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믿음과 사랑의 격려를 했는지, 주변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믿음으로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전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시기를 권면합니다. 이런 회고와 반성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세상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는 우리 보스톤 필그림교회 교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임마누엘: 마태복음 2장 1-11절 / The Greatest Gift: John 1:14 (2013_1222)

12/22/2013

 
2013년 성탄주일 메시지 1 : 박도술 목사

임마누엘 Immanuel

성경본문: 마태복음 2장 1-11절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은 별로 기적을 믿지 않는 시대입니다.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회의적인 시선이 먼저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접하고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기적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전혀 알 수 없었고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삶 속에서 파장을 일으킵니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 기적들이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도 역시 우리를 위해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다가온 최고의 기적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태복음 1장 23절) 현대인들은 외로움에 갇혀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고 그 안에서 자기 극복의 힘을 얻기도 하고 자기 좌절의 실패를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한 언젠가는 알 수 없는 큰 한계를 느끼게 되고 주저 앉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소식은 분명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가 크든 작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잘났든 못났든지 간에, 말을 잘하든 못하든 간에,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거리가 최고로 밀접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참 신앙인의 모습으로 그 분을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을까요?

오늘 저희는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읽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나타난 대표적인 곳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본문 가운데서 몇 가지 대조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장소의 대조입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당시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입니다. 왕궁과 헤롯 대왕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모든 율법학자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왕의 후손이 태어나려면 이곳에 태어나야 하고, 또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베들레헴은 오늘날이야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 당시에는 별로 중요치 않는 하나의 작은 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이 빛의 도시라면 베들레헴은 그저 고즈넉한 어둠이 깔린 밤의 도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이 곳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울수록 빛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처럼, 예언을 따라 이곳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큰 교회, 큰 도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있지 않으실 곳 같은 그런 곳, 즉 빛이 거하지 않는 곳,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곳, 영향력이 없는 곳 그래서 오히려 더 춥고 힘든 그곳에 마음이 가난한 영혼들에게 은혜로 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등장인물의 대조입니다. 먼저는 동방박사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연 계시에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한 시간과 때를 알려주는 별들의 움직임에 민감했던 그들에게 어느 날 밝고 큰 별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금방 그 별의 영광의 광채로 인해 한 왕이 태어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왕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하고 별의 영원성처럼 진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주실 분이 태어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타난 영광의 별을 따라 이스라엘 유대 땅까지 오게 됩니다. 산 넘고 물을 건너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뇨?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 일면 그들도 일반 사람들과 동일하게 선입 관념에 사로 잡혀 예루살렘을 먼저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그들은 그들이 확연하게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런 그들의 등장 때문에 예루살렘에 거하던 헤롯 대왕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미 나이 먹은 헤롯 대왕에게는 장성한 아들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니요? 그래서 헤롯은 대제사장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대제사장들이 대답합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이 나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을 기준으로 그들이 밝혀 낸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한 이들은 한 마디로 구약의 예언에 정통한 성경 박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과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거대한 헤롯 성전을 건축했던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를 알아보고 자기에게 알려달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헤롯 대왕도 대제사장도 서기들관도 예언을 알고 이해했건만 동방박사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중에도 믿음과 말씀으로는 하나님과 가깝지만, 정작 우리에게 나신 임마누엘 하나님께는 먼 사람들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믿음과 말씀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조금 멀어 보이지만 정작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께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부류 중에서 어느 쪽입니까? 바라기는 믿음과 말씀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있으시면서 실제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과도 함께 가까이 계실 수 있는 순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대조는 임마누엘 되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다시금 별의 인도를 따라 드디어 베들레헴 마구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마구간이나 그곳에 피곤하게 누워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 위에 머문 별의 영광의 빛과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이신 것을 그들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엎드리며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이 세 가지는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장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과 대제사장은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는 뒤따라 와서 경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베들레헴 근경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성경 박사 수준이라 할 찌라도 그 지식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일에, 예수님을 경배하는 일에 한 치의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안에는 동방박사들처럼 주를 겸손히 섬기는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즉 지식과 연륜은 있으되 참된 크리스마스의 예배가 사라진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보스톤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심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임마누엘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건만,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많은 지식이, 세상에 대한 분주함이 오히려 임마누엘 되신 참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실천을 낳지 못하고 우리의 눈이 이 세상의 헛된 밝음으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께 간절히 권면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장애물을 제치고 주님을 찾아와 경배드린 동방박사들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 여러분을 위해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경배하시길 바랍니다. 지식에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고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푸시는 새 일들을 경험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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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성탄주일 메시지 2 : 김성준 전도사

The Greatest Gift

성 경본문: 요한복음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4)



Around this time of the year, we become soaked in a cozy atmosphere of Christmas and the expectations of a New Year. It is the season that the families get together, share love, wrap up the year with thankfulness and blessedness, and enjoy giving gifts to each other. Our Youth Group had a wonderful time yesterday giving gifts to each other and appreciating each other. Indeed, it is the time that is dedicated to the commemoration and adoration for the greatest gift we received which was given from God. Every one of us might have a memory of receiving very special gift that you can never forget. However, this gift from God is not like the other gifts which entertain us only for short period of time, because the joy from this gift rather grows greater and greater every day unto the eternity. It is the Son of God, the most precious one of God; He was given to us by the love and grace of God upon us.

Jesus Christ is the greatest gift because He is the only access that leads us into all the riches and joyfulness of God. The riches and abundance of God is simply beyond all our imagination because He is the creator of the whole universe. Just as the wisest man Solomon also praised God that “Even the heaven and the heaven of heavens cannot contain Him,” His riches would overflow the universe that He created. God’s richness is not as the riches we can find on the earth; while none of the wealth and abundance can totally satisfy us even in our life time, the riches of the Father in heaven completely satisfy us – and the satisfaction will never face the end.

Jesus Christ is also the greatest gift to us because He is the only way that we can be delivered out from the darkness. The writer of today’s passage, Apostle John, teaches us that the world where we are living in is the place of darkness because all of us are blinded with unpredictable future, worries of getting harm, and most desperately, our incomplete nature which makes us to suffer in our own guilt and sin. Bible tells us clearly that all of us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and “the wages of sin is death.” For us who are all destined to be thrown into death because of our nature that is closer to evil than good, God granted us the greatest gift because He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and have eternal life.”

Most importantly, Jesus Christ is the greatest gift of God in heaven, because His glory, honor, and beauty exceed every virtue on the earth put together. His beauty is the beauty of God Himself that with the radiance of His glory, all the other glories are like a little candle light under the bright sunshine of the noon day in summer. When we see his beauty and taste his goodness, there is no way we cannot love Him and be completely satisfied: so king David also sang,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Therefore, let us all enjoy the greatest gift that is given to us from God – Let us enjoy our king who was born today. The greatest joyfulness of every Christmas festival would only be found in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who became flesh and lives with us forever.

 

너희 하나님을 보라: 이사야 40장 1-11절 (2013_1215)

12/14/2013

 
“너희 하나님을 보라” (Here is Your God)

성경본문: 이사야 40장 1-11절



 “나는 일생 동안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필요하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흑백 분리 차별정책인 아파르헤이트에 대항하여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1964년 4월에 국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후 넬슨 만델라가 법정에서 최후 진술한 것입니다. 그는 1990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남아공의 흑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동시에 차별과 구금과 폭력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암흑 같은 시간이 언제 끝날까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극도로 지키고 정신은 피폐해져 갔으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나날이 날카로워져만 갔습니다. 절망과 근심의 무게에, 암담한 미래의 무게에, 미움과 의심의 무게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내용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도 지독하던 앗수르에서 벗어나는 듯 싶더니 히스기야 왕의 실수로 인해 앗수르보다 더한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철저히 유린당하고 나라도 빼았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출애굽의 하나님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머나먼 이방 땅에서 고향을 소망하여 살아온 지 꽤 오랩니다. 실날 같은 소망도 절망의 그림자에 막혀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고난과 문제의 연속이라고들 합니다. 하나의 문제 넘어 또 하나의 문제가 일평생 가는 동안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고비 넘고 한 숨 쉬고 또 한 고비를 맞습니다. 자녀에 대해서, 사업에 대해서, 학업과 연구에 대해서 때론 잘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빠듯합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으면서도 순간 불안함이 엄습해 옵니다. 만약 우리 안에 신앙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지칠 때마다 자족 섞인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기에 있는 암울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40장 1-2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날은 언제일까요? 아마도 그들의 죄가 사함 받고 현실적인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 온 백성이 마음껏 예배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이사야서 39장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겪는 포로 생활은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약자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이제 그런 그들에게 의미 있는 단어를 던집니다. ‘예루살렘’과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이라고 지칭합니다. 마음 속에서 잊혀져 버렸을 것만 같았던 그들의 마음의 고향, 정신적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다시금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됨을 확인해 주는 단어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시면서 지금 정답게 말씀하십니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숨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게 만듭니다.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마음이 굳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굳어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 보다는 우리의 회복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냥 형벌을 받고 그곳으로 그치기만 바라지는 않습니다. 내내 그런 징벌과 고난에 침묵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신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애굽기 2장 23-25절)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들의 죄 값을 배나 치룬 이스라엘에게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도무지 들릴 것 같지 않는 먼 원방의 나라에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문제나 고통이 나 때문이든 혹은 우리 가족 때문이든, 때론 우리 공동체나 민족 때문이거든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장 8절)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회개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들으실 줄 아는 부드러운 마음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회복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이어 나온 말씀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3-5절까지는 ‘여호와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입니다. 6-8절까지는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9-11절에서는 “주 여호와의 통치가 임할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마치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와 통치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신약으로 오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했던 말씀(누가복음 3장 4-6절)과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성(베드로전서 1장 24-25절)을 사모하면서 보냈던 편지 속에 고스란히 이루어집니다. 그 약속의 신실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영원한 통치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 하나님을 보라(Here is your God)”입니다. 아무리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도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우리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는 외침이 우리의 모든 절망의 구름의 절규라면 “너희 하나님을 보라”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뚫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터져 나오는 영광의 함성입니다. 멀리만 계신 것 같았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직접 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 사건 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예수님이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올라간 그대로 오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10절과 11절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에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로로다.”

27년 간의 감옥생활에도 만델라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룰 자유와 평등의 날을 꿈꿨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 앞에 이루어졌습니다. 아파르헤이트(apartheid)는 종식되고 선거를 통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새로 태어난 자유에 영광과 희망을 돌린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법자 신세였던 우리는 오늘 우리의 땅에 세계 각국을 초청하는 귀중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우리는 결국 정치적 해방을 이뤄냈다. 우리는 아직도 빈곤과 박탈, 성차별 등 여러 차별에 묶여 있는 우리 국민을 해방시킬 것임을 맹세한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하자.” (1994년 5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기 너희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이사야의 선포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회복을 믿었습니다. 지난 12월 5일 95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기기까지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루어질 메시야의 나라를 꿈꾸고 그것을 계속해서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내가 고통 당할 때 어디 있습니까? 지난 1년 동안 내가 너무 힘들었는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 막막했는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라고 아직도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여기 당신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Here is Your God).” 인생의 환난과 고통을 다윗만큼 경험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그 고통의 자리에, 그 힘듦의 자리에 자기와 언제나 함께 하셨던 그것을 경험한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너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 18편 1-2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강절 주일을 맞아 여기 앞의 다섯 개의 촛불 가운데 우리는 세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높은 산들처럼, 때론 광야 길의 거친 비탈길처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더욱 강팍하게 하는 시험이나 환난을 겪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힘조차 없으신지요? 이 촛불들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더불어 어떠한 상황에든지 그 영광을 기다리고,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선포한 이사야의 희망에 메시지를 듣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느끼며 체험하기를 원하는 저희들의 결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친히 영광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시키시며 은혜와 공의로 이 땅을 통치하실 메시야를 간절히 사모하시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잘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은사를 사모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31절 (2013_1208)

12/8/2013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7:

은사를 사모합니다 Desiring Spiritual Gifts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2장 31절 (1 Corinthians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지만 1970년대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어찌해서 아주 좋은 자매님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매님을 따라 종로와 남산 길 등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즐거운 데이트도 하시고 마냥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쁘기도 하지만 조용하면서 지적인 모습이 참 끌렸습니다. 사귀는 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나름 본인은 신앙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라 이 자매님이 다니고 있는 교회를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자매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교회를 갔습니다. 마침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자리에 함께 앉은 자매님이 옆에 따라 온 형제님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가 자매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이 자매님 뿐만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제각각 알 수 없는 소리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본인은 기도가 의례 이렇게 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입술이 꼬인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처럼 상반신을 앞 뒤로 흔들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고 이 분은 겁을 덜컥 집어먹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분은 그 자매님이 이상하다 여겨 교제를 그만 두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이 다니던 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였고, 그 기도가 방언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 교회를 방문했는데 어떤교회는 (대부분 장로교회나 침례교회) 조용하고, 또 어떤 교회(대부분 순복음, 오순절교회, 성결교회, 감리교회)는 통성으로 방언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방언이 신앙의 체험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주신 기도의 수단임을 가르켜 줍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그리고 방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은사들 중의 한가지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즉 이 말은 방언이 은사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은사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에게 은사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한 부분입니다. 먼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Now about spiritual gifts, brothers,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고린도전서 12장 1절) 우선 은사라는 말이 여기서는 신령한 것들, 즉 spiritual gifts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받는데 하나는 은혜(Charis)요 하나는 은사(Charisma)입니다. 은혜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선물을 가리킨다면, 은사는 남을 위해 쓰여지기를 원해서 개개인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 두 가지가 매일의 삶 속에서 풍성해야 합니다. 먼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이지만 여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장 16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삶, 이것이 구원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는 말 속에는 사랑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는 세상 이웃들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을 날마다 묵상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믿음을 사용하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고 감동하시기에 흔히들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는 구원의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은 많을지 몰라도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한 은사의 필요성을 모르는 그런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신령한 것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히려 은사들을 통해서 신앙이 체험이 분명해지고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서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와 신령한 은사들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은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성령의 은사들을 보여주는 곳이 여러 군데 있지만 대표적으로 세 곳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은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은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로마서 12장 6~8절에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리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성령의 은사가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 말씀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에는 9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오는데, 우리 성도님들이 가장 흔하게 알고 계시는 은사들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 외에도 우리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더 많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은사도 은사의 하나입니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마저도 은혜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은사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어떤 은사를 받으신 분이 있고, 또 어떤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한가지 은사를 받으신 분이 있으실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여러 은사를 한꺼번에 받으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우리 성도님들이 간절히 사모하고 꼭 이런 것들 중에 한 가지 이상은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성령의 은사들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가 은사가 없어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처럼 고린도교회에도 성령의 은사가 정말 풍성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린도전서 1장 7절) 고린도교회에는 고린도전서 12장 28~30절에 나오는 것처럼 각각의 은사를 따라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가진 자, 방언 하는 사람들, 통역하는 사람들,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가 많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너무 많았기에 교회의 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4장 1절에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방언하는 사람들의 기도로 인해 교회가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 마치 ‘방언하지 못하면 구원 못 받았다’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지 교회공동체를 위해서는 우선되는 은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린도전서 14장 4절) 그래서 교회에서 통역할 사람을 세우지 않고서는 차라리 방언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은사의 중요도에 있어서 차별됨은 없지만 그래도 교회를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더욱 나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각종 은사들(특별히 9가지 은사) 위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나서 곧이어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 “사랑”이라는 은사를 통해 보여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로서의 사랑도 있지만, 우리가 사모할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되어져야만 하는 은사인 것입니다. 어떤 은사는 다른 사람이 식별할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은사는 내재적으로 은밀한 것도 있지만, 이 모든 은사의 밑받침이 되고 궁극적으로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은사만이 가장 큰 유익을 끼치며, 공동체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지키며 교회를 든든히 서게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고 우선적으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은사마다 받고 싶고 또 생각하기에 보다 큰 은사가 있겠지만 꼭 이 사랑의 은사만큼은 정말로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 성령을 통해 여러분께서 반드시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보다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데 과연 은사를 저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개개인에게 유익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든든히 서게 하고 우리의 내면의 신앙과 외면의 신앙을 튼튼히 만들어 줍니다. 받은 은사들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체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은사들로 인해 우리가 ‘안위’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들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은사를 주신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2장 7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린도전서 14장 12절) 풍성한 은사가 오히려 교회에 해를 끼치고 분열의 단초가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면 은사를 잘못 받고 사용한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너희(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립보서 2장 13절)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서 여러분이 은사를 받았다면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명심하고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는 질서와 조화의 원칙입니다. 교회에서 방언을 할 때에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듯이, 예언을 여러 사람이 할 때에는 먼저 한 두 사람이 하고, 그것도 다른 사람이 할 때에는 좀 기다리고 잠잠히 있고 그 예언을 분변하고 계속 해서 하라고 한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을 내세우게 하십니다. 더 약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상대방의 믿음을 배려하며 사랑으로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은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두번째 원칙은 우리가 은사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은사를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옥합에 담긴 귀한 향유는 그 옥합이 깨뜨려지기 전까지는 예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은사는 사용되면 사용될수록 빛이 납니다. 또 다른 은사들이 덧붙여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큰 능력과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프릿트 크라이슬러(Friedrich “Fritz¨¨ Kreisler:1875-1962)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작곡가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의 기쁨(Liebesfreude)” 등 수많은 명곡 연주자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원래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당연히 의사가 되어 병원을 물려받는 것이 자신의 은사요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라면서 자신에게 음악의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곡도 하고 바이올린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의사가 되는 것과 바이올리니스트 둘 중에 어떤 것이 다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한 번은 동네 골동품 가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낡았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꽤 좋아 보이는 바이올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곧장 들어가서 자신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주인은 이미 다른 수집가에게 팔렸다고 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그 수집가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노라고 합니다. 크라이슬러는 그 먼지 묻은 바이올린을 한 번만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마음을 담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놓고 감사했고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수집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당신 거요. 이것은 박물관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니란 걸 당신의 연주를 듣고 깨달았고. 어서 가지고 가서 방금 그 연주를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해 주시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교통하기를 소원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에게 한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모두 여러분이 받은 그 은사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제한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타난 대로 방언의 은사도 받으시고, 예언의 은사도 받으시고, 신유의 은사도 받으시고, 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지식과 지혜의 은사나 섬김의 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 가장 큰 은사인 주님을 닮는 사랑의 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거든, 혹은 이미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꼭 아낌없이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평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교회로도 하나님의 덕이 세워지고 건강하게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사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실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는 저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의 종이 된 자유인: 고린도전서 9장 19-23절 (2013_1201)

12/1/2013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6:

복음의 종이 된 자유인 Being a Servant for the Gospel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9장 19-23절 (1 Corinthians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종종 종이 된다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일본의 종이 되어 오랫동안 살아왔던 역사적 피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찌됐든 외면적으로 종이 된다는 말에는 남의 밑에 들어가서 복종해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감과 자유를 제한당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싫어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19절) 그 이유로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고린도교인들에게 이 말을 했을까요?

우선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논쟁점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논의의 주제는 우상숭배와 음식 나눔으로 인한 교회의 시험이 주요 주제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존재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입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제 만유의 주재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니 우리에게 이 세상의 우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자유자로서 당시 주변 환경과 풍속과 음식등에 거리낄 것이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 제의에 참석은 하지만 문화의 하나로서 그것을 넘어서고 신앙 양심에 거칠 것이 못되고,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들이 시장에서나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이 대접할 때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세례와 성만찬을 매번 하기 때문에 구원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입장입니다. 반면에 소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제 막 믿기로 시작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우리가 이방 신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옳은지, 혹 남의 초대를 받고서도 눈 앞에 차려진 음식들과 고기들을 보고 혹시나 이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시장에 가서도 그들 앞에 놓인 고기가 신전 제의에 사용된 것이었는지 늘 물어보며 염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심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이런 믿음의 차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오는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이 주변 세상 문화에 그들이 대하는 태도가 각각이고 그 태도에서 누리는 자유함의 강도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어떤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뚜렷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유인으로서 지식에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지식의 종이 되어 교만과 방종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국은 구원의 패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약과 연결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세례와 매 모임마다 함께 하는 성만찬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일면 신학적으로는 이런 그들의 모습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온 음식과 고기들을 묻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음식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들 속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어도 여전히 애굽의 이방 풍속을 그리워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고 하나님을 구원을 의심하며 원망했듯이 그러한 옛사람의 모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직업을 따라 참여했던 아프로디테와 각종 이방 신들에 대한 제의가 더 이상 우상숭배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러워했고 선망했다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들 중에 신전 창기들과 간음을 행한 옛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례 받았으니까, 우리는 성만찬을 하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으니까 괜찮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그들의 현세적 삶을 정당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데 이만큼 타협한다고 뭐 어때? 세상을 살면서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아. 예수 믿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때론 예수님도 이렇게 했잖아. 성경에는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잖아?’ 우리들도 역시 우리 주변의 많은 일들을 얼마나 우리의 신앙의 지식으로 정당화하고 타협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믿음의 지식으로 굳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장 11-12절).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5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지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겸손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들을 판단과 우리 삶의 정당화의 잣대로 들이 내밀지 마시고. 오히려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지 우리를 온전히 세울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또 10장 23-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 말들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덕을 세우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우리가 누릴 자유는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함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얻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전도와 믿음의 덕을 세울 줄 아는 사랑의 매임이 필요합니다. 사실 자원하여 매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매칠년 안식년 때에 해방된 종들이 주인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고마워 자발적인 종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자유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었다는 증거로 그의 귀를 뚦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그 종의 주인은 그 종을 하대하거나 막대하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종이지만 그들 아들처럼 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상호이해가 성립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에 매여 자발적으로 섬김의 종이 되는 경우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합니다.

서른 셋 나이로 200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깊은 신앙의 감동을 남겨주고 떠난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인 안수현 형제입니다. 2000년도에 한국에 의약분업 분쟁으로 인해 거의 모든 병원에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다 파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설령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밤에 몰래 와서 진찰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당시 대세는 파업이었습니다. 특별히 위계질서가 엄한 병원에서 개인행동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대 안암병원에서 레지던트 2년차였던 안수현 형제는 홀로 남아서 끼니를 걸러가며 밤을 새우며 환자들을 지켰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의 명분이 많이 있었지만, 의사란 환자 곁에서만 의미가 있다라는 소신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바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앞으로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파업 병동을 지켰습니다. 이때 사람들 중에 드러내놓고 혼자 튄다고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러 논리에 밀려 위로 받지 못하고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병원에서 도움이 될 길과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위해 기도하면서 병원에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고대병원 내과 R2 스티그마 안수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양심에 비추어 죽어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혹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음식들이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밝히면 그것을 먹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한 자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린도전서 10장 29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같이, 그리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 같이 된다는 말은 사랑에 근거한 자유함의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방식, 자신의 스타일도 포기하고 이웃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하겠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신 방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적 지식의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우리의 이웃을 얻기 위한 낮아짐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요 희생이며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오늘 똑 같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신 내용 가운데 저의 마음을 사로 잡는 예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이곳 보스톤 트리니티 교회의 설교자로 계셨던 필립 브룩스(Philip Brooks)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로버스 잉거솔(Robert Ingersoll)이라는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브룩스는 아주 절도 있고 철저한 시간 계획을 따라 사는 분이었지만, 이 무신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자주 자신의 시간 계획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그는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하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내 시간표가 아닌 그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브룩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 그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면회사절’이라는 푯말을 걸어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일 잉거솔이 찾아 오면 예외로 만나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잉거솔이 그 사실을 알고 “왜 나에게만 자네가 예외로 하고 만나주느냐?”는 물음에 브룩스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이야 다시 천국에서 만나겠지만 자네에게는 그런 보장이 없지 않느냐?”고. 이 실화는 참으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복음을 위해 사랑과 섬김의 자발적인 종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종이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복음의 지식으로 자유함을 누리지만 그 풍성한 지식에는 늘 겸손하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절제함과 담대함이 드러나 사랑에 매인 종이 되는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족의 감사: 디모데전서 6:6-8 (2013_1124)

11/24/2013

 
지족(知足)의 감사

성경본문: 디모데전서 6장 6-8절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For we brought nothing into the world, and we can take nothing out of it. But if we have food and clothing, we will be content with that.

(1 Timothy 6:6-8)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찬양과 감사로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이 곳에 하나님의은혜와 역사가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설교 후에 함께 보겠지만, 지난 주간부터 황원정 자매님께서 우리 교인들에게 ‘한 해 동안 감사한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여러분의 대답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특별히 그것을 통해 우리가 시간을 내어 감사한 내용들을 생각할 시간들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감사할까요? 아마도 대부분은 사업과 장사가 잘 되는 것, 대학이나 시험에 합격된 것, 취직 된 것, 진급 된 것, 자녀를 출산하거나 그들이 잘 되는 것,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 등등 우리 삶에 유익이 되거나 좋은 변화가 생길 때 감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이 진정한 감사가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이다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몇 구절 중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만약에 어떤 일이나 상황이 전개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조건부의 감사도, 혹은 “이러 이러 해 주셨기 때문에”라는 결과론적인 감사도 아닌, 주님은 언제나 항상 모든 상황 가운데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건(if)과 결과의 감사(because of)를 뛰어넘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in spite of)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 감사를 배우는데, 실천하는데, 그리고 보다 성숙한 감사로 나아가기 위하여 그 출발점을 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감사의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가운데서 그 힌트를 찾아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하며, 본문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말은 ‘만족하는 마음으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만족하나 보았더니 우리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음으로 만족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6절과 8절 사이에 지족(만족)이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 사이에 7절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7절은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의 인생을 말해줍니다. 즉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우리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기에 우리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만 있다면 만족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감사가 참 쉬워 보입니다. 적어도 저나 여러분에게 있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 내용과 관련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 구절 들에 숨겨진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끝내고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의 40년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날마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또 주신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40년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의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의 발의 신이 헤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명기 29장 5절) 무엇입니까?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광야의 모래 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가릴 낡지 아니할 옷과 거친 광야를 걸어가도 헤어지지 아니할 신발을 저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40년 동안에 필요한 옷과 신발과 만나와 메추라기의 양은 얼마나 될까요?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그런 필요를 먼저 아시고 매일 매일의 순간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베푸셨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경건의 의미 속에는 내 삶의 순간 순간 마다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의 필요를 아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신다 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내게 없는 것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게 없는 것을 나의 방법으로 무리하게 구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때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나의 형편 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예수 믿는 나를 사랑하사 나에게 필요한 것을 예비 해 주셨고 또 그것을 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소유와 경제와 건강의 압박을 극복하고 우리 안에 모든 것을 필요를 따라 공급하실 신실한 하나님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전부를 주신 분이십니다. 그 전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외아들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불평과 원망의 근원이 되는 죄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믿음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결국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만족한다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역과 그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숨겨져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의 출발점이 전부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데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 17-18절)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게 못하게 되면 죽도록 내가 고생하고 죽도록 내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염려하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일 매 순간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모님이 한창 때에 무거운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집안 일 하랴, 자녀 양육하랴, 목사님 일 도우랴, 몸에 버겁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랬나 보다 생각하니 원망이 그렇게 터져 나올 수 없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는 자기에게 남편이 다가옵니다.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요. 나 혼자 있게 내 버려 둬요.” 목사님도 아내에게 미안한지라 그냥 나옵니다. 목사님도 힘들어서 신학교 시절 은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은사님은 목사님에게 조용히 예쁜 노트 한 권을 내어 주시면서 그것을 아내에게 갖다 주면서 감사할 내용을 적어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저녁때 병실에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사모님께 은사님의 권면을 전했습니다. 밤중에 사모님은 그 빈 공책을 들여다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몸도 아픈데 감사라니…’ 그래도 은사님 얼굴이 떠올라 한가지 한가지 적어보기 시작합니다. ‘그래, 당장은 내게 먹을 것이 있지. 내게 먹을 것 주신 것 감사해야겠다. 그래 입을 것도 있지…’ 하나씩 하나씩 적다 보니 밤새 감사의 내용으로 채워갑니다. 한가지씩 감사를 외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불평과 원망이 차츰 가라앉습니다. 남편에게도 미안합니다. 그렇게 몇 날 몇 주가 지나더니 몸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무겁고 힘든 병이 점점 가벼워집니다. 몸에 힘이 생깁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했더니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미국 추수감사절의 근원이 되는, 플리머스(Plymouth)에 첫발을 내디딘 청교도들에게서도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영국에서 오는 도중에 거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곳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그 다음에 첫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야생 터키와 콩, 옥수수, 그리고 호박 등 그들이 굶주림을 면할 정도의 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그것을 쌓아놓고 다같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추수 감사 예배에는 다른 고상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주 내용이었지만,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그들의 예배 가운데는 이런 신앙고백이 담겨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잠언 3장 9-10절)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고 확신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미리 신앙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족한 줄로 알았던 그들의 믿음이 오늘의 부강한 미국을 만든 그 신앙임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출발해서 친히 모든 것을 채우실 것을 미리 고백하고 감사하는 지족의 감사가 참된 경건의 출발점입니다. 그 곳에서부터 감사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전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 믿음이 일평생 저와 여러분을 이끌어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 고린도전서 7장 3-5절 (2013_1107)

11/17/2013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5: On Marriage and Celibacy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7장 3-5절

지난 번 밴쿠버에 머물던 마지막 날 저녁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도시 구경을 하고, 귀국을 위해 이것 저것을 다 챙기신 부모님과 두분 친구분들 내외가 저와 함께 나란히 식탁에 앉았습니다. 말하자면 이삼십년 만에 만난 고향지기들이 10여일간의 긴 여행을 정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캐나다에 사시는 아버님 친구분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꺼냅니다. “아들 같지만, 그래도 이 시간 목사로도 우리한테 왔으니 목사님으로서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무거운 주제가 나와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글쎄요. 각자가 처한 상황과 형편을 먼저 들여다 봐야겠지요.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이혼을 되도록이면 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성경의 몇 구절과 사례 몇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다른 친구 분은 ‘뭐 이렇게 좋은 날에 여행을 정리하고 친구들끼리 다음을 기약하고 칠십 넘은 우리의 생애를 어떻게 잘 마무리할까를 의논해야지 목사 아들이 왔다고 갑자기 뭔 이혼이냐?’고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내 마음 속으로는 오히려 서울 친구 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서 그냥 짧게 간단히 말씀 드렸습니다. 오히려 그분들 좋은 분위기를 제가 끼어 듦으로 인해 할배들 속에 잔심부름이나 하는 짐꾼 혹은 그저 편한 아들이 아닌 그분들 잠재의식 속에 ‘목사님’이란 적지 않은 부담감과 실재에 대한 질문을 편하게 묻고 싶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스톤에 돌아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왜 그분은 그런 질문을 했을까? 너무 좋아 보이는 그 두 부부가 황혼 이혼할 것도 아닌 것 같고, 자녀들도 아직 결혼하지 아니 했으니 그렇고… 그래도 주변에 소중한 사람이 어려운 과정을 겪는데 그래도 교회에는 나가시니 조그마한 신앙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와 줄려고 하고 있나 보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고3 부모라 학교에서 하는 Financial Aid Nights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지원하는데 연방정부와 Massachusetts의 Loan 프로그램 신청방법을 자세히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과정을 명쾌하게 듣던 중 발표자와 학부모들의 질의 시간이 있었는데 제 시선을 끄는, 이제는 제법 여기 보스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것이 되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신청서란에 부모의 인적 사항을 적는 난이 있는데, 부모가 누군지에 대해서 발표자가 진짜 함께 사는 생물학적인 부모, 입양 부모, 동거하는 부모, 이혼과 재혼으로 생기는 Stepdad, Stepmom, 그리고 동성결혼으로 함께 사는 아빠와 stepfather, 엄마와 stepmom이 그것이었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그 범주가 한 두 가지였을 그것이 상당히 복잡해지고 많아졌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뭔가? 우리에게는 흔하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가까이 왔구나. 문제가 무엇일까? 결혼은 무엇이고 혼자 살면서 자녀를 입양해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그전부터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주제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현실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더욱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한번쯤은 말씀을 통해서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입니다. 얼핏 보면 결혼한 부부간에 의무를 다하라는 좁은 의미로 비쳐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는 보다 넓은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전서 7장과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한 권면이 자세히 들어 있는 에베소서 5장을 함께 펴놓고 말씀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린도교회의 가정의 모습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몇 가지 현실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2절에 나오는 ‘음행’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표면적으로 결혼을 장려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이방 신들(아프로디테 등등)에 대한 제의 축제가 활발해 성적문란을 조장했던 로마 시대의 사회 문화적 현실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내적으로는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가만히 스며든 이단인 영지주의의 폐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영은 거룩하고 육은 나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 하는 성적인 방종은 신앙적으로 괜찮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차피 썩어지고 없어지며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기에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결혼한 사람도 외도가 자연스러웠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동거나 성적인 문란함이 많았다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현실은 결혼한 사람들 간의 문제입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 나오는 단어 중에, ‘갈리운다’라는 단어와 ‘믿지 않는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 믿지 않는 일반 세상 사람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신앙과 가치관의 충돌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혼이라는 문제가 실제적으로 많이 불거졌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지 않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15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모습은 고린도교회 내에 상당부분 결혼하지 않는 독신자들(주로 처녀들)과 (주로 이혼이나 사별한) 과부들이 많이 존재했다라는 사실입니다. 34절과 36절을 보면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 그리고 36-37절에 ‘혼기도 지난 처녀 딸’이란 말과 ‘남편이 죽으면’이란 단어를 통해 그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정욕이나 음행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결혼하되(2절, 9절) 되도록이면 주의 일을 염려하여 자기와 같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유익하며(8절, 26절) 결혼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16절),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2절, 27절)이 성도의 삶이라고 고린도전서 7장에서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한 형편에 처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근본적으로 주고자 한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7장 7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결혼과 독신이라는 두 형태에 대해서는 (물론 혼기에 찬 자녀를 두신 부모님이나 혼기를 놓친 형제 자매님들에겐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은 꼭 해야 돼.’라는 필수요건이 아니라, 결혼이든 독신이든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입니다. 은사(gift)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는 single로 사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면 그들의 삶을 존중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결혼을 훨씬 더 권장하지만,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님 만을 소망하고 경건하게 하나님 뜻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면 그들의 의지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사람이든 독신자이든 간에 우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들로서 주어진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나오는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요한계시록 14장 4-5절)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따라 동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한 신부들로서 살아야 되는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린도후서 11장 2절) 우리는 모두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독신의 모습으로든 혹은 결혼한 부부의 모습으로든 그 각각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십자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셨듯이 우리도 거룩한 신부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그런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번째로, 이미 결혼하신 분들과 결혼하실 분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결혼이 꼭 음행과 정욕의 시험을 피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결혼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7장 10절에서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3-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결혼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제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떠남”으로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두 부부가 연애든 중매든 일정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여 ‘연합’을 이루고, 결혼을 통한 성적 연합을 통해 마치 아교를 붙여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라기 2장에서는 결혼을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맺어 주신 언약(covenant)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the wife of your marriage covenant)로되 ….”(말라기 2장 14절)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때 목사님 앞에서 서로 선서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많은 가족들과 회중들 앞에서 서로 상대방을 향해, “나 OOO는 OOO를 아내/남편으로 맞아 죽음이 삶을 갈라 놓을 때까지 젊을 때나 늙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서약합니다.”라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특성상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절대적인 구속력이 있기에 결혼을 소중히 하고 그것을 지키기에 끝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마치 물건처럼 구입하고 마음에 안 들면 갈아치우는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부족하여도, 모자라도, 아교로 붙인 것처럼 정말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의 관계를 이루는 거룩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맺은 언약의 관계는 결혼한 부부에게 서로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7장 3절에서,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무일까요?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구체적인 결혼 생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결혼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중요한 의무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giving’(주심)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결혼한 현재로부터 미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내어 주셨듯이 부부도 서로 서로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합니다. ‘남편들아’라는 말을 보니 주로 남편들이 그러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다 주고도 그것을 되갚으라고 요구하지 않듯이 결혼한 부부가 서로 서로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모든 부분까지 용납하고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주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이나 보스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개인적인 성향과 문화적인 의미로 동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연합의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겠다라는 말 속에는 다른 것은 다 주겠는데, 정작 필요하고 중요할 때 나는 나를 너에게 주지 않겠노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중에 동거하고 있는 자녀들이 있다면 이 점을 상기시키어 빨리 결혼하도록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한가지 의무는 에베소서 5장 28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앞선 구절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모습은 남편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흔히 결혼은 사랑의 느낌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 느낌은 평생 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는 action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두 부부가 그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사랑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즘의 속된 말처럼 자식들 다 키우고 60넘어 은퇴하고 무능력해진 남편에게 황혼이혼을 선언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경험하기 보다, 결혼 하셨다면 매년 매년의 결혼이 더욱 아름답고 성숙할 수 있도록 깊은 사랑을 계속해야만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TV 광고에서 보는 것처럼 맞잡고 가로수 길을 걷는 노부부를 보고 다시 손을 잡은 젋은 부부의 힘찬 발걸음과 사랑에 대한 맹세처럼 여러분의 부부의 모습이 더더욱 아름다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혼과 재혼을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7-9절에서 바리새인과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바리새인이)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사도 바울도 불신자와의 이혼에 대해서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7장 15절) 일면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 인정을 하십니다. 그래도 믿음의 가정들은 이혼률이 적고 가정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어도 우리 주변에 너무도 흔한 것이 이혼과 재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출발점이 우리 마음의 완악함과 음행/정욕에 대한 시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하면, 그리고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는 26절 말씀처럼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가정 선교사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혼에 대해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동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7장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사단의 끊임없는 시험에 이기지 못하여 정말로 부부간에 많은 고통과 상처를 경험하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별거나 이혼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 이혼에 대해서 사람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교회의 책임이 먼저임을 자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지고 조각난 가정을 가진 주의 형제 자매들이 다시금 말씀을 통해 회복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을 때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제 2의 선물로 주어진 그 부부관계와 가정을 소중히 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결혼과 이혼, 재혼 그리고 독신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때가 점점 가까이 옴으로 하나님과 주님에 대해서 거룩한 신부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부부 간에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희생과 생이 다하기까지 서로 아낌없이 노력하는 사랑의 행위로 여러분의 결혼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혹 하나님의 은사가 있어 독신으로 살면서 거룩함을 지키고자 하는 분의 의사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 정말 많은 고통 중에 스스로와 서로간의 노력에 반해 그래도 인생의 생체기가 될 그런 이혼을 하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그런 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먼저 헤아려 주시고 그런 분들이 믿음과 말씀으로 새롭게 가정을 꾸리고 재혼함으로 부부관계를 맺을 때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정에 선 그리스도인: 마태복음 5장 22-25절 (2013_1110)

11/10/2013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4:

법정에 선 그리스도인들 Believers at Court

성경본문: 마태복음 5장 22-25절, 고린도전서 6장 1-11절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들은 교회를 생각하면 사랑과 용서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 집(home) 외에 그 누구든지 찾아 갈 수 있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안아 주시고 쉬게 하시는 곳.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용납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십니다. 우리의 거칠고 피곤한 심신을 쉬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동일한 양이고 자녀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무언가 가슴에, 어깨에 그리고 생각 속에 메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 그것들을 좀 내려 놓고 주님 안에서 좀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주 품에 안겨 거친 파도 가운데서도, 폭풍 가운데서도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잠잠히 주님과 날아오르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 운전을 합니다. 운전을 하다 좀 신경 쓰일 때가 있습니다. 앞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든지, 아니면 뒤에서 뭔가 뻑뻑하게 돌아간다든지, 차에서 이상한 흔들림이 느껴지면 우리는 차량 정비소(Car Care Center)를 찾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나, 휠 발란스가 나갔나 하며 혼자 생각을 하는데 가끔 조그마한 이상 징후가 더 큰 일들이 벌어지기 직전 우리에게 경고신호를 보냈다라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도가 갑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니 냉각수가 떨어졌나 보다 했는데 실상은 Radiator가 나간 경우, 오일이 자꾸 새서 열어봤더니 엔진이 이상한 경우 등등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론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부흥의 조짐으로 성도들이 평안해 하고 잘 모이는 것아 보이지만 실상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작은 일들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큰 곤란을 겪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 1-11절 말씀과 더불어 함께 마태복음 5장 22-25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일이 더 나빠지기 전에, 그리고 우리에게서 교회의 모습이 손상되기 전에 과감히 끼어 들고 그런 일들을 해결하라고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훈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감지한 고린도교회의 이상 징후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전서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말이 좀 애매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좀더 자세하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메시지(The Message)”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 대범하게도 서로 서로를 법정에 고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좀 잘못됐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그리스도의 가족들 대신에 하나님의 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세상 법정에 가져가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다른 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대담하게 도전적일 수 있습니까? 어찌 믿는 성도들끼리 서로 서로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고소함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부끄러운 그런 일들을 행하신단 말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믿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다투면서 이것을 세상 법정에 가져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첫째, 하나님의 형제 자매들을 서로 다투지 않고 송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라고 왜 다툼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이유가 가지 각색 입니다. ‘순전히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돈을 얼마 빌려 줬는데 갚지 않는다,’ 심지어는 ‘저 사람이 내 아내에게 집적거린다,’ ‘거짓말을 했다’ 등등… 목사와 목사끼리, 목사와 성도끼리, 그리고 성도와 성도끼리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싸움은 교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목사와 성도들의 믿음과 신뢰를 이간질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를 방해하는 눈 앞의 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그룹화 함으로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2-24절)

즉 믿는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던지울 정도로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툼이나 원망이 생길 때,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예배보다 우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서로 그런 마음을 갖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향한 최고의 존중과 격려와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연약한 죄성을 가진 존재들이기에 서로 다툴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졌기에 우리가 먼저 화해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노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내에 다툼보다, 싸움보다 한 형제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세상 법정 보다 교회를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특별히 교인들간의 고소 문제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2절에서 6절에 이렇게 고린도교인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온 세상을 심판하게 될 여러분이 그 정도의 사건 하나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일쯤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자들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신자가 신자를 고소하여,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의 질책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즉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이런 분쟁과 소송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로서 타락한 천사들까지 우리가 함께 심판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오직 (우리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장 9-10절) 입니다. 하다 못해 바울이 6장 11절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의롭다 함을 얻은 백성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절대 우위의 위치를 점하건만, 믿는 사람들끼리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한다는 사실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6장 7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형제의 허물을 지긋이 눈감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아 주는 그런 손해 봄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툭하면 “I will sue.” “Let’s see in court”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법정 분쟁이 일상화되어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문제를 가지고 목회자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재판하는 것도 우리는 심심찮게 봅니다. 과연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행위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웃음거리이고 조롱거리이고 오히려 전도가 막히게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이런 법정 고소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이 닫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열린 공간인 시장이나 광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반 시민들 사이에 공개적인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파장력이 강했습니다 세워진 재판관과 방청객들은 대부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이었습니다. 작은 사건은 적은 수의 시민들로 구성됐지만, 사안에 따라 때로 60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한 기록들을 보면 우리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법적인 해박함이 있었고,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세상 법정을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당시 법에 해박했던 바울도 법의 여러 혜택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형사법 같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협조하고 또한 필요를 따라 이민법이라든가 노동법 같은 것들은 세상 법정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성도간의 다툼의 원인들은 오히려 민사적인 성격이 짙습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구나.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장 8-10절)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불의한 일들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음란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우상숭배, 동성애, 정직하지 못하고 도적질 한 일들, 남을 해치고 욕심을 부리는 일들로 인해 같은 교인들에게 손해와 피해를 입혔던 것입니다. 그런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서로 싸우고 세상 법정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런 일들을 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받는 다는 것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회 내의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갈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교회가 해결할 수 있다라고 믿으십니까? 앞서 열거된 불의한 일들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중재 능력이 있고 또 화해 능력이 있단 말입니까? 교회는 강제력도 없고 다들 듣기 싫은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오늘날의 교회가 더욱 불의를 눈감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다양한 공격들이 교회를 향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전제는 교회는 그런 문제와 분쟁들을 해결할 영적인 권위와 그런 성숙한 믿음을 가진 목회자와 중재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기 전에 일이 더욱 커지기 전에, 일이 더욱 악화되기 전에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성도들이 이것을 듣고 판단하여 해결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입니다. 모든 허물을 무조건 덮을 수만은 없지만, 불의로 인해 완악해지고 영적으로 어두워진 형제 자매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우리는 권면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교회가 키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에 나오는 ‘빚진 자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고 은혜 안에 거한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대한다면 두렵고 떨리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영적으로 훈계할 때 여러분이 들으실 수 있을 지 걱정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을 드렸을 때 여러분이 그것들의 불의를 빨리 깨닫고 돌아 오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도 간에 법정 분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 내에 생기는여러 가지 불의 때문에 서로 서로 다투고 관계가 악화되어 개인과 개인 사이를 넘어 교회마저도 더 큰 안 좋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누구인지 먼저 자각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교회에서 해결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기르고 교회 내에 그런 성숙한 신앙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혹 아직도 우리 안에 꼭 우리 안에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믿는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고 혹은 과거의 다툰 상처 때문에 벼르고 계시다면 우리가 제단 앞에 있는데 먼저 화해하고 해결하고 주님 앞에 서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안에 혹 이상 징후가 나타나거들랑 무시하지 말고 말씀과 사랑으로 잘 해결해서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인생의 전환점: 갈라디아서 2장 20절 (2013_1103)

11/3/2013

 
인생의 전환점 Turning Point in Your Life

갈라디아서 2장 20절 (Galatians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금년도 부활절 새벽예배 시간에 색다른 순서가 하나 첨가 되었습니다. 매년 미국교회와 함께 드리는데, 올해는 퍼킨스 목사님(Rev. Robert Perkins)께서 평신도 한 분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에게 부활의 간증을 하게 하셨습니다. 조금은 초췌하고 남루해 보이는 양복을 입고 약간은 추위에 얼어 붙은 그의 얼굴이 보통의 평범한 삶을 산 것 같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린 딸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연신 입김을 불어대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한때 정말로 좋은 직장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직이라는 큰 어려움이 닥쳐왔고, 그로 인해 이혼과 가족들이 흩어지고 이어 오랜 동안의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됩니다. 겨우 홈리스 수준은 면했지만, 자책과 연민 속에서 한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불규칙하게 교회를 나갔지만 평안함도 기쁨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설교가 갑자기 귀에 들어왔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나같이 실패한 사람에게도, 나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이것이 끝이 아니구나! 고난이 끝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있구나! 그래 나도 예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이것이 이 집사님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이 집사님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직장도 새로 구하게 되었고, 다시 합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과의 관계도 새롭게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되고 바뀐다라고 해 왔습니다. 즉 인생에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된다라고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무척 기쁩니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변화된 삶을 살고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해도, 그리고 말씀을 듣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것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역시 많이 보아 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일까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사야 6장 9절)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대학생 시절에 제 마음에 제일 남은 설교는 김중기 교수님의 “생동하는 믿음”이라는 설교였습니다. 본문이 마가복음 10장 17절부터 22절까지 였는데, 그 본문 또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변화되지 않는 부자 청년 관원에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로 한 부자 청년 관원이 나옵니다.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먼저 계명을 지켰느냐고 물어보신 후에 다 지켰고 말씀대로 행했다라는 청년을 보고 한마디 거두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가복음 7장 21절) 예수님의 권면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대로 과연 이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영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런 깊이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란 성급한 면이 있습니다. 이 청년의 면모와 행동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서 오늘날의 국회의원보다 더 큰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년이었기에 젊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힌트는 바로 22절에 나온 말처럼 “근심하는 것”이 많아서였을 것입니다. 한 가지를 가진 사람은 한 가지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세 가지를 걱정하는 사람은 세 가지를 걱정합니다. 진짜 “영생”에 대한 관심보다도 어떻게 하면 ‘영원히’ 지금의 부를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원히’ 권력을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돈 좀 벌어놓고 교회 가겠습니다.” “이번에 잘 되서 시장 뱃지 달고 교회 나가겠습니다.” “나이 들면 교회 나가겠습니다.” 수많은 걱정거리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신앙의 출발점은 내게 가진 모든 것보다 무언가 부족한 그 어떤 값어치 있는 대상이나 의미를 발견하고(깨닫고) 그것에 우리의 전부를 맞바꾸는 행위 (선택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전환점을 맞이하시길 바란다면 제발 걱정 근심거리들을 내려 놓고 믿음을 가지려는 하는 강한 의욕과 예수님에 대한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 나라(혹은 영생)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의 부자 청년도 영원한 생명을 간구했지만,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청년 관원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3,5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는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니고데모가 과연 거듭났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만 나중에 예수님에 대한 심판과 죽음 이후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 지내는 부분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가져 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 세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 세례는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못난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경험을 하는 것이 바로 물 세례를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변화가 없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는 회개는 하는데 자신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민 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고생 고생하면서도 믿음으로 큰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삶의 태도와 정신은 이민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 믿고 제 자신을 참 많이 참고 견디고 죽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저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던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았네요!” 예수님은 믿되 자아는 죽지 않는 그래서 남을 보며 의식하며 사는 씁쓸함이 많은 이민자들을 봅니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철저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물세례와 관련해서 교훈을 주는 성경의 사례가 구약에 나타납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아람(오늘날의 시리아)이라는 나라의 큰 장군으로서 여러 전쟁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며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던 이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불치의 병이자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인생의 큰 위기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을 침입해서 사로잡아 온 아이 중에 자기 아내를 보필하고 있는 여자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해 듣게 됩니다. 여러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몸을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씻으면 낫는다는 말만 듣고 오게 됩니다. 자존심과 교만으로 꽉찬 그의 자아가 죽지 못했을 때 이렇게 외칩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열왕기하 5장 11-12절) 노기를 띤 장군의 성급한 행동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참으로 지혜롭고 좋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니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자신을 몸을 일곱 번 씻었을 때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가 죽는데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저 예수님을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어렵다면 도대체 이보다 쉬운 일이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저 말씀에 순종해서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만 씻었을 뿐인데 나아만 장군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만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로마서 6장 4,5절)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시고 안 계시는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라는 것을 금새 눈치챌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성령충만 하면 크게 박수치고 방언하고 밤새도록 기도하는 것을 상상하는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우리의 열심 있는 기도와 봉사로 인해 일상에서 많은 신유가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사업을 주장하셔서 번창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전반에 역사하시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마음,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삶,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바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론다 번(Rhonda Byrne)은 “시크릿(The Secret)”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상황이나 환경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생각의 결과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현 상태을 바라보면서 ‘이게 나야’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현재 돈이 얼마 없거나 원하는 배우자가 곁에 없거나 원하는 만큼 건강하지 않다고 해보자. 그건 당신이 아니라. 과거의 생각화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다.” 고도원씨는 “아침편지”에서 이 말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생각과 행동이 미래의 결과를 만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는 마라톤의 반환점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순간이 바로 터닝 포인트입니다. 생각과 행동을 바꾸면 그로부터 삶이 바뀌고 미래가 바뀝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행위가 바로 믿음을 가지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행동이 바뀝니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물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자아가 예수와 함께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신 사신 것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무언가에 된통 걸려 넘어진 것처럼 인생의 위기나 멈춤의 시기에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시고 걱정 근심거리를 좀 내려놓고 믿음이라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거듭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는 더 나은 삶과 온전히 선물로 주어진 영생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순결한 그리스도인: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2013_1027)

10/27/2013

 
고린도교회를 향한 도전들 3: On Sexual Immorality

순결한 그리스도인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I Corinthians 3:16-17)



연세가 많은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항상 기도에 열심이시고 여러 가지 봉사에도 열심이신 분입니다.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면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딸처럼 귀엽게 느껴지게 됩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새벽기도회의 인도를 마치고 조용히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권사님이 사무실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 시간에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권사님은 목사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저 목사님을 참 사랑해요” 거기까지는 가볍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이 문제였습니다. “저 한번 안아주세요” 

다른 이민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새벽예배를 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도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몇분 성도님들이 함께 새벽예배를 했습니다. 그 중에 좀 유별난 여자 성도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미국분과 결혼하신 분이었는데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새벽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꼭 목사님을 대접했습니다. 처음에는 밖에서 대접하더니 점차 목사님 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모님의 눈치야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 음식을 하시고 목사님을 대접했습니다. 결국 남편과는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목사님 가정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가정도 순탄치 못해 결국 그곳에서 목회를 그만 두시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들 중에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성적인 유혹과 음란에 관한 것입니다. 몇 해 전 서울의 유명한 목사님이 성도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큰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이곳 보스톤에서도 몇 해 전에 실제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어떤 교회가 시험이 들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문제는 장소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음란의 영은 육체적 노출을 너무도 자연시 하는 미국 문화와 더불어 우리 곁에 너무도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교회가 도전한 두번째 문제가 바로 성적인 타락 문제였습니다.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2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아버지의 첩을 상대로 관계하던 음란한 고린도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고 기도하던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5장에서 다루면서 그들에게 이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도록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험을 이기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요? 고린도교회의 성적인 부도덕과 관련하여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한가지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매일 묵상해 갈 때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멀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각인시켜 줍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장 1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바울은 재차 이것을 확인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값을 주고 하나님께서 사신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저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거룩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절대로 죄와는 공존하지 말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또 다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 죄를 범함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적인 유혹은 이런 우리의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상관없이, 혹은 깊이기도하는 우리의 영적인 진지한 상태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유명한 많은 목사님들도 한 순간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이란 책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은 마치 강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강물이 제방 위를 넘을 때는 위험한 것이다. 그릇된 성적 욕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방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일생 동안 결혼 생활을 통하여 함께 사는 것이다. … (기도를 통해) 강물이 제방을 넘쳐 흐르는 것을 영상으르 그리면서 주님께 그 강물이 본래의 통로로 돌아가도록 해주시기를 요청해야 한다.” 성적인 유혹을 따라 죄를 피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언들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일단 그런 장소와 환경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호젓한 곳에서 함께 있는 것을 피한다든지, 혹은 배우자보다 더 친밀한 이성친구를 두지 말라든지 (이것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Office Wife/ Office Husband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겠습니다), 영화나 단순히 음란한 상상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하고 깨끗하며 운동에 열심이어야 한다든지 실제적인 예들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음란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 올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날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유혹으로 인한 사망의 사슬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툴리안 차비진(Tullian Tchividjian) 목사님은 [예수로 충분합니다 Jesus All] 이란 책에서 이런 예화를 들어 줍니다. 친구 중에 Steven Brown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g그에게는 영문학 수업으로 너무 고생하고 있는 로빈 Robin 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너무 어려워 낙제할 두려움에 휩싸여 공부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딸의 힘듦을 보다 못해 아버지는 영어학과 학과장을 만나러 갑니다. 영어학과 학과장은 유태인 여성으로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 영문학 수업이 너무 힘들어 수업을 철회하고자 왔노라는 아버지와 딸의 울음섞인 얼굴을 보더니 로빈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학과장은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나서 로빈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노라고 부탁합니다. “로빈 학생, 어떤 심정인지 잘 알아요. 그런데 내가 시험 점수에 상관없이 무조건 A 학점을 주면 어떨까요? 시작도 하기 전에 A 학점을 주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바보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로빈은 훌쩍거리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학과장은 로빈을 격려하면서 “A 학점을 줄게요 학생은 이미 A 학점이에요 자, 함께 수업을 합시다.” 나중에 학과장은 브라운에게 로빈이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도록 낮은 성적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로빈은 그 수업에서 A 학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구원 사역” 때문에,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실패와 심판의 위험이 제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죄와 세상과 마귀와 우리 자신으로부터 이김을 얻은 것입니다. 이 예화는 우리가 갖는 의무 한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은 보장되었으되 학교 강의는 꼭 출석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런 성적인 유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우리가 날마다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매 순간 묻고 우리의 성전을 깨끗이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육체를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의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준 교훈은 능력보다 거룩이 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음란을 행하는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것을 행한 이들을 제대로 치리하지 못하고 용납한 것에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2절은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6절에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일을 행한 신자들이 영적인 능력이 많고 교회에 여러 가지 일들을 담당한다고 해서 그들의 부정을 눈감아주고 용납하고 그들이 은사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래서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라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우리 말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말씀을 잘 전하고 기도를 잘하고 목장과 여러 사역들을 잘 이끈다고 그냥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같습니다. 포주나 혹은 Liquor Store 사장으로 일하면서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하기에 그 사람의 일을 적당히 눈감아주고 교회 안에서 여러 직분으로 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너무도 열심이고 진지하고 거룩한 체 했던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과 같은 일맥상통입니다. 많은 이민 교회 안에 이런 모습들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는 불편함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은혜와 거룩함이 언제 어느 때 필요한지 잘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은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를 바라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바라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전부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살인을 했든, 혹은 세상적으로 막 나가는 사람이든,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말입니다. 단정히 입은 옷과 깔끔한 머리의 청년들만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염색해서 머리를 세웠어도, 청바지가 좀 찢어졌어도, 그들의 모습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교회로 인도되면 우리는 아낌없이 그들을 환영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의인과 죄인이 함께하고 부나 지위나 능력의 차별이 이뤄지지 않는 은혜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의 식탁에 그 누구든지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동시에 주님을 알고 영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단했다면 계속 은혜를 간구하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되 한 단계 더 나아가 거룩함의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의 제자들로 성장한 교회 공동체에게는 죄와의 공존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은사면 전부다. 능력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덮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의 공동체입니다. 값으로 산 하나님의 몸을 귀하게 여기고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꿀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밖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 용납된 비거룩을 누룩으로 비유합니다. 5장 6-8절에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믜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은혜와 거룩함 사이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모르고 모든 죄를 단지 은혜로만 덮는다면 그 죄로 인해 오히려 우리의 공동체가 썩게 됨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것에 접촉하기만 하면 그것은긍정이든지 혹은 부정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것은 교회 안에 거룩보다 능력이나 은사를 중시하다보니 모든 것을 은혜로 덮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고린도전서 5장 11, 13절)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은혜에서 시작해서 거룩한 삶으로 신앙 생활의 방향점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필그림교회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입은 은혜의 감격과 포용을 그대로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한 우리는) 모두 더 이상 죄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구속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의 모습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담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적인 부도덕이라는 누룩으로 휘청했던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교훈으로 삼고 이 시대의 음란의 영에 맞서 성령님에 인도를 따라 거룩을 이루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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